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대입원서 접수가 시작되었구나.
수능 결과가 발표되고 난 후 너의 진로를 두고 너 자신도 엄마나 아버지도 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왔는데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야.
그래, 결코 쉽지 않다는 거 알아. 정말 열심히 했다는 것도, 그것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도, 그래서 네가 너무나 많이 힘들다는 것도 알아. 물론 전부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도. 하지만 사랑하는 예슬아, 대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만 잊지 말기를 바란다.
대학에서 또 하나의 출발을 한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래. 물론 다녀보고 정말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때가서 다른 길을 선택해도 된다는 생각이야.
엄마가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이 성적으로 아무데도 갈 곳이 없잖아요’하는 너의 말이었어. 엄마 생각에는 결코 못한 성적이 아닌데.... 엄마가 생각하니 갈 곳도 많은데.... 가고 싶은 대학에 마음 편히 기분 좋게 원서를 쓸 수 없는 현실이 너를 많이 힘들게 한다는 거 알아. 아무데도 갈 곳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 버렸다고 절망하고 있는 너를 보면서 엄마는 참 많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단다.
네가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니? 요즘 적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엄마가 보는 너는 참 많은 재주를 가졌어.
책도 많이 읽었고 글도 잘 쓰니 그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직업으로 작가, 기자도 있고 광고 쪽 일도 너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영어를 좋아하니 동시 통역사나 번역 등의 일을 할 수도 있고, 영화 좋아하니 시나리오 작가나 평론가도 있고 외화번역 일도 있고. 목소리가 예쁘고 글을 또박또박 잘 읽고 말도 잘하니 방송 일을 할 수도 있을 테고 활발한 성격에 여행도 좋아하니 여행과 관련된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사진에도 관심이 많으니 그 쪽으로도 괜찮을 것 같고. 외교관 되고 싶다던 꿈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 디자인 쪽으로 소질이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으니 사학이나 미술사 쪽도 해볼만 하고. 심리학에도 얼마나 관심이 많아. 엄마 보호관찰 받는 아이들 멘토 하는 것을 보면서 범죄 심리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었잖니? 이렇게만 봐도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고 당연히 갈 수 있는 학과도 많지 않니? 국문학이나 영문학, 디자인, 사학과나 미술사, 관광, 심리학 등등.
그리고 이건 엄마 혼자 생각인데 미술사를 한다고 할 때 그것과 네가 좋아하는 의상 쪽으로 연결해서 그림속의 의상에 대해 좀 더 공부해볼 수도 있고, 서양미술사나 의상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문학을 먼저 공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심리학과 연결해서 옷을 선택하는 심리에 대해서 공부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이건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너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이제까지 접목시켜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운 끈으로 연결해보는 일은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일은 찾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와 같이 일했던 김PD를 한 번 봐. 국어교육을 전공해서 국어교사를 하다가 방송작가가 되었고 다시 PD가 되었잖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방송작가로 사는 것이 더 멋지고 더 행복할 것 같아서 과감히 다른 길을 선택했고, 다시 PD로 자신을 변화시켰지. 물론 처음부터 자신이 평생 할 일을 찾아 전공하고 그 일을 하면서 산다면 좋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지금까지 경험도 부족하고 다양한 직업을 잘 알지도 못하잖니?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환경을 접하면서 새로운 일을 알게 되기도 하고 그래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에서 더 큰 열정을 느끼고 더 잘 하면서 살수도 있을 거잖아.
몇 달 전 바쁜 고3시절 아침밥을 먹는 네 앞에 앉아 디자이너 최범석씨에 관한 글을 읽어 준 적이 있었는데 기억나니? 그 사람이 그랬다잖니. 옷 만드는 일이 천직이라고 반만 믿고 살아가고 있다고.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옷 만드는 일 밖에 안했기에 그 일을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살다가 또 다른 어떤 일이 지금 옷을 만드는 일보다 자신을 더 몰입하게 만들고 더 열정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게 할지 모르기에 자신은 디자이너를 천직이라고 반만 믿고 있다고. 그 때 엄마 혼자 아침부터 이 젊은 디자이너에게 흠뻑 취해 있었잖니. 그 때 그런 글도 읽어줬었는데. 자신이 성공하게 된 비결은 실패로 인한 나쁜 기억을 최대한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 얻을 수 있는 교훈만 얻고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었거든. 특히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 윈프리를 꿈꾸는데 오프라 윈프리가 토크쇼에 입고 나갈 드레스에 달릴 단추를 디자인 하는 꿈을 가진 오빠 이야기를 말이야. 물론 오프라윈프리를 꿈꾼다는 것은 그녀처럼 토크쇼 진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을 꿈꾸는 것이겠지. 꿈은 거창하게 꾸라고 하지만 엄마는 이 오빠처럼 거창하면서 구체적으로 꾸는 것이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람들은 말할지 모르지. 그걸 누가 알아준다고. 드레스 디자이너도 아니고 고작 단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야.
