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아이들

청소년 시집으로 마지막 과학 수업을 하다

착한재벌샘정 2011. 2. 9. 12:35

 

내일이 졸업식이니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창의성에 관한 수업을 준비했었는데 뜻하지 않은 시집의 침입(?)으로 계획과는 다른 수업이 되었습니다. 어제 예슬이와 함께 대봉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펼쳐보게 된 시집. 휘리릭 넘기던 제 눈에 들어 온 시 <민준이>

 

민준이

 

교과서 내용이 아니면

손을 들고 말하는 민준이

- 그거 시험에 나오나요?

 

선생님이 아프다고 자율학습 하라 하면

손을 들고 말하는 민준이

-그럼 보충은 언제 하나요?

 

책 읽고 독후감 써 오라고 하면

손을 들고 말하는 민준이

-시험 점수에 반영되나요?

 

소풍 날짜 알려주면

손을 들고 말하는 민준이

-안 가면 안되나요?

 

민준이가 어떤 사람이 될 지 궁금하다 

 

이런 시를 쓴 시인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다른 시들도 꼭 읽어보고 싶어 시집을 빌렸습니다. 저 혼자 읽어보고 난 뒤 예슬이와 정빈이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시는 읽을 때보다 누군가 소리내어 읽어 주는 것을 들을 때 그 맛이 더 나거든요. 물론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요.

 

헛짓을 했다

 

야자 시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을 읽고 있었다

 

퍽!

등짝을 맞으며 얻어들은 말

-네가 지금 헛짓거리를 할 때야?

 

책은 인생을 공부하라는 거라고 있는데

지금 세상에선 헛짓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시를 읽어주는 제 마음도 듣는 아이들의 마음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오른쪽 실내화는 분홍색

왼쪽 실내화는 초록색

치마 속에는 쫄바지

손톱엔 화이트

머리는 엉거주춤 똥머리

~~~ 

로 시작하는 <이 정도는 웃어 주세요>에서는 예슬이는 빵하고 웃음이 터졌고, 정빈이는 자기학교에는 저런 아이가 없어 잘 모르겠는데 고등학생들은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갸웃^^  

 

키 큰 선생님이 제일 싫다

뒷자리에 앉아도

구석에 앉아도

교과서로 가려도

꾸벅꾸벅 조는 거 다 들킨다고

투덜대는 동호

~~~

로 시작하는 <이런 선생님이 제일 싫다>를 다 듣고 난 아이

"대부분 선생이 싫은 거 아닌가?"

찌릿 제 가슴에 아픔으로 남고

 

기말고사 삼일 앞둔 오늘 저녁

아버지는 또 술에 취하시고

집 나간 엄마 대신 꿀물을 타는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푸념을 늘어놓으시고

눈치없는 귀두라미는

귀뚤귀뚤 울어대고

~~~

로 시작하는 <그래도 괜찮아>에 마음에 짠하면서도 '기말을 삼일 앞둔 날에 웬 귀뚜라미?'라는 생각이 드는 저 자신이 살짝 미워지더군요.

 

여전히 낯설기만 한 '청소년 시'

작가의 말 중의 일부입니다.

'첫 번째 청소년 시집이 나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동안 왜 청소년 시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어린이에게는 동시가, 일반인들에게는 성인시가 있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시는 제대로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 교과서에 나온 시 몇편을 읽는 게 전부였다.

청소년들은 문학 장르에서 시를 제일 어려워한다. 그들이 읽고 배웠던 시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이고, 거기서 나오는 서정은 그들이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시간에 시를 읽어주는 수업을 하겠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과학하고 시가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저희 학교 아이들은 그동안 저와의 수업으로 인해 제가 어떤 수업을 하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거라는 믿음도 있었고요. 학교 수업은 결국 아이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할 수 있고 결국은 제가 처음 계획한 창의성 수업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꼭 읽어주고 싶은 시들을 ppt로 만들까 생각하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정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제가 읽어주는 시를 듣어주더군요.^^ 듣기 훈련에, 집중력 길러주기에 시 읽어주기가 아주 효과가 크다는 생각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영어 듣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말 듣기거든요. TV대신 라디오를 듣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에궁, 이야기가딴길로 샜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다시 갈게요.ㅋㅋ

학교와 공부의 의미, 자신의 꿈과 친구들과의 관계, 부모들들과의 소통 등 아이들의 삶이 곧 시라는 것을 아이들이 느껴주기를 바라면서 시를 읽어주었고, 아이들에게 시를 통해 자신을 한 번 돌아보기를,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써볼 것을 권했습니다.

 

나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써 넣는

장래 희망 칸에 직접 내 희망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검사, 라고 엄마는 엄의의 장래 희망을

나 대신 쓴다

~~~

로 시작하는 <장래 희망>을 들으면서 몇 몇 아이들은 고개를 떨구기도 하더군요.

아이들에 의해서 시인에 의해서 '청소년 시'가, 그들의 가슴을 울리는 시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아, 제가 자랑이 좀 심한 사람이라는 건 아시죠? 널리 이해부탁드리면서 오늘도.....ㅎㅎ

어제 한 창의성 수업이 너무 좋았다며 한 아이가 긴 편지를 선물로 주었답니다.

 

이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솔직히 첫 수업 때는 진도가 아닌 저런 말씀을 하시나? 삐뚤어진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라고.

제가 제일 감동한 부분은

<선생님을 보고 저도 꿈을 확정지었죠!>였답니다. 제 수업의 목표 중에 '꿈을 꾸게 만들어 주고 싶다'가 있는데 제 수업의 목표를 이루게 해준 아이니 어찌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저는 아이들로 인해 행복한 교사입니다. 개학 후 이틀 수업을 하는 지라 각 반마다 수업할 수 있는 시간이 달라 1시간도 못한 반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