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평가 과제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을 거야.
‘과학 수행평가에 무슨 책을 읽고 글을 써 오라는 거야? 과학도서도 아니고. 게다가 독후감도 아니고 무슨 과제가 3개씩이나 되는 거야?’
하고 말이야. 좀 긴 글이 될 테지만 꼼꼼히 읽어 주기 바래.
선생님이 수행평가로 우리 공주들이 같이 읽었으면 해서 고른 책은 『이름 없는 너에게』라는 책이야.
고3에 단 한 번의 성관계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된 아이가 자신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이름 없는 너에게’라는 편지를 쓰는 내용을 담고 있어. 둘 다 곧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앞두고 있던 아이들에게 일어난, 그저 분위기와 감정에 휩싸여 벌어진 단 한 번의 사건은 여자 아이에게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너무도 큰 삶의 짐을 짊어지게 만들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자 아이를 유심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마지막 부분, 남자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을 해 떠나지만 여자 아이는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길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꿈을 잠시(?) 접어 둔 채 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하거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존재해야 수정이 되지만 남자의 역할은 거기서 거의 끝이라고 할 수 있어. 임신과 출산, 육아에서(요즘은 공동 육아를 많이 이야기 하지만 책에서처럼 결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되는 엄마들이 많아) 여자의 역할은 정말 남자와는 비교가 되지를 않지. 그러니 그런 관점에서 마지막 과제는 더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얼마 전 인터넷에서 ‘리틀맘’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부터 이 주제에 관해 우리 공주들과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고 싶었단다.
‘성’에 대해 고등학교 2학년인 공주들과 40대의 선생님이 제대로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야. 리틀맘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상에 오른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그 만큼 선생님이 이 주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해왔다는 의미가 되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고 참 어렵게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단다. 그러니 우리 아가씨들도 진지하게 읽어주기 바래.
청소년기에 나타내는 우울증, 정체감 혼란 등 여러 가지 정신적인 장애들을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소개하면서 아이들이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야 한다는 것을, 영화 속 청소년들의 모습을 통해 부모가 알아야 할 청소년 심리를 전해주는 『영화속의 청소년』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
<판단능력과 통제능력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아이를 존중하고 자율성과 주도성을 발휘하게 한다는 명분하에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하도록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인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되면 그 일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를 존중해 준다고 했다가 오히려 아이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워주는 셈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니 간섭하지 말라’
‘가치관이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당황스럽다는 부모님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아이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아이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지만 위의 글에서처럼 무엇인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되면 그 일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리틀맘도 생명을 쉽게 져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선택 이전에 10대에 동거를 하거나 결혼, 그리고 임신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제대로 된 선택이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었나, 그리고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기 까지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 사회는 그들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나는 그런 아이들과는 다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 아이에게는 절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간단히 잘라 말 할 수 있을까?
중학교 때 같은 반이던 아이가 임신해 학교를 그만두었더라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바보 같이 피임도 안 했는지 몰라. 피임만 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그쵸 어머니?’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열여덟의 내 딸의 얼굴을 한 동안 바라보면서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어요, 그쵸 어머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구만.’이라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 너무 의아했던 선생님이란다. 그 때 참 많이 당황했었어. 내 딸의 주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에서도, 그리고 마지막 협박(?)까지. 농담인 줄 알면서도 섬뜩하기까지 했었단다.
“어머니 고맙죠? 전 그래도 어머니를 할머니로 만들어 드리지는 않잖아요?”
내 딸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며 몇 밤을 끙끙대며 고민도 했었어. 아이에게 ‘남자 친구는 절대 사귀지 말라고 해야 하나? 친구는 사귀어도 성관계는 안 된다고? 그럼 어디까지는 괜찮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님, 피임만은 꼭 해야 한다고 부탁을 해야 하나?’ 등등
작년에 한 아이가 이런 일로 상담을 요청해왔었어.(아이의 허락을 받고 공개하는 거란다.)
“선생님,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남자 친구와 손도 잡고 키스까지 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듣고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니?
‘남자 친구가 성관계를 가지자고 졸래대는 걸까?’
그런데 그 아이를 통해 나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님의 코드가 너무 빗나갔다는 것을 알고 정말 당황스러웠단다.
“요즘 계속....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해요. 남자 친구와 섹스를 해 보고 싶다는.... 그 친구가 하자는 것도 아닌데... 제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 친구를 만나면 그런 생각이 더 드니까 만나는 것이 두려운 생각까지 들고.... 얼굴을 마주 보면 어색하고.... 그 친구가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겁도 나고..... 이러는 제가 이상한건가요?”
