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어제 저녁을 먹고 남편과 아이들과 저녁 산책을 했습니다.

산책길에서 남편이 그러더군요.

출근 길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라면서요.

아이와 산책을 갔는데 아이가 길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이것 저것 물어 보고 가게마다 멈춰 서서 이게 뭐냐 저게 뭐냐 묻는데 그 때마다

"어서 오너라. 거기서 뭐 하니? 얼른 가자."그랬대요.

그렇게 동네를 한바퀴 돌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갑자기 뒷통수를 한 대 맞는 느낌이 들더라는 거예요.

"바로, 그게 산책인데……. 아이와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기웃거리고……."

산책 가자고 나가서는 아이의 발길이 머무는 곳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관심을 가져 주지 않고 급하게 어디를 가야하는 사람처럼 아이를 재촉해 집으로 돌아 와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나왔다고.

아이들과의 저녁 산책은 정말 우리 가족의 즐거움의 하나이지요.

아이들의 산책은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를 들고 동네 비디오 가게에 들러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비디오를 고르는 것으로 끝나곤 하지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컵에 든 코코아의 양이 더 많은지 적은지로 톡탁거리고 엄마나 아버지에게 서로 한 모금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 눈치를 보느라 정작 비디오 고르는데는 그리 큰 관심을 낼 여유가 없나 봅니다.

어제는 결국 빈손으로 비디오 가게를 나왔지요.

아이들과 함께 볼 비디오를 구하는 게 그리 쉽지가 않더군요.

남편과 저는 둘 다 영화를 참 좋아하는데 아이들의 나이가 13살 6살이다 보니 특히 작은아이의 나이가 걸려 보지 못하는 영화가 대부분이고.

아쉽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급하게 학교에 처리 할 공문이 있어 9시쯤 작은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갔었지요.

저희 큰아이 요즈음 영어 공부한답시고 밖에 나가 놀기 좋아하는 아이가 외출을 거의 안하고 있기에 혼자 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 작은아이를 데리고 갔었지요.

일을 끝내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었더군요.

혹시나 하여 집에 전화를 하니 큰아이는 저의 예상이 적중, 놀러가고 없더군요.

놀러 안갈 아이가 아니지요.

바로 집에 가기가 그렇더군요.

아이는 내가 일이 점심때는 되어야 끝날 줄 알고 놀러가서 신나게 놀고 있을텐데, 놀다가 돌아왔을 때 엄마가 먼저 돌아와 있으면 뭐, 잘못한 것은 없어도 그저 기분이 그럴 것 같아 작은아이를 데리고 밖에서 놀다가 오후 1시쯤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 때쯤이면 어쩌면 큰아이는 전혀 외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있을거니까요.

외출하지마라 소리도 안 했고 놀라간다 안 간다는 말도 없었지만 제 생각에 제가 그런 상황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 같았거든요.

"엄마는 점심때는 되야 돌아올 거고, 그 사이에 나가서 친구랑 놀고 돌아와서는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얌전히 열심히 영어 공부한 것 같이 있으면 엄마가 기뻐하실 거야."

아이의 생각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전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분명히 아이도 외출중이고.

그래서 작은아이랑 동네 비디오 가게에 들러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르는데 시간을 엄청 보냈지요.

그래서 고른 영화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영화였습니다.

12세 이용가이니 작은아이가 잘 때 큰아이와 봐야겠구나 하면서요.

내일이 광복절로 휴일이니 남편은 분명 일찍 들어오기는 어려울거구요. 이런 날은 남편도 좀 놀아야지 않겠어요.

오후 1시를 넘겨 집으로 돌아오니 큰아이는 집에 돌아와 있더군요.

"어디 갔었니?"라고 물어 볼까도 싶었지만 어쩌면 아이 마음이 혹여 아까 내가 생각했던 그 마음과 같은 것이라면 괜히 아이에게

"아니요. 그냥 집에 있었어요."

라고 거짓말을 할 기회를 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아무 말도 않았죠.

아이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아마도 아이도 제 생각과 같았었나 봅니다.

엄마 몰래 살짝 놀다와서 시치미를 뚝 떼고.

영화의 공식 홈으로 바로 갑니다.

중학교 1학년 트레버에게 사회 선생 유진이 1년 동안 해야할 사회 숙제라면서 내준 과제는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오라는 것.

다른 아이들은 숙제는 숙제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트레버는 진심으로 이 숙제를 받아들이고 `도움주기'라는 것을 제안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나, 트레버의 아이디어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세 사람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해주는 거예요.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은혜를 갚으면 되느냐고 물어보면, 'pay it forward! 즉,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요구하는 거죠.

그러면 세 사람이 각각 세 사람씩 돕는 거예요. 그럼 9명이 도움을 받게 되겠죠? 그 다음에는 27명이 도움을 받게 될거라구요.

순식간에 도움을 받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날 거예요."

그리고 맨 처음 거리에서 먹을 것을 주워 먹는 부랑자에게 자신이 저금한 돈을 주며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트레버의 순수한 생각만큼 세상사는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그의 용기와 노력은 번번히 좌절되고.

