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왕건 아저씨가 짜장면 시켜 먹었나?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5월 26일 토요일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로 모처럼 평일 날 휴가를 얻게 되어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예슬이도 부모동행 학습으로 학교를 하루 쉬고 함께 다녀왔다.

소백산 희방사 → 고수동굴 → 충주호 → 제천의 드라마 "왕건" 촬영장 → 문경의 "왕건" 촬영장이 이번 여행 코스였다.

이틀을 예정했었는데 예슬이의 신문 만들기 체험학습(27일)이 있어 하루만에 다녀오느라 좀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가족 모두 즐거운 여행이었다.

금요일 저녁 회식이 있었던 남편이 차를 두고 왔었기에 토요일 아침에 차를 가지러 회사로 간 동안 두 아이들은 벌써 준비를 마치고는 1층 아파트 현관에 나가 남편을 기다렸다.

1층 화단에는 앵두가 익고 있었는데 정빈이는 앵두를 따먹는 재미에 푹 빠져 앵두나무 사이에서 나올 줄을 모르고 예슬이는 학교로 향하는 친구들의 '너 학교 안가?'하는 물음에 답하느라 바쁘고.

시원스럽게 뚫린 중앙고속도로 덕분에 풍기까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도착을 했다.

소백산 철쭉제 구경이 첫 목표였으나 6월 2일과 3일에 철쭉제를 한다는 현수막과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아직 망울도 채 맺지 않았다는 말에 희방 폭포와 희방사만 다녀 내려오기로 했다.

주차장에 내리니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 주는 것은 짙은 남보라 빛의 붓꽃이었다.

【붓꽃】

꽃을 보며 내가 좋아하는 시를 입 속으로 굴려 보기도 하고.

붓꽃

뿌리 없는 것들도 꽃을 피운다

유리병에 꽂혀서

봉오리를 열면서 향을 토한다

줄기마다 칼에 벤 자국

뿌리 없는 것들도 꽃을 피운다

나를 향해 향기를

토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열려 있으면 맞이하는 법

코가 향기를 맞이한다

눈은 남빛을 맞이하고

귀는 고요를 맞이하지

그러면 붓꽃은 무얼 맞이하나

형광등 불빛을 맞이한다

뿌리 없는 꽃이

오래 가지 않는다

맞이해야 할 그 무엇도 없다는 듯이 시든다

남빛이 시든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그림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주차장 부근에 소백산에 자생하는 여러 야생화 꽃밭을 만들어 두어 야생화를 잘 모르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희방 폭포까지는 200m, 희방사까지는 400m의 가까운 거리였지만 가파른 길이어서 아이들이 힘들겠구나 생각했는데 정빈이 말처럼 꼴찌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나날이 느는 것이 몸무게인지라 그 짧은 거리도 헉헉거리며 올라갔으니.

【희방 폭포】

드물게 해발 850m에 위치한 희방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는 보는 이의 마음도 시원하고 깨끗하게 해주었다.

폭포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카메라를 차에 두고 온 이유로 남편의 따가운 눈총을 좀 받고 좀 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예기치 않게 커다란 시멘트 건물이 나타났다.

희방사 신도회에서 운영하는 찻집 겸 식당이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절 건물도 단청을 새롭게 하여 초여름 햇빛에 반사 된 강렬한 색채들이 안타깝게 눈에 들어 왔다.

왜 이렇게 새롭고 깨끗하게 칠을 해야 했을까?

세월에 의해 낡고 바래진 색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을까?

특히 대웅전은 단청을 반 만하여 옛것도 아닌 것이 완전히 새것으로 복원한 것도 아닌 것이 양쪽 세월을 다 지고 있는 것 같아,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여 내가 다 용이 쓰이는 것이 보기가 몹시 힘겨웠다.

절 건물보다 더 큰 듯한 매점과 음료수를 파는 자동판매기.

주스를 사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들에게 산에서 내려오는 약수를 떠 먹이고 이 절의 보물이라는 동종을 구경하러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한 쪽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정빈이 키보다 약간 작은, 조선 영조 18년에 만들어졌다는 동종.

【희방사 동종】

아이들은 작은 종에 별로 관심도 없는 듯 내가 법당에서 예를 올리는 동안 법당 주위를 뛰어 다니며 장난치느라 깔깔거리고.

내려오는 길에 나보다 시골에서 자란 남편이 더 과학 선생 같다.

"이게 고사리야."

【고사리】

아이들에게 고사리를 꺾어주는 남편.

자신들이 먹는 고사리나물과 다른 것에 신기해하는 아이들에게 고사리의 생활사를 이야기 해주기도 하고.

【어린 고사리와 고사리 화석】

강원도 탄광 지역의 고생대 후기의 고사리 화석 이야기도 하고.

정빈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사리를 선물하겠다며 양손에 꼭 움켜 쥐고 산을 내려 왔다.