리틀맘, 미혼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성폭행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이거나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성에게 쉽게 정을 주고 그로 인해 임신까지 가게 된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더구나. 하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조금 달라. 이제 이 문제는 더 이상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그래서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 있는 일부 10대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미혼모 중에 그런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들이 많은 것은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의논하고 함께 해 줄 사람을 주변에서 찾지 못해 보호 시설 등을 찾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모님들에 의한 낙태, 또는 출산을 하더라도 사회적인 시선을 생각해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표면화되지 않아서이지 그런 경우도 많을 거라 생각해.
선생님이 오늘 빌린 10대와 20대 초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잡지책에 낙태한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다룬 기사가 있는 것을 볼 때에도 우린 10대, 20대 초반의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임신과 낙태, 출산이 더 이상 일부 몇 몇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이야. 10대들의 개방(?)적이고 인 성문화의 한 결과가 바로 미혼모와 그들의 아이들이잖아. 요즘은 미혼부라는 말도 꽤 이야기 되고 있지만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고 그 뒤에 따르는 육아 또한 대부분 여자에게 맡겨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정말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 다는 말은 너무 식상하니?
다른 것 다 떠나서 아이는 많은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다고 해서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선생님이 두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아이를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다. 부모의 정서적 안정과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아이에게 정말 중요해.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었을 때는 경제적인 문제도 정말 크단다. 사랑하면 되지 돈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불가능하단다.
얼마 전 고2 예슬이가 빌려 온 만화, ‘헬로우 베이비’를 보았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단다. 유치원생이 이모 집에 와서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아이의 친척 오빠가 아이가 엄마를 너무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 안타까워 아이의 엄마를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 있어. 자기가 낳은 아이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키워야지 왜 버리느냐고, 왜 남에게 맡겨서 저렇게 엄마를 그리워하게 만드느냐며 심하게 따지니까 아이의 엄마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구나. 어느 날 아이를 때리게 되더라고.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아이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고 그래서 아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산다는 생각까지 들고 결국은 아이를 때리게 되더라고. 그래서 엄마에게 맞아가며 같이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떨어져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예전에 선생님이 술에 관해 쓴 글 속에 나오는, 5살이 될 때 까지 방안에서 갇혀서 자랐던 아이도 엄마가 열아홉에 아이를 낳아 학교를 그만두고 염색 공단 근로자로 일을 해야 했었대.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아기를 방안에 혼자 두고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을 하러 가야했다는 거야. 그 아이의 어머니도 아이를 사랑했을 거야. 하지만 당장 아이와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아이를 그렇게 밖에 키울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결국 아이는 품행장애등의 장애를 나타내고 소년원까지 가는 불행한 상황까지 맞게 되었고.
이렇게 생존을 위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아이는 충분한 관심과 사랑으로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해.
우리 공주들도 부모님이 조금만 소홀하다 싶어도 속상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잖아. 쉽게 생각해서 내가 바라는 좋은 엄마가 되어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아이를, 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함께 읽어 보기를 권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있어. 『레모네이드 마마』
이 책은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10대의 엄마와 직장에 나가야 하는 그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 다른 10대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야. 이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
“학교 책을 성경책처럼 들고 다니면,
교실에서 공부하고 시험을 잘보고
선생님에게 예쁘게 웃으면
어떤 놈이 아무 곳에서나 너를 쓰러뜨려도
임신하지 않을 것 같아?“
이름 없는 너에게의 엄마도, 레모네이드 마마의 엄마도, 리틀맘도 생명을 끝까지 지켜낸 점에서는 그들의 선택이 용감하고 또한 책임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책임감’을 발휘했어야 할 순간이 조금 더 앞이었더라면 하는 것이 너무 많이 안타까워.
자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책임, 순간적인 기분이나 욕망을 이겨내고 그 다음을 생각할 줄 아는 책임,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준비를 하는 책임 말이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남학생들에게 부탁할게. 위의 두 권의 책을 읽어보고 임신과 출산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알았으면 좋겠어. 제일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기억해줘.
사랑은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
축복과 사랑, 관심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세상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어.
아래 글은 4년 전, 예슬이가 중학교 1학년, 정빈이가 7살 때 쓴 글로 블로그 저~~ 앞에 올려져 있는 것을 다시 가져 온 거란다. ‘엄마와 아버지도 섹스를 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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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거리의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성에 대해 눈을 뜬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벌거벗은 몸뚱이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나 두 남녀의 진한 포옹 장면을 담은 영화 포스터들이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을 아이들은 주변에 널려 있는 이미지를 보면서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포스터를 보지 않는 얌전한 아이라도 텔레비전을 한 시간만 보고 있으면 이들은 곧 성적 이미지를 읽어낸다.
