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딸, 나의 친구 예슬이에게
엄마에게 있어 예슬이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어.
우리가 만난 지 11년이란 시간이 지났구나.
어제는 너와 함께 1989년 7월,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았었지.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TV에 나온 모습이었어.
넌 엄마의 짧은 커트 머리를 생소하게 생각하며 나의 옛 모습을 낯설어 하더구나.
눈을 보니 엄마인줄 알겠다며 네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의 엄마 모습에 마냥 신기해했었지.
처음 보는 비디오가 아니건만 너는 그렇게 신기해하더구나.
넌 떨리지 않더냐고 또 물었었지.
저번에 볼 때에도 그렇게 물었었는데.
난 네가 엄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고, 네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더 열심히 했고 엄마의 능력보다 훨씬 잘했었다고 대답했었지.
그래, 엄마는 네가 옆에 있어서 늘 그렇게 씩씩하고 용감할 수 있었나 봐.
나를 세상에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존재로 만들어 준 너.
너 알지?
엄마가 결혼 예찬론자라는 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입에 달고 사는 거 말이야.
아마도 너와 정빈이를 만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엄마가 내린 결론이라는 것도 말이야.
너 그거 기억나니?
언젠가 네가 엄마에게 그랬어.
"아침에 울며 매달리는 저를 할머니에게 맡겨두면서 까지 학교에 나가시는 이유가 뭐였어요? 할머니는 어머니 돈 벌러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어머니는 저에게 용돈도 많이 주시지 않잖아요. 저를 울리면서까지 학교에 나가서 번 돈 다 어떻게 하셨어요?"
용돈 때문에 너와 의견이 맞지 않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때였어.
넌 너를 그렇게 울리면서,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우는 너를 떼어놓고 매정하게 직장으로 가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으며 무엇이 그렇게 엄마를 학교로 가도록 만들었는지 물었었지.
할머니 말씀처럼 돈을 벌러 가는 것이라면 돈을 많이 벌었으니 네가 사달라는 거 해달라는 거 척척해주고 용돈도 남들처럼(네가 말했던 친구들만큼) 많이 주어야 할텐데 그것도 아니고 말이야.
맞아. 엄마는 욕심꾸러기이고 엄마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몰라.
엄마는 엄마의 일을, 교사라는 직업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거든.
학기초에 엄마는 학교의 언니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해.
날 엄마로서의 인생을 살게 해주는 것은 우리 집의 두 아이이지만 날 선생으로 살게 해주는 사람들은 학교의 언니야들이라고.
그래서 우리 집 아이들도 소중하지만 학교 언니 야들도 엄마에게는 자식과 같이 소중하다고 말이야.
선생인 엄마에게 학생이란 존재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구나.
학교의 학생들은 나와 길게 만나봐야 3년, 짧게는 1년이야. 그러니 어쩌면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 보다 내가 더 집중하고 신경을 쓰게 된다고.
우리 아이들이야 많은 세월을 나와 함께 할 것이니 간혹 모자라는 게 있더라도 그걸 메워주고 채워 줄 시간이 있을 지 모르지만 학교의 아이들은 나와 헤어지면 그 어떤 것으로도 엄마의 소홀함이나 미흡했던 것을 보충해주고 보상해줄 시간이 없으니까.
그리고 학교에서의 나의 한 마디는 50명, 40명에게 가는 것이니 당연히 더 신경을 쓰게되고 정성을 쏟게 된다고.
그런 엄마이다 보니 엄마는 언제나 학교 일에 욕심을 내게 되고 자연 우리 예슬이는 엄마에게 서운한 것이 많았을 거야.
예슬이 말처럼 우리 딸을 울리면서가지 남의 집 딸들에게로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었지.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너도 6학년이니 이제까지 초등학교에서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을 거야.
아마도 그 분들이 너희들에게 쏟는 관심과 정성을 너도 알고 있을 테니 엄마를 더 잘 이해할거야.
엄마는 우리 아이 남의 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해.
엄마가 학교 언니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는 만큼 너도 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엄마는 엄마 스스로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물론 직장을 다닌다고 그것이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은 아닐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너희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엄마가 지금 제일 행복한 때가 언제인지 아니?
"엄마를 닮아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네가 말해 줄 때야.
엄마가 오늘 이렇게 예슬이에게 편지를 하는 것은 이제까지 엄마와 함께 살아오면서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을 거야.
지금 돌아보니 우리도 참 많은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지.
용돈 문제로 네가 직접 돈을 벌어 보겠다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일, 의논도 없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을 해 와 우리를 놀라게 했던 일, 동생으로 인해 힘들었던 일,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면 좋겠다고 울며 매달렸던 일, 공부를 못해 속상하다며 자신이 바보 같다며 울던 일, 너무 뚱뚱해 남들에게 놀림을 당할까 겁난다며 다이어트를 하던 일, 인터넷 사용으로 인해 의견이 맞지 않았던 일, TV 보는 일로 나와 한나절을 입씨름을 하던 일, 입시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었던 일…….
우리 참 많이 싸웠어 그지?
고집불통인 엄마를 만나 우리 예슬이 힘들었을 거야.
엄마 학교의 언니들은 이런 엄마를 많이 힘들어하거든.
어제 하루동안 너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엄마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엄마가 말을 하기도 전에 넌 영어라는 세계에 빠져들었더구나. 긴 휴가 끝이라 엄마는 어떻게 널 영어에게로 데리고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그런 걱정은 우습게 되어 버렸어.
정말 하루 동안 네 스스로 영어라는 세계에 그렇게 풍덩 빠질 줄은 몰랐어.
엄마와 저녁 운동 겸 산책을 나갈 때까지 넌 영어 책 영어 테이프를 손에서 놓지를 않더구나.
저녁에는 역사 신문을 보고 있는 너를 건너다보면서 엄마보다 멋진 딸이 있다는 것에 얼마나 기쁘고 대견하던지.
아마도 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야.
앞으로 긴 길을 가게 될 거야.
넌 엄마에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가거나 영문과에 편입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충고와 권유까지 했었지.
예전의 엄마였으면 당장에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엄마 생각에는 지금의 너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내년에는 중학교에 가게 되고.
엄마가 학교에 있어보니 중학교 1학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참으로 큰 혼란의 시기인 것 같더구나.
그래서 엄마는 잠시 엄마의 일을 옆으로 밀어 두고 네 곁에 있으려고 해.
그래서 엄마의 일을 최대한 줄이고 너와 함께 하는 시간, 너를 위해 엄마가 배려해야 할 것들을 좀 더 세심히 챙기고 싶어.
너와 함께 한 어제 하루 엄마에게도 큰 즐거움이었어.
나와 함께 갈 내 사랑하는 친구,
넌 언제나 엄마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사랑해, 나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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