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남편이 가져다 준 포도 도시락

착한재벌샘정 2005. 9. 10. 21:56

오늘 같은 토요일에는 남편이 저의 출퇴근에 운전을 해줍니다.

“학생들에게 운동장은 교실이야. 선생님들 운동장에 차 세우는 거, 그거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매일은 어렵더라도 토요일 하루라도 너 혼자만이라도 차 가지고 가지마. 너 하나 안 가지고 간다고 해서 뭐 그리 표가 나겠냐만서도 그저, 교사로서 너의 작은 양심이라고 생각해. 내가 태워다 주고 태우러 가면 되잖아.”

토요일은 남편의 이런 생각 때문에 거의 차를 학교에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 남편이 데려다 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택시를 타거나 정말 가끔은 차를 가지고 가기도 하지만요.

 

어제 상가에 갔다가 오랫만에 만난 친구 선후배들이 있어 그랬다며 새벽에 들어 온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해서 저는 택시를 타고 출근을 했습니다. 오후에 일이 있어 차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퇴근 시간에 맞춰 차를 가져다 가져다주겠다고 하더군요.

퇴근 시간이 되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차 가져다 놨어. 그리고 차에 보면 포도 있으니까 먹어.”

남편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일 저를 위해 포도 한 송이를 씻어 플라스틱 통에 담아 운전석 옆자리에 싣고 왔던 겁니다.

뭐든 이름 붙이고 의미 찾는데 열심인 저인지라 이것을 '포도 도시락'이라 부르겠습니다. 

운전하면서 먹다가 남겨 온 포도 도시락을 찍은 사진입니다. 그냥 통에 포도 한 송이 덩그머니 들어 있는 것이지만 그속에는 남편의 마음이 듬뿍 들어 있는 아주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에 저에게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4월에 새로운 멘티를 만나 ‘백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바빠 올 해 멘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는데 그 아이는 정말 잘 하고 있답니다. 이제는 제가 ‘백수 누나’가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라는 것도 알고 저희 집에 두 번이나 놀러 와서 저희 집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작년 멘티 ‘요술램프 지니’에 맞먹는 멋진 별명을 지어 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의 별명은 ‘매니저 정’입니다.

 

사정이 있어 7월에 뒤늦게 멘티가 한 명 더 생겨 지금 제게는 멘티가 두 명입니다. 매니저(앞으로 이렇게 부를게요) 말고 새 멘티는 고등학교를 3일 만에 자퇴를 했다는 열아홉 살의 공주입니다. 이 공주(별명이 생길 때 까지 이렇게 부를게요)는 한 방송국에서 멘토 활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면서 멘토-멘티로 알게 되었는데 많이 힘들게 결정을 했답니다. 그 중 많이 신경이 많이 쓰였던 것이 바로 매니저였습니다. 방송을 위해 새 멘티를 만나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아이를 보며 참 많이 갈등을 했었지요. 두 명을 동시에 데리고 가기에는 저로서는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니저는 자기는 저와 같이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고 결국 둘 모두의 멘토가 되기로 결정을 했지요. 공주를 만나는 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가 따라 다니고 있는데 늦게 만난만큼 공주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매니저에게 예전만큼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 저의 매니저로 채용(?)을 하는 거였습니다.

 

“선생님이 새 멘티를 만나 방송 촬영까지 하게 되었잖아. 방송인에게는 당연히 매니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일을 네가 해주었으면 해. 매니저의 역할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지 잘 알아야 해. 선생님이 잘하고 못하고는 거의 80% 이상 매니저인 너에게 달렸어. 선생님이 그 아이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같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계획을 짜주는 것도 네가 해야 할 몫이야. 얼마나 중요한 지 조금은 감이 잡히지? 내일 처음 만나는 날인데 선생님 머리는 어떻게 하고 갈까? 생머리로, 아님 묶을까? 웨이브는 어때? 내가 학교 선생님이라는 거 처음부터 이야기를 할까? 매니저가 해줘야 할 일 많지? 그래서 선생님이 너의 별명을 <매니저 정>이라고 지었어. 선생님을 위해 계획을 세워주고 옆에서 세심한 신경을 써주면서 방송 잘 할 수 있도록, 그 누나와 지금의 너처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잘 도와주는 매니저, 어때? 멋지지? ”

이렇게 하여 제가 매니저를 두게 되었지요. 연예인도 아니면서 매니저를 둔 저의 기분은....., 무지 좋습니다. 호호호

 

저의 매니저 정말 멋집니다.

머리는 생머리로 가고, 선생이라는 것은 독후감을 쓰라고 했을 때 의무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쓰게 될 때, 그 때쯤 이야기를 하라는 등의 아주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두 번째 약속에 제가 바람을 맞았다니까 다음 번 만날 때는 자기가 같이 가주겠다고 까지 하는 정말 멋지고 열심인 매니저랍니다. 교훈적인, 따분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일단 사이가 좋아질 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라면서 공주에게 해줄 이야기 까지 골라주는 매니저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일은 제가 시아버님 제사라 같이 가지 못하는데도 ‘대구 kyc'의 다른 사람들과 합천에 있는 원폭피해자 복지관으로 봉사활동을 간답니다. 너무 기특하죠?

 

이런,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빗나갔네요. 남편의 '포도 도시락' 자랑을 하려고 했는데...

오늘 퇴근 후에는 공주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공주가 쉬는 날이라 만나기로 했는데 남편은 그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는 퇴근 시간에 맞춰 차를 가져다주면서 바쁜 일정에 힘든데, 점심은 먹을 시간이 있겠냐며 운전 중에 먹으라고 ‘포도 도시락’을 준비해 준 것이었어요.

 

우리 탁이의 사고 이후 더 이상 멘토 활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던 남편이었지만 작년과 올해의 멘토 활동에도 동의를 해주었었는데 갈등 끝에 꺼낸 다큐멘터리 제작과 새로운 멘티로 인해 두 명의 아이를 함께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전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는 중이랍니다. 참 고마운 사람이지요. 그 포도를 먹는데 갑자기 목이 콱 매여 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이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참 복은 많은 사람이야.” 

 

제가 방송에서 저희를 ‘엥꼬부부’라 했었는데 그런 저를 보며 친구들이 ‘정말 아니꼬워서리...’하며 한 마디씩 하더군요.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남편은 자랑을 먹고 변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저는 남편 자랑을 참 많이 합니다. 물론 남편도 그저 평범한 사람인지라 단점도 많습니다. 며칠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었거든요.

“내가 이쁘게 보니까 그렇지 울 남편도 밉게 보자면 한정 없이 미울 수도 있어.”

 

저는 남편의 좋은 점, 자랑스러운 점, 고마운 점들을 자꾸 찾으려 노력하고 그것을 자꾸 말하곤 합니다. 제 친구들이 연애시절까지 합하면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제가 남편 흉보는 것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며 절 보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과 사는 거냐고 묻기도 합니다. 남편이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완벽한 남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흉볼 일이 무지 많지만 남편 흉은 안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저인지라 오늘도 역시 흉은 보지 않겠습니다만, 하루에 한 가지씩 남편의 좋은 점, 이쁜 점을 찾아보는 거, 그거 아주 효과가 있답니다. 그리고 꼭 기억할 것은 찾은 자랑거리는 될 수 있으면 자주 자랑을 해주어야 효과가 있어요.

남편이 저를 자랑해준다면 기분이 좋겠지요? 남편도 똑같은가 봐요.

새벽에 들어 온 것 바가지 긁는 대신 포도 도시락 자랑을 해줬으니 남편도 뭔가 느끼는 게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