내 손이 참 자주 가는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의 한 대목이다.
요즈음 성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아이들의 성에 대한 노출을 우려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나는 어떤 경우든 긍정적으로 보자는 사람이다.
나를 한 번 돌아보자.
아마도 내 10대의 시절이 위의 책의 내용과 같지 않을까? 내가 성의 이미지를 접한 것은 소설 "겨울 여자"를 읽으면서, 거리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들을 보면서 였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82년 심야영화 상영이 허용이 되었었고 그 해 내가 본 대표적인 성인 영화는 "애마부인"이었다.
나는 10대에도 야한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역시 좋아한다.
그리고 여고 시절 학생과장 선생님의 "하지 마."라는 말은 내게 "꼭 해야 해."하는 말로 들리곤 했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보면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성인 사이트를 만나게 된다.
화면 한 귀퉁이에 이런 문구가 떠있고 성인 인증을 받아야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지만 이미 그 화면만으로도 너무 많은 성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을 만나게 될 때마다 생각해 본다.
10대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어머니의 주민등록 번호를 알아내고 아버지의 신용카드 번호를 알아내서라도 한 번 들어 가보았지 않을까?
나중에 들통이 나서 머리가 깎이고 얼굴이 멍이 들더라도 말이다.
10대의 나는 충분히 그러고 남을 아이였다.
난 성인 소설을 스탠드를 이불 속에 넣고 밤새 읽기도 했고, 정학을 시키겠다며 촉각을 곤두세운 학생과장의 눈을 피해가며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다녔고, 대학 졸업을 며칠 앞두고는 친구들과 함께 포르노 영화를 보기 위해 여관방을 빌리기도 했던 사람이다.
"하이틴 로맨스"를 빌리기 위해 한달 용돈이 늘 모자라 저금통을 털고, 궁색하게 동생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고, 결국은 참고서 값으로 하이틴 로맨스를 빌리고 엄마 지갑에 까지 손을 대는 아이들도 많았었다.
소설 속의 부와 멋진 외모를 가진 백마 탄 기사를 꿈꾸며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과의 분리를 하지 못해 힘들어했었던 우리의 10대 시절이 있었다.
오락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던 우리의 젊은 날도 있었다.
우리 세대들에게 있어 하이틴 로맨스는, 겔럭이라는 오락은 지금의 인터넷 중독 못지않았다고 생각한다.
중독 현상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중독 현상은 늘 있어 왔고 우린 한 때의 중독 현상을 나타내었지만 스스로의 치유 능력에 의해 건전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곤 하며 역사가 이어져 왔지 않을까?
내 삶의 절반을 함께 하는 십대의 아이들, 그리고 나의 두 딸.
그들은 성을 어디서 만나고 있을까?
요즈음 주택가에서 영화 포스터를 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곳에서 성을 만난다.
오늘 하루 7살인 작은아이 정빈이가 만난 성을 한 번 이야기해 보자
아침에 급하게 마무리를 해야 할 원고가 있어 내가 큰 아이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정빈이는 거실의 내 컴퓨터로 인터넷 게임을 하겠단다.
조금 뒤 들려오는 아이의 급한 목소리
"어머니, 컴퓨터가 이상해요. 이상한 그림이 나왔어요. 어떤 언니가 엉덩이를 막 보여줘요"
아이에게로 달려 가 보니 아이 앞의 컴퓨터에는 성인사이트 광고 화면이 있었다.
창을 닫고 있는 나에게 아이가 묻는다.
"아까 그 언니 왜 그러고 있어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아이에게 할 대답을 찾고 있는데 아이는 쪼르르 달려가 책 한 권을 갖고 와서는 자신이 접어 둔 곳을 펼쳐 내게 보여준다.
"이거하고 비슷한 거죠?"
아이가 펼쳐 보인 것은 【명화로 읽는 성서】에 있는 마솔리노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였다.
내가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아이는 나름대로 이해를 한 모양이다.
아마도 아이 눈에는 컴퓨터 화면 속의 아가씨가 하와로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열 네 살의 큰 아이가 그 화면과 마주쳤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이는 작은아이처럼 나를 부를까?
아마도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다음 장면 다음 장면을 보기 위해 내 쪽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클릭을 하던가 다음에 몰래 보기 위해 인터넷 주소를 외우 둘 지도 모를 일이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어떨까 한 번 묻고 싶다.