마치 행운의 편지 같은 느낌이 드는 영화입니다. 행운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7사람에게 행운의 편지를 써야…….

어찌보면 간단하고 단순한 그래서 너무 맥이 빠지는 영화라 할 수도 있지요.

이런 영화의 대부분의 결말이 그렇듯이 과정에는 시련과 좌절이 있지만 결국은 대성공을 거두며 끝이 난다는 것이죠.

물론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구요.

영화의 진행방식은 조금 독특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어느 범죄현장에서 취재 나온 기자의 차가 박살이 나는 것이죠.

부서진 차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는 기자에게 어떤 신사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재규어 키를 주면서 그 차를 가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 신사는 "도움 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죠.

그 때부터 기자는 이 "도움주기"의 출발점을 역으로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유진이 트레버에게 사회 숙제를 내주는 것에서 출발을 하여 이야기가 이렇게 양쪽에서 조여드는 진행과정은 단순할 수 있는 이 영화에 활력을 줍게 됩니다.

트레버의 이야기가 좀 지루하다 싶으면 기자의 역 추적 과정이 나오고.

이러한 진행 덕분에 이 영화는 그리 단순하게만 느껴지지 않고 조금의 순발력을 가지고 전개되는 것이지요.

주인공인 세 명의 캐릭터 모두 "가족으로 부터 학대를 받은 사람" 들입니다.

모두들 그것으로 인해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한 꼬마의 사회 숙제로 인해 깨끗하게 치유된다는 것, 글쎄요…….

이 영화에서 제가 잡은 몇 가지만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맨 처음 트레버로 부터 도움을 받은 상습마약 복용자인 청년이 이런 말을 합니다.

"트레버가 준 돈으로 이발도 하고 새 옷도 샀어요. 그 덕분에 취직도 하게 되었구요."

전 그 대목에서 깜작 놀랐습니다.

몇 년 전 큰아이와 용돈 문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는 돈은 어디다 쓰실 건데요?"

"난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도 쓰고 싶어."

"그런데 어제 지하도에서 만난 거지에게 돈도 안 줬잖아요."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었어. 그런 사람들에게 몇 천원 주는 것은 진정한 도움이라고 할 수 없어."

"어머니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사람은 영원히 거지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사람이 취직을 하고 싶어도 어제처럼 그런 차림으로 어디 가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어요.

어머니가 도움을 줘야 그 사람이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하고 깨끗한 옷도 사 입어야 취직이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어머니는 그 사람이 스스로 일을 해야한다고 하지만 당장 그 사람이 그런 차림새로 일을 하겠다고 오면 어머니는 그 사람의 차림새를 보고 일을 주지 않을 거잖아요.

그 사람에게 정말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어머니가 어떻게 아세요?

그건 그저 도움을 주려고 하는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한 거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잖아요."

딸아이의 그 말에 "진정한 도움"이란 것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던,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저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유진은 얼굴에 화상을 입은 2급 장애인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지요.

영화에서도 아이들이 선생님의 모습에 의구심과 호기심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와는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되더군요.

긍정적인 면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지요.

트레버의 어머니가 자신의 차고에 있는 청년에게 총을 들고 위협하는 장면은 미국이라는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트레버가 교정에서 친구의 칼에 찔려 결국은 목숨을 잃는 장면은 학교 폭력을 심심찮게 보는 저로서는 더 없이 마음이 착찹해 지는 부분이었구요.

제가 가장 가슴에 남는 장면은 트레버가 운동장에서 차를 타려는 유진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그 때 유진의 눈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훔쳐보며 수군거리고 있는 몇몇 아이들이 보이죠.

그래서 유진은 트레버에게 아이들을 대표하여 그걸 물으려고 하느냐고 트레버에게 되묻고는 화상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앉지요.

유진의 말을 이해 못한 트레버는 뒤돌아서 가는데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로 갈 줄 알았던 트레버는 그 아이들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트레버의 마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유진은 자신의 지레짐작으로 트레버가 아이들을 대표하여 자신의 얼굴에 있는 화상 흉터에 관한 궁금증을 물으러 왔다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냉소와 비난의 말을 던졌던 것이지요.

그렇게 돌아가는 트레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진의 모습.

제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학교의 아이들과 지내면서 수없이 지었던 표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콱 메어오더군요.

어디 아이들의 마음을 척척 알 수 있는 요술 망원경은 진정 없을까요?

그리고 트레버의 어머니 알린에게 유진이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성냥불을 켜던 이야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기억이 있기에 트레버도 가끔씩 찾아오는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알린이

"그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말을 합니다. 유진의 아버지만큼은 아니라고요. 그 때 유진이 그러죠.

"사랑하지 않으면 똑같은 거야."

눈물을 참 많이 흘렸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는 생각합니다.

영화 초반부에 알린이 무슨 그런 숙제가 있느냐고 유진에게 따질 때 유진이 그러지요.

"학기초마다 내주는 숙제예요.

세상이 진짜 바뀔 수 없다는 건 알아요.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준겁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의 출발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전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좀 바보같은 사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