"어머니, 만화가들은 돈을 많이 버나요?"

느닷없는 아이의 질문에 왜냐고 물으니

"제가 좋아하는 만화가가 이 번에 로마로 여행을 간대요."

하면서 유럽 여행을 간다니 돈이 많이 들거 아니냐고, 그래서 만화가가 돈을 많이 버는지 궁금하다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행은 꼭 돈이 많아서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 만화가는 다른 곳에서 절약을 하고 여행을 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투자를 하게 마련이니까 말이야."

그리고는 이 때다 싶어 영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여행에서도 자신이 이태리어나 그 나라의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를 할 수 있다면 그저 관광 안내자를 따라 다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자료를 얻을 수 있다면 훨씬 좋지 않겠니?

엄마가 예슬이에게 영어를 배우기를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거든."

"정빈아 다람쥐다 다람쥐."

남편의 낮은 목소리에 모두들 남편의 손가락 끝을 따라 눈을 돌리니 다람쥐 한 마리가 열매를 먹느라 정신이 없다.

【다람쥐】

가까이 가도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고 달아나지도 않고 그저 먹는데 만 열심이다.

"무서워 하지도 않네."

했더니 예슬이가 정답을 말한다.

"잡아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그렇죠."

희방사의 가슴이 시리도록 선명한 새 단청에 상했던 마음이 잡아가지 않을 거라 믿고 우리 곁에서 열심히 먹는 것에 열중하는 다람쥐 한 마리 때문에 소백산의 짧은 산행은 미소를 머금으며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고수동굴로 가는 길에 아카시아 꿀을 따는 곳이 있어 기다려서는 벌들이 둥둥 떠 있는 아카시아 꿀을 3만원 어치 샀다.

아이들은 벌이 통째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기절을 하려하고 남편은 이건 진짜 꿀이겠지 하며 자신의 탁월한 선택에 혼자 흐뭇해하고.

고수동굴의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우리를 감격시켰다.

【고수동굴】

종유석이나 석순은 그 지역의 환경과 광물의 성분에 따라 모양과 색깔, 자라는 속도가 크게 다른데 일반적으로 1년에 0.2㎜ 이하로 자란다고 한다.

사진 속의 종유석(위에서 자라 내려 오는 것)과 석순(아래에서 자라 올라 가는 것)이 서로 만나 석주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할까?

고수 동굴에 <사랑 바위>라는 곳이 있었다.

종유석과 석순이 서로를 향해 애타게 뻗어 있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장면에 아직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예슬이가 언제쯤 저들이 만나게 되냐며 마음이 아프다며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을 뒤돌아 보았다.

나는 그런 예슬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머니,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참 많네요."

오며 가며 마주치는 많은 외국인들을 보며 예슬이가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에게 인사 한 번 해 봐."

했더니 아이는 부끄럽다며 안 한단다.

"어머니는 좋겠어요. 저 사람들과 마음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

하며 나를 부러워하기만 하고.

예슬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지나가기에

"Hi! It's a beautiful day, isn't it? 하고 인사 한 번 해 봐."

해도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대고.

이 때도 동기 부여를 한 번 주자 싶어

"엄마 부러워할 거 없어. 너도 얼마든지 저 아이들과 마음대로 이야기 할 수 있을 테니까.

엄마 영어 하니까 즐겁고 신나는 일 많다고 했지.

이것도 그 중 하나거든. 너무 조급해 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즐기면서 하면 되니까. 넌 영어를 잘 할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잖아.

그 중에서도 네가 영어를 좋아한다는 게 제일 크거든.

너 Mulan의 Reflection 도 네가 좋아하니까 금방 따라하고 하잖아."

했더니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Look at me I will never pass for a perfect bride"

하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난

"그래, 이거 봐. 넌 엄마보다 훨씬 잘 할 수 있어.

엄마가 도레미송 배울 때 얼마나 버버벅거렸는지 알지?

그리고 이 노래도 네가 엄마보다 가사를 훨씬 빨리 외우고 노래도 더 잘하잖아. "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과 남편이 충주호에서 유람선을 타는 동안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차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이는 유람선에도 대부분 외국인들이더라며 맞은 편에 앉은 외국인 가족들이 말을 걸어 왔었는데 아버지가 대답을 했다며 혼자 약간 흥분해 있었다.

호수 가운데의 분수가 참 멋있더라며 정빈이는

"어머니는 배가 무서워요? 그래서 못 탔어요? 분수가 얼마나 멋있었다고요? 어머니, 진짜 배가 무서워요?"

하며 배를 무서워하는 엄마를 신기해하고.

문경에 있는 드라마 "왕건"촬영장을 가기로 했었는데 길을 가르쳐 준 아저씨가 제천에 있는 촬영장을 가르쳐 주는 바람에 예정에 없는 제천 촬영장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은 너무 작은 촬영장에 좀 의아해했다.