내가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 정빈이는 펼쳐진 책을 보더니 또 다른 책을 펼쳤다.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그곳에도 성의 이미지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의 책이라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정빈이도 이 책들을 엄청 좋아한다.
일을 끝내고 아이와 동네 서점에 들렀다.
그곳에서도 아이의 눈길을 끄는 성의 이미지는 너무도 많다.
【바람난 부부의 세계 여행】의 표지를 보고는 "어머니, 아줌마 아저씨가 홀랑 벗고 지도를 덮고 있어요. 추울 텐데."한다.
서점을 나와 아이와 함께 볼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려 대여점에 들렀다.
창문에 붙은 성인용 영화의 포스터들과 <18세 이하 대여 불가>라는 붉은 글씨 아래의 많은 성인용 비디오테이프들.
영화를 고르는 동안 아이는 여기 저기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았다.
"어머니, 여기도 엉덩이 보여주는 언니야들이 참 많아요. 부끄럽지도 않나?"
하는 아이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멋쩍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하고.
큰 아이 또래의 아이 몇몇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며 아이가 서 있는 성인용 테이프 진열장 쪽을 힐끔거린다.
그리고 또 다른 쪽에 있는 <성인 만화>들. 표지만으로도 너무나 선정적이다. 10대의 아이들이 저런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이 이뻐서 보고 그리겠다고 정빈이가 고른 만화를 보니 이것도 만만치 않다.
성인 만화가 아닌데도 말이다.
만화책 곳곳에 나타나 있는 성의 이미지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본다.
명화 속의 벗은 사람의 모습은 괜찮고 비디오테이프에 붙은 벗은 사진의 모습은 안 되는 것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기 위한 만화의 성애 장면들은 괜찮고 순정 만화 속의 성의 이미지는 안 되는 것일까?
요즈음 가장 잘 나가는 책이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라는데, 엄마들이 가장 읽히고 싶어하는 책 1순위라는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아파트 현관 분리수거함에서 나를 위해 신문을 고른다고 열심이었다.
다른 집에서 보고 내놓은 신문을 주워 다 보는 나를 위해 아이가 꼭 하는 일이다.
신문을 뒤적이던 아이가 또 소리친다.
"어머니 신문에도 옷 벗고 있는 언니가 있어요."
영화 광고를 보고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눈만 돌리면 아이들은 넘치는 성의 이미지와 마주친다.
TV는 어떨까?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말했듯이 텔레비전 한 시간만, 한 시간까지 볼 필요도 없이 아이들은 성적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30, 40대인 우리 부부, 열 네 살의 큰 아이, 일곱 살의 작은아이.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앉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그래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경우는 예외이지만 주로 시사교양이나 오락 프로그램이 많은 주말에 TV를 보는데 그 프로그램들도 만만치 않다.
온 가족이 함께 보던 개그콘서트도 이제는 더 이상 두 아이와 함께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니 말이다.
역사 스페셜이 그나마 아이들과 마음 고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인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면 방법이 없을까? 우리 아이들의 성문화는 비관적이기만 할까?
소설가 강석경씨는 자신의 소설 "숲 속의 방"에서 섹스를 『스포츠』로 표현했었다.
그걸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참 좋아하게 되었다.
난 야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절제할 줄 안다.
그러기에 모모양의 비디오도 또 다른 모모양의 CD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컴퓨터를 끼고 일하는 내가 그런 걸 안 봤느냐고, 정말 보지 않았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한 친구는 그런 종류의 CD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컴퓨터 실력을 엄청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남편이 구해 온 그 CD를 보기 위해 컴퓨터를 사람 불러다가 업그레이드시키고 실행시키는 방법을 알기 위해 책을 찾아 공부를 하고 했다며 그런 거 아니면 컴맹인 자신이 컴퓨터 앞에 앉을 일이 어디 있느냐며 그네들을 공치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게 왜 보지 않느냐를 자꾸 묻는다.
그저 극히 개인적인 것이니 그네들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고 내가 절제 할 줄 알아야 아이들에게도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더니 그 친구 입을 삐죽거리며
"아이구, 너 잘났다. 공자님 같은 말씀하고 앉았네. 꼭 그렇게 선생 티를 내야겠니?
너 그런 거 본다고 선생 그만두라는 사람 없으니 적당히 좀 하고 살아라. 하여튼 사람 웃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야!
