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때를 놓치면....’
요즘 제가 그렇습니다. 뭔 일을 하느라 그리 바쁜 지 늘 마음만 가득하고 글을 올리지 못했어요. 시어머니의 메밀밭도 자랑하고 싶었고, 정빈이 운동회 이야기도, 추석 이야기도 쓰고 싶었는데 마음뿐이었네요. 지나고 난 뒤 막상 쓸 시간이 생겨 컴퓨터 앞에 앉으니 그 때의 그 마음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의견란에 올라 온 글들도 시간이 많이 지나 보게 되면 이상하게 답글 달기가 힘들어지고요. 뭐든 때를 놓치면 아쉽고 후회가 되나 봐요.
언젠가 그 일들과 인연이 닿는 일이 생기면 추억으로라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지요.
예슬이가 중간고사 준비 중이라 평소보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어 저도 일찍 자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굳이 엄마가 깨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응원 차! 한 이틀 신나게 놀더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라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신나게 논 이유는 지난 일요일이 예슬이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거든요.
남편과 친정어머니, 동생 내외는 요즘 십대들이 가장 원하는 선물이라는 현금을, 저는 예슬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인 휘성의 최신곡이 담긴 CD를, 정빈이는 직접 구슬을 실에 꿰어 예슬이의 인형 리제의 목걸이를 만들어 선물을 했습니다.
지난번에 예슬이를 보면서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었는데 이번 생일에도 그랬답니다.
“일요일이니 다 같이 영화 볼까?“
“보고요.”
“영화 보자는데 뭘 보고요?”
“넹?”
결국 아침 먹고 케이크의 촛불을 끈 예슬이는 친구들과의 시간을 위해 외출을 했고 저녁 먹고 영화도 보고 밤 10시가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딸의 생일을 위해 시장을 봐오고 저에게
“어이, 조수! 양파!”
하며 고수의 비법은 공짜로 전수받는 게 아니라며 큰소리 쳐가며 준비한 남편의 저녁은 예슬이가 아닌 저와 정빈이의 입을 행복하게 해주었답니다.
“전화해서 9시 전에는 들어오라고 해.”
“저녁 먹고 영화관 들어가는 중이라는 문자 온 시간이 언젠데 9시까지 집에 와요?”
“무슨 영화가 그렇게 길어?”
“요즘 긴 영화는 서너 시간도 해요.”
남편도 많이 섭섭했나 봐요. 서서히 품안에서 떠나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요. 머리는 분명되는데 가슴이 안 되는 일이네요.
그래도 예슬이의 생일을 보내면서 하루 종일 참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멋진 아이로 자라준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바라보는 제 눈과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예슬이는 남편을 참 많이 닮았어요. 통통해서 첫 인상은 저를 닮은 것 같지만 시집 식구들이 입을 모아 그러지요.
‘어쩜 지 아빠 어릴 때랑 똑같아!’
은근한 미소가 이쁜 것도, 작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하는 것도, 뾰족 보이는 덧니도, 뺨에 패이는 보조개도 예슬이는 보면 볼수록 남편을 닮았어요. 그중에서도 미소입니다. 예슬이의 미소는 정말 백만불짜리거든요. 마주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예슬이의 그런 모습은 남편의 사랑과 정성의 결과라는 생각이기에 딸의 생일에 남편이 더더욱 고맙게 느껴졌던 가봐요. 제가 가끔 그런 말을 하거든요. 끔찍이도 예슬이를 생각하는 남편에게
“난 계모지 계모. 예슬이는 당신이 장가 올 때 데리고 온 당신 혼자의 딸이고.”
열 달 배에 담고 있었던 것도 저이고 하루를 꼬박 산통으로 몸부림치며 낳은 것도 저이건만 딸을 상대로 이 무슨 유치찬란이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왜 저를 이렇게 유치찬란으로 만드는지....
그러면서도 제가 남편에게 정말 고마운 것은 그저 무조건 이쁘고 귀하고,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아버지였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겁니다. 도움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단어를 찾을 수가 없네요.
여기서 다시 한 번 ‘좋은 부모’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며칠 전에 정빈이와 함께 본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생각납니다.
원작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처음 출간 된 것이 1964년이라고 하니 그 책은 나이로 보아 저와 친구네요. 영화를 본 뒤 주문한 책을 아직 읽어 보지 않았지만 영화가 너무나 ‘섬뜩하고 잔인하게 그리고 무섭게’ 남아 있어 책도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예슬이는 번역본이 아닌 원서로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고 하니 번역본이든 원서든 책으로 꼭 다시 읽어 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책벌레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솔직히 이 책은 읽어 본 기억이 없거든요.
영화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보면 ‘환상적인’,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말로 소개가 되어 있지만 저는 그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서늘했었습니다. 영화의 대부분을 색으로 나타내라면 주저하지 않고 ‘회색’이라고 말할 정도로요. 그러기에 원작을 꼭 읽어 보려는 거랍니다. 물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저 혼자만의 느낌일 수도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요.
영화에 나오는 다섯 아이들. 가난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큰 찰리, 욕심 많은 먹보 아우구스투스,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져야만 하는 돈 많은 부모를 둔 버루카, 남에게 지는 건 결코 용납이 안 되는 껌 씹기 대회 챔피언 바이올렛, 너무나 똑똑하지만 버릇없고 사람을 향한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비디오게임 중독자 마이크.