【제천의 촬영장】

밧줄로 테두리를 해 놓고 주차요금 1,000원을 받고 있었다.

촬영은 없었고 때묻은 군졸들의 옷가지 몇 개를 구경거리(?)라고 전시를 해두었고 마을과 포구 가까이에는 내려 가지 못하도록 밧줄을 쳐두고 총각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귀찮다는 듯이 내려 가지 못한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 하고 있었다.

멀리서만 바라보며 많이 실망을 하고 좀 늦은 시각이었지만 지도를 보며 차를 문경으로 달렸다.

제천 촬영장에서의 실망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문경의 촬영장을 꼭 봐야겠다는 듯이.

역시 나는 남편의 운전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엉뚱한 표지판으로 혼란만 더 주고.

덕분에 늦어진 길이 더 늦어져 남편은 입을 꽉 물고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고.

단양에서 문경까지 가는 길이, 산과 계곡이 여름에 꼭 다시 와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아주 멋진 장소였다.

월악산을 넘어 문경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간단하게 가락국수, 파전, 감자전(간단치 않군)으로 요기를 하고 촬영장을 구경하러 갔다.

그곳에도 외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니, 진아네는 이번 여름에 미국 디즈니랜드로 놀러 간 대요."

아이는 친한 친구인 진아 가족이 미국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가고 싶니?"

"네"

"그럼 우리도 가지 뭐."

"정말요?"

"응, 그 대신 예슬이가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 소통이 될 때 갈 거야. 언제쯤 가면 될까?"

아이는 조금 실망한 듯 입을 삐죽거린다.

"진아는 영어 별로 못해도 가는데요."

"그건 엄마가 알바가 아니지. 엄마는 네가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된다는 판단이 서면 그 때 갈 거야. 그럼 너 혼자 가까운 홍콩에라도 보내 볼까?"

"저 혼자요?"

"그래. 너 혼자. 뭐 그 정도는 갔다 올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자 그럼 너 홍콩에 혼자 내렸다고 치고 내가 한 번 물어 볼게.

Where are you from?"

"I'm from Korea."

"보통 회화 책에 그 정도로 나오잖아. 그런데 Where from in Korea?라고 물어 오면?"

"무슨 뜻이에요?"

"한국의 어디서 왔냐는 거지. 그럼 From Daegu.라고 대답하면 되겠지.

그리고 Is that the city where you were born? 거기서 태어났어요? 하고 물어 온다면

Yes, it is. Daegu is the place where I was born and brought up. 대구에서 나서 자랐지요, 하면 되겠지."

예슬이와 내년 1월에 미국 디즈니랜드로 여행을 갈 것을 약속했다.

아이 스스로가 영어로 의사 소통이 될 것 같다고 스스로 정한 시기이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열심히 여행 경비나 저축을 해 두어야지.

【문경 촬영장의 장승들】

정빈이는 장승들을 보고 흑인들인가 봐요, 해서 우리를 한 번 웃겨 주고.

아이들은 만들어 놓은 촬영장의 건물들이 거의 가벼운 합판으로 되어 있어 돌담인 줄 알았던 것에서 퍽퍽 나무 합판 소리가 나는 것에 신기해하고 그 큰 마을이 단지 드라마 한 편을 찍기 위해 만들어 진 마을이라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건물이 모두 외형만 있고 방안, 부엌 안에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에도 놀라고.

왕비가 앉아 처형을 당한 의자에 날 앉혀 두고 남편과 예슬이가

"주리를 틀어라."

고함을 치며 주리 트는 흉내를고 나는 아주 리얼한 연기로 고통을 호소하고.

그 소리에 놀란 정빈이 뛰어 와 우리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를 간절히 외치는 바람에 모두 우리 스스로가 멋진 연기자가 된 양 어깨가 으쓱해지고.

"야단법석"이라는 말의 유래를 알게 해준 그 자리에 앉아 보는 남편.

왕건 생가의 연못 옆 정자에 올라 가 본 남편이

"여기서 짜장면 시켜 먹었나 봐. 짜장면 면발하고 중국집 나무젓가락이 뒹굴고 있네"

하는 소리에

"정말 그러네. 짜장면이 여기까지 배달되나 봐."

"왕건 아저씨가 짜장면 시켜 먹었나?"하며 신기해하고.

"올라오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못 본 탓에 올라 간 김에 사진까지 찍는 왕 배짱 가족이 되어 버린 우리들.

【문경 촬영장】

문경에서 대구로 오는 길을 찾느라 헤매는 바람에 대구에 도착하니 밤 10시 30분.

저녁으로 회가 먹고 싶다 던 예슬이 때문에 가자미회로 늦었지만 맛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다 되었다.

모처럼의 가족 여행으로 마음에 오래 남는 날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