뭐? 사생활을 존중해 주고 싶어 안 본다고? 너 하나 안 본다고 그게 지켜지니? 컴퓨터만 켜면 널려 있는 게 그런 건데."
친구는 뜻밖에 내 말에 심하게 흥분을 해댄다. 난 진짜 그런 이유로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이유로 보지 않는 것뿐인데, 거기서 선생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건 뭐람. 하여튼 어디든 선생 끌어다 붙이는데도 뭐가 있다.
맞다. 컴퓨터만 켜면 널려 있는 성의 이미지들. 아니 왜곡된 실체들.
그러니 더더욱 내가 그런 것을 보지 못한다.
내게는 지켜야할 아이들이 있고 내 한 사람이라도 그걸 안 본다면 그래서 안보는 어른들이 많아진다면 그들도 사라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참으로 단순한 계산을 하는 바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바보들이 많다면?
그리고 나는 우리의 아이들을 믿는다.
내가 10대의 시절을 지내왔던 것처럼 우리의 10대들도 자신들의 삶을 사랑하리라 믿는다.
아이들에게 보지 말라는 경고문은 꼭 보라는 유혹이라 나는 생각한다.
메일 박스에는 하루에도 몇 통씩 이런 메일이 와 있다.
【광고】꼭! 성인만 보세요. 애들은 보지 마세요!!
이 걸 보고 "아, 나는 애니까 보지 말아야지."하며 바로 삭제하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그런 절제력이 있다면 그들은 청소년이 아닐 것이다.
그건 꼭 보라는 소리보다 더 강한 유혹일 거다.
클릭 하니 이런 화면이 나온다. 나라도 한 번 보고 싶은데 하물며 아이들야.
얼마 전 컴퓨터를 켰다가 큰 아이가 인터넷이 되는 내 컴퓨터에서 성인 사이트에 접속을 시도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의도적이었든 우연이었든 아이를 유혹하기에는 충분했을 테니까.
나는 그 사이트를 홈페이지 사용 화면으로 설정을 해 두었다.
아이가 다음에 컴퓨터를 켜 인터넷에 접속을 했을 때 그 화면이 뜨도록 해 엄마가 자신이 그 사이트에 접속하려 했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
다음 날 퇴근 해 내 컴퓨터를 켜니 첫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아이는 내가 왜 그랬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을 묵묵히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뒤 저녁 산책을 하면서 마침 성인 나이트클럽의 광고지가 전봇대에 붙어 있기에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저런 곳에 가끔 가기도 해. 네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
"컴퓨터에는 성인 사이트가 참 많아. 호기심에 한 번 들어 가 보고 싶겠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보여지는 여러 장면들 볼 수 있었지?
엄마와 아버지도 섹스를 해. 하지만 그런 곳에 있는 모습들은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아.
아이를 둘이나 낳은 엄마조차 놀랄 장면들이 많거든. 그런 것들이 너에게 성에 대한 거부감이나 잘못 된 인식을 주게 될 거라 생각하기에 엄마는 네가 안 보았으면 해.
엄마가 너를 일일이 따라 다닐 수도 없어. 네가 굳이 보려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서든 가능한 일이잖아.
엄마도 너만 할 때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책만 골라 보기도 하고 선생님이 보지 말라는 영화를 보러 다니기도 했었어.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죄책감을 가지거나 할 필요도 없고.
네가 커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고 자연스러운 거야.
하지만 만약에 그런 것이 계속해서 너무 보고 싶고 자신을 조절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될 때는 엄마나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해 주었으면 해."
아이는 세상과 만나면서 성장을 한다. 그들을 세상과 단절시켜 키울 수는 없다.
그들에게 최상의 환경을 마련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아이들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아이들에게 선별의 눈을 키워주고 스스로 절제가 안 될 때 따뜻한 눈길로 그들을 감싸 안고 그들을 도와주면서 그들의 성장을 도와야 할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어른들이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고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아이들을 돕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고 현수막을 걸 필요도 없다.
바로 내 곁에 있는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되지 않을까?
컴퓨터의 칩을 주말에 만 꽂는 집, 엄마 스스로 연속극이 보고 싶어 아이들에게 TV 조절을 권유할 수가 없어 몇 개월 동안 케이블을 아예 끊어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사람, 학생들에게 매일 자습시간마다 책을 읽어주어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선생님 등등
내 집 아이, 우리 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많은 어른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기에 TV나 신문지상에서 나오는 엄청난 수치들에 놀라지 않는다. 50%가 그렇다면 그렇지 않는 50%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진정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나는 우리 세대에게 희망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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