예슬이가 갑자기 가족 여행을 가고 싶다는 거예요. 사실 주말에 시댁에서 메밀을 수확 할 계획이었던 지라 여행 출발이 순탄(?)치는 않았답니다. 토요일 아침 남편은 저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난 뒤 시골로 내려가 혼자 메밀을 베었어요. 다른 식구들은 일요일에 오기로 되어 있어 남편 혼자 토요일에 메밀을 베고 나머지 일은 다른 식구들이 다음 날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모처럼 예슬이와의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었던 남편은 혼자서 그 너른 메밀밭에서 고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시어머니의 메밀은 인기가 좋아 메밀묵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라고 합니다. 지난 추석에는 온 가족이 어머니의 메밀밭에 가서 사진을 찍기도 했었답니다. 연로하신 분이라 귀한 메밀밭을 언제까지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정말 너무 멋진 추억이 되어 남아 있답니다. 어머니의 메밀밭입니다.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세우신 허수아비도 있었어요.
남편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저는 퇴근 해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시댁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시댁 가는 버스를 처음 탄 저희들은 버스를 잘못 타 중간에서 내려 시골 길을 걸어 다른 버스를 갈아 타야했답니다. 같은 번호의 버스가 가는 목적지가 두 군데인 것을 알리 없었던 까닭에 남편이 가르쳐준 번호만 보고 탔더니만....
그렇게 시댁 마을 어귀 버스 정류장에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저희 시댁이 워낙 산골이라 마을버스 한 대 안 들어가는 곳이라...그런데 버스 정류장에서 저희 세 모녀의 모습은 정말 볼만했답니다. 노숙자 가족이 따로 없었어요. 예슬이 모습을 보면 이해하실 겁니다.
시골길 옆의 버스 정류장 의자를 책상 삼아 공책 정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정빈이는 한겨울 파카를 입고 있고 저는 그런 아이를 위해 짐을 가득 넣은 가방을 들고 있고요. 저희 모습 그려지시죠?
예슬이는 여기서 뿐만 아니라 가족 여행 동안 계속 틈틈이 공책 정리를 해야 했어요.
차가 잠시 서 있는 동안에도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이유는 안타깝게도 월요일 수행평가로 검사 맡아야 할 수학 공책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물함에 넣어 두었는데 사물함을 털렸(?)다네요. 벌써 2학기 들어 두 번째라 정말 안타깝고 속상해요. 지난번에는 미술 수행평가로 정말 열심히 한 스크래치 작품을 검사 받기 얼마 전에 잃어 버렸었거든요. 다시 한다며 새로 사온 재료를 보며 한숨만 짓던 아이는 결국 소파 밑에다 그걸 밀어 넣어버리더군요. 눈에 보이면 속이 뒤집어 질 것 같다면서요. 결국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해가긴 했지만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2학기 동안 수학 시간에 필기한 공책을 잃어버렸으니.... 자그마치 34쪽, 그것도 반으로 접어서 그 정도니...
공책 잃어버렸다며 여행이고 뭐고 시간 없다며 성질을 부리고 집에서 공책 정리를 할만도 하지만 성격 좋은 예슬이는 아버지 기다리시니 어서 가자면서 챙기는 짐 속에 공책과 샤프, 지우개를 넣더니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게 아니겠어요. 만약 자기 공책을 가져 간 아이를 찾기만 하면 그 아이 공책 전부를 확 태워버리고 싶다고 까지 말은 하면서도 예슬이는 가족 여행을 즐기는 여유를 보여주었답니다. 예슬이 참 기특하죠? 결국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공책 정리를 무사히 마쳤고 어제 검사받기 위해 선생님께 제출을 했다고 하네요.
이 참에 예슬이 자랑 한 가지만 더 할게요. 오늘 퇴근길에 서문 시장에 갔었답니다. 정빈이 키가 훌쩍 크는 바람에 작년에 입던 내복이 전부 발목 위로 올라와 빈이 내복이랑 양말 등을 사러 갔었는데 마침 예슬이가 입으면 편하고 예쁘겠다 싶은 바지가 있기에 하나 사 왔다가 어찌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다른 곳에 돈 쓸데도 많은데 뭐 하러 사왔냐고, 자기는 평소에는 교복 입고 주말이나 어디 나갈 때는 엄마가 입던 거 아무거나 입으면 된다고. 시장 갔다 늦게 온 엄마 배고프고 피곤하겠다며 저녁상을 차리면서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요. 그러더니 좀 심했나 싶었던 지, 씨익 웃으며 한 마디 하는 겁니다.
“딸에게 옷 사주고 혼나는 어머니는 잘 없을 걸요? 시장에서 얼마 안 주고 샀다고 해도 아깝잖아요. 옷 안 사주셔도 돼요.”