이 다섯 아이들이 초대 받아 간 곳은 초콜릿 공장. 유머가 넘치고 환상적이라는 말보다는 괴기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제가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탓이었을까요?
평범한 아이라고는 없는 다섯 아이. 증조부모, 조부모님까지 한 집에, 지붕이 뚫려 있어 밤하늘의 별을 너무나도 선명(?) 하게 볼 수 있는 집에 살면서 너무나 착하고 불평 한 번 안하고 늘 다른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일년에 단 한 번 생일에 먹을 수 있는 초콜릿을 그 많은 가족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는 주인공 찰리가 가장 평범하지 않는, 가장 비현실적인 아이로 느껴지는 순간 엄마로서의 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더군요. 이런 느낌을 받는 나는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
아이들이 공장을 구경하면서 한명씩 사라집니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너무나 충격적인 모습으로 사라지는 과정도 섬뜩하지만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도 사람을 왠지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지 못한 것은 그렇게 눈앞에서 잔인한 모습으로 사라져 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방관자적인 모습. 그들이 하는 말이라고는 고작 ‘어쩌지요?’ 정도이고 표정은 그 보다 훨씬 무미건조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는 말을 이 영화에서는 너무 강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하기 까지 했습니다. 승부욕에 불타는 엄마는 아이가 거대한 블루베리로 변해도, 즙을 짜는 공장으로 보내진 아이가 거대해졌던 몸에서 즙을 짜내고 온 몸이 요가승 처럼 자유자재로 꺾여도 냉소적이기만 합니다. 자신의 몸이 유연해졌다는 아이의 말에 엄마는 유연하면 뭘 하느냐고, 파래진 몸으로는 <대회에 나갈 수 없는데>라고.
삐뚤어지고 휘어진 사랑, 그것도 어쩌면 분명 사랑의 한 형태 일 텐데, 그건 어쩌면 사랑이 조절이 되지 않아, 너무 넘치고 지나쳐 생긴 결과일 수도 있는데, 자식의 그런 모습 앞에서 너무나 담담한 부모들의 모습.
더 경악하고 절규하며 자식의 변해버린 모습에 통곡을 해야 할 것 같은 저의 예상을 너무나도 뒤엎은 담담하고 객관적인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정말 온 몸에 소름이 좌악~~ 돋아 왔고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었습니다.
감독은 은유가 아닌 직격탄을 영화를 보는 부모에게 던지더군요. 그 직격탄은 너무 강하고 커서 영화를 보는 내내 놀란 가슴이 쿵덕쿵덕 거렸답니다.
아이를 저렇게 키운 건 누구냐고?
영화속에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난장이들인 움파룸파족이 춤과 노래로 그것을 묻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어떠냐고, 당신은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키운 아이는 이렇게 되어 공장을 나가게 된다는 장면 또한 무서웠습니다.
난장이들은 귀엽고 환상적인 이미지보다는 섬뜩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슬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똑 같은 수 십 명의 얼굴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마치 착취를 당하고 있는 노예 같은 모습에서.
공장 주인인 윌리는 ‘부모’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영화에서 윌리 엄마의 존재는 느낄 수 없고 아버지는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이가 썩는다는 이유로 먹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아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아이가 집을 나간 사이 이사를 가버리는 비정한 사람입니다. 초콜릿공장 사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 인해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억압해.”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밟아버리는 부모. 초콜릿공장 사장에게 있어 부모는 이런 모습으로 각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억압하는 존재라....
아이들을 위한 환상적인 영화라는 말에 어울리게 영화는 행복하게 끝이 나지만 정말 그럴까하는 생각....
가족간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보는 저는 따뜻함을 전해 받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카메라에 담은 눈이 내린 도시의 모습이 왜 그리 서글프고 쓸쓸해 보이던 지요. 어쩌면 감독은 요즘 자주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가족 해체’를 그렇게 보여주고 있었던 걸까요? 저 많은 비슷비슷한 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족>일까? 행복할까?
보면서도 보고 난 후에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누가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영화일까, 하는 생각...
정빈이도 같이 간 정빈이 친구도 재미있었다고 하니, 특히 정빈이는 몸이 자꾸 앞으로, 스크린 쪽으로 끌려드는 것 같아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내내 서서 보다시피 했으니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좋은 부모.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예슬이와 정빈이는 좋은 아버지를 가진 복이 많은, 행복한 아이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정빈이가 그 영화를 보았다는 말에 남편은 아는 분이 하는 초콜릿 공장에 갈 일이 생기자 정빈이를 데리고 가는 정성까지 보였답니다. 영화속의 초콜릿 공장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진짜 초콜릿 공장’에 가 본 아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행운인거죠.
오늘, 벌써 어제의 일이 되었네요. 예슬이가 학교에서 큰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친구가 생일이라고 커다란 박스에 과자를 가득 담아 선물을 한 모양인데 남편은 그게 그리 궁금한 지 얼른 뜯어보자고 난리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예슬이는 그 멋진 미소로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순간, 어찌 그리 가슴이 짜안~~해져 오던지요.
자신의 십대와는 많이 다른 문화를 살고 있는 딸을 너무 많이 그렇지만 넘치지 않게 사랑하려 노력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모자라지도 않게 넘치지도 않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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