맞아, 사람들의 시선, 그거 힘겨운 것일 수도 있어. 너도 그랬지. 잘한다고 하더니 기껏 거기밖에 못 갔냐고 할 텐데 그거 어떻게 견디냐고. 글쎄.... 그 때도 말했지만 엄마는 그건 하나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해. 한 예로 엄마는 네가 의상디자인을 하고 싶다면 꼭 서울대 연대를 나와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아. 서경대학이나 계명대학처럼 특성화대학도 많고 전문대학도 있고 디자인 학원도 있다고 말이야. 엄마는 ‘그 집 딸 일류대 못 갔다면서요?’라는 말도 ‘그 집 딸 전문대 다녀요?’라는 말도 ‘그 집 딸 대학 안다니고 학원 다닌다면서요?’ 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얼마 전 고3 엄마들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아들이 좋은 대학 못가면 부끄러워서 잠수탈거라고 하더구나. 그 때 엄마가 아주 입에 거품을 물었었는데. ㅎㅎㅎ
알아, 엄마는 될지 몰라도 너 스스로가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는 거. 그게 쉽지 않다는 거. 하지만 대학의 서열이 인생의 서열을 결정지어주지는 않아. 40대 중반의 엄마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이고 소중한 정보란다. 누군가는 그러더구나. 엄마가 교사라는 아주 좁은 시야로 살아왔기에 그런 생각하는 거라고. 보통 사회 생활하는 데는 그렇지 않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엄마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일을 해오고 있지만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물었던 적은 거의 없었고 그것으로 인해 일을 결정했던 일은 더더욱 없었어.
출판사를 선택할 때 출판사 사장님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물어 본 적 없고 편집장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에 대해 궁금한 적도 없었다. 방송 녹화하면서 카메라 감독이 어느 대학 출신인가를 궁금해 하거나 대본을 써주는 작가가 어느 대학 국문과를 나왔는지 확인하고 대본을 받은 적도 없었어. 내게 큐 사인을 보내고 가끔은 제대로 못한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PD의 학력을 궁금해 해본 적도 없었다. 장학사를 만날 때도 출신 대학을 물어 본 적 없었고 엄마 좋아하는 요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어느 대학 조리과를 나왔는지 궁금해 했던 적은 없었다. 수많은 강의를 가면서 강의 장에 오는 사람들이 어느 대학 출신인지를 물어보고 강의를 하겠다고 한 적도 없었다. 엄마에게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열정을 다해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을 뿐이었어. 물론 엄마가 그 사람들을 채용하거나 하는 입장이 아니어서 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일류대학이 더 잘 가르칠지도 몰라. 그래서 모두들 그곳에 가기를 원하는 거고. 하지만 꼭 그곳이 아니어도 너의 솜씨와 열정을 쏟아 일할 곳은 많다고 생각해.
잊지 말기를 바래. 네가 애쓴 만큼 안 나온 것뿐이지 너는 결코 못한 게 아니야. 재수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야. 많이 생각해 봤지. 네가 너무 속상해하고 안타까워 하니까. 한 번 더 해서 네가 원하는 결과 받고 네가 원하는 학교 터억하니 원서 쓰고 합격하는 거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의 결론은 이랬어. 재수에 쏟을 시간과 노력을 대학에 가서 쏟는 게 나을 것 같다고.
1년 재수해서 등급 올려 일류대학 영문과를 가는 것보다는 조금 낮은 대학에 가서 재수하는 만큼 대학의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 엄마는 네 성격 아니까 한 번 몰입하면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거든. 재수하는 동안 네가 싫어하는 수학문제 푸는 시간에 대학에서 네가 좋아하는 영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공부를 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이야. 네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길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잘 선택하기를 바래.
그리고 네가 선택한 곳에서 진짜 공부를 한 번 멋지게 해보기를 바란다. 물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그 때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아. 가장 좋은 길을 골라 편하게 가면 더 없이 좋겠지만 조금 둘러갈 수도 조금 천천히 갈 수도 다른 길로 가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어.
엄마를 보렴.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작가라는 꿈을 이루었잖니. 그 보다 더 늦게 방송인이라는 꿈도 이루었고. 그리고 육십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지금도 꿈을 꾸고 준비를 하고 있잖아. 그러면서 행복하다고. 엄마가 지금 행복하다고 했을 때 네가 그랬지. 엄마가 사범 대학을 가지 않고 교사가 되지 않았으면, 그래서 다른 길을, 처음부터 엄마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보다 더 행복해질 수도 있었지 않겠느냐고. 그래,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행복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엄마는 단 한 번도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지만 교사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얻으면서 살고 있으니 말이야. 교사가 된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돼 엄마를 불행하게 만들기는커녕 다른 많은 꿈들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거든. 엄마가 제일 하고 싶었으면서 가장 늦은 꿈으로 미뤄두고 있는 디자이너의 꿈은 지금의 엄마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거 아니? 지금도 꿈꿀 수 있고 그것을 위해 조금씩 준비해 가는 시간들이 엄마를 너무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말이야.
너의 대학 입학 원서를 쓰기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엄마는 외할머니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단다. 할머니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에는 할머니 생각이 나서 혼자 휴지 한 통을 거의 다 쓰도록 울었단다. 내 자식을 통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더욱 애잔해지는 건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만약 할머니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면.... 자식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꺾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더 없이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인지 어제 할머니 댁에 갔을 때 할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릴까봐서 말이야.
그래서 엄마는 지금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 너에게 어디든 가서 마음껏 공부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음에 말이야.
사랑하는 딸 예슬아,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야. 그리고 너는 멋지게 해낼 거야.
우리 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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