엄마 아버지 고생해서 번 돈 아까워 새 옷도 안 반갑다는 아이입니다. 그런 예슬이는 지금 침대에서 뒹굴며 만화책을 열심히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이번 여행은 산이 아닌 바다로 향했습니다. 남해에 있는, 별주부전의 전설이 있다는 비토섬에서의 짧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낙지포의 정경입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직접 돌을 깨고 꺼낸 해산물(굴 비슷한 건데 정확한 이름을 몰라서)을 씻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다 배탈 나면 어쩌냐 말로만 걱정하며 저와 두 아이 서로 받아먹으려고 몸싸움까지 했답니다. 아주 맛있었어요.
두 아이는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는 편인데 정빈이가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것은 산 낙지였습니다. 그 덕에 남편의 얇은 지갑에 충격이 가해지기도 했어요. 자꾸만 더 시켜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꼬물거리는 토막 난 낙지를 나무젓가락으로 집기도 잘하고 오물오물 어찌나 잘 먹는 지.....
남편이 그곳으로 여행을 간 이유 중 하나가 장어구이 때문입니다. 삼천포에서 물으면 거의 다 안다는 ‘유자집 장어구이’에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장어구이를 실컷 먹게 하고 싶어서지요. 그 부근을 여행하는 길이 있다면 꼭 한 번 들러 맛보세요. 맛도 좋지만 그 가격이 감동(?)입니다. 1㎏에 2만원이거든요. 공기 밥과 함께 나오는 장어국도 정말 맛있답니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지난여름 사량도 휴가 때 들렀었는데 그 맛과 값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았지요. 진주에 사는 동생 가족도 만나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답니다.
여행이란 이래서 좋은가봐요. 그동안 바쁜 일상에 이리저리 힘겹고 머리 아픈 일들이 많았는데 이 번 여행은 제게 정말 좋은 충전의 시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이어서 그랬나봐요.
여행 내내 가족들을 챙기느라 바쁘면서도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주는 유머 넘치는 남편의 모습과 바라보고만 있어도 편안하고 푸근한 예슬이, 말 한 마디 눈짓하나도 이쁘기만 한 정빈이. 가족이란 이렇게 함께 있어야 하나 봐요.
고물 노트북이 한순간에 새 책 원고와 사진들, 그외 청탁 받아 쓰고 있던 원고들을 한 방에 날려 버려 거의 실신하듯 누워있던 악몽의 시간도 받아 들이게 해주었고요.
가을 산이야 오고가는 창밖으로 보면 된다면서 그저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갖자며 떠난 여행이었어요. 저희 집 작은 차에 버너에 코펠 싣고 시댁서 얻어 온 고추에 배추까지 실어 키 큰 예슬이 다리도 잘 펴지 못했지만 너무 좋았다고 하네요. 모텔 마당 한구석에서 끓인 라면 맛도 끝내줬고요.
“여보, 여행 동안 먹은 게 몸보신이 많이 되었나 봐요. 몸살 기운도 있고 가기 전에는 며칠 비실비실 했잖아요. 근데 지금은 꽤 괜찮은데요?”
“꽤 괜찮다는 말이 쪼끔?”
“눈치 빠르기는.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니 이번 주에 한 번 더 먹었으면 한다는 말이지요. 산 낙지 때문인지 장어 때문이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 어머니 산 낙지도 먹고 장어도 먹고 둘 다 먹어요. (혀를 휘리릭~~하면서) 정말 맛있어요. 어머니 기운이 나는 게 산 낙지 때문인지 장어 때문인지 정확하게 모르니 둘 다 먹어요, 네? 네?”
이런 저희들을 보며 남편은 그만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더군요. 솔직히 남편은 이번 여행만으로도 용돈 없는 한달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남편과 외출할 때는 지갑을 가지고 가지 않거나 가지고 가도 절대 가방에서 꺼내지를 않거든요. 알뜰 주부거든요, 제가.
남편의 주머니도 생각해주어야 하지만 이번주에는 시간이 없어서도 안되네요. 주말에 1박 2일 대구-오사카 청년NGO 평화포럼에 온 가족이 함께 참여를 하기로 했거든요. 아이들에게는 사회봉사 참여의 기회를 주고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는 NGO 활동에 대한 이해를 넓힐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들로 구성된 오사카 KEY 회원들이 대구 KYC 초청으로 대구에 오거든요. 작년에는 저희 집에서 홈스테이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평일이 끼여 있어 아쉽게 홈스테이의 기회는 잡지 못했지만 주말에 저희 가족 모두에게 좋은 시간이 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엄마>, 꼭 한 번 보세요 (0) | 2005.11.16 |
---|---|
방송 꼭 봐주세요!!! 멘토-희망을 찾는다 (0) | 2005.11.07 |
남편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다 (0) | 2005.10.23 |
모자라지 않게 넘치지 않게! 너무 어려워요! (0) | 2005.09.27 |
남편이 가져다 준 포도 도시락 (0) | 2005.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