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만화책 불 질러 버려야 하는 거 아냐?

착한재벌샘정 2004. 6. 23. 12:39

이 사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시죠?

   0623

 

작년 봄 서울대 어린이 병원에 입원했을 적 사진입니다. 퉁퉁 부은 얼굴에도 활짝 웃고 있는 정빈이가 참 대견하고 앞니 빠진 모습이 너무 이쁘다고 팔불출인 제가 자랑을 했었지요.

 

오늘 이 사진을 다시 보여드리는 이유는 바로 사진 속의 만화 책 때문입니다.

병원 복도에 있던 책장에는 사진 속의 만화책 - 포켓몬스터-이 많이 있었어요. 아이들 병원이고 아이들이 열광하는 만화책이 참 많았는데 만화광인 정빈이가 무지 좋아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그러면서 작년 어린이날 선물로 그 만화책을 받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거절을 했었어요.

 

그런데 올해 어린이날이 다가오던 5월초에 아이가 이러는 겁니다.

“서울대 병원에 한 번 더 입원하고 싶어요.”

엄청난 승부수(?)를 던진 거지요. 만화책이 보고 싶어 병원에 입원하고 싶다는.

 

적지 않은 고민을 한끝에 인터넷과 오프라인 서점을 뒤져 만화책 16권을 전부 사주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 품절인 것이 몇 권 있었던 까닭에 시내 서점을 저와 예슬이가 번갈아 뒤져 16권을 전부 사주었지요.

 

그런데 이 만화책 보는 것이 절제가 안 되는 겁니다. 어찌나 읽어대는 지 한 때 유행한 “폐인‘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어요.

’만화 폐인‘

처음에는 한두 번 읽을 때까지 저러고 말겠지, 했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도 계속되고 남편의 입에서도 ‘너무 읽는 거 아냐?’하는 걱정의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외출을 해도 한두 권은 꼭 들고 나서고 심지어는 친구가 놀러 와도 친구 혼자 놀라고 하고 만화책만 읽는 겁니다.   

 

정빈이는 절제력이 보통이 아닌 아이기에 저희들의 걱정은 커져갔지요.

정빈이는 매월 1일, 즉 한 달에 한 번 컴퓨터를 합니다. 그런 컴퓨터를 벌써 석 달 째 미뤄두었답니다. 컴퓨터 할 시간을 아껴두는 재미가 쏠쏠하다나요.

“이 번 달 안하면 다음 달에 이틀 할 수 있고. 그 다음 달에도 안하면 삼일을 할 수 있고, 12월이 될 때 까지 아껴두면…, 우와~ 정말 좋아요.”

이러는 아이거든요.

 

그런 아이가 만화는 도대체 절제가 안 되는 겁니다.

“만화책 불 질러 버려야 하는 거 아냐?”

급기야 남편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 까지 나오게 되었어요.

“분서는 심하잖아요. 정빈이가 너무 충격을 받을 테니까요. 조금 더 두고 보면서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그래도 이번은 너무 심한 것 같아.”

“만화를 워낙 좋아하는데다가 읽기만 하는 것 아니라 만화책이 그림을 따라 그리고 게다가 요즘은 자신이 새로운 포켓몬스터를 만들어 그리느라 그 재미에 빠져서 그래요. 스케치북 빼곡히 새로 만들어 낸 포켓몬스터로 가득하거든요.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 지 옆에서 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워 질 지경인데 본인이야 얼마나 재밌겠어요.”

 

결국 이런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만화 책 16권 전부 가져와.”

“왜요?”

“네가 만화책 읽는 것에 절제가 안 되어서 엄마가 좀 도와주려고.”

“어떻게 도우실 건데요?”

“아버지는 만화책을 시골집에 가져가서 다 불태워 버리면 어떻겠냐고 까지 하셨어? 하지만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서 엄마가 생각한 건데 한동안 책을 엄마가 가지고 있을게.”

“저는 언제 볼 수 있는데요?”

“내년 어린이날쯤에.”

“그렇게 멀리요?”

“응. 내년 어린이날 선물로 만화책을 다시 너에게 주고 한 달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할 거야. 그 다음에는 또 엄마가 가지고 있고.”

“그럼 그 다음 어린이날 선물도 그 만화책으로 주실 거예요?”

“그건 그 때 가서 결정할 거야.”

“크리스마스 때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일단 네가 안 돼요 라고 물었기 때문이야.”

“크리스마스 때 주세요.”

“안돼.”

“왜요? 크리스마스에는 엄마가 너에게 선물을 줄 이유는 없잖아.”

“산타할아버지한테 만화책 받게 해달라고 하면 어때요?”

“글쎄, 우리 집에 매년 산타가 왔었던가? 만약 올 해 산타가 오지 않는다면 넌 내년 크리스마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내년 어린이날에 선물을 안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 어린이날 까지 기다려야 해요?”

“아니, 엄마가 약속할게. 내년 5월에 다시 만화책을 너에게 준다고.”

 

이렇게 해서 정빈이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고 싶도록 보고 싶어 하던 만화책은 저에 의해 집 어느 곳에 숨겨지게 되었습니다. 만화책이라서가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 어떤 것이어도 아이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면 그렇게 했을거예요.

 

이 일은 만화책이 저희 집에 오고 보름 정도 지난 후에 있었던 일인데 한달 정도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며칠 만화책을 빼앗긴 후유증 증세를 보였지만 다시 다른 재미를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잘 놀더군요. 

 

그런데 어제 집에 있는 책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만화로 된 요리책 한권을 뽑아 들고 몇 장 읽어 보더니

“만화책이 진짜 재미없네.”

이러는 겁니다.

요 며칠 아이의 입에서 부쩍 자주 그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슬슬 포켓몬스터 만화책이 다시 보고 싶은 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화는 포켓몬스터가 재미있는데.”

아이는 슬며시 이런 말까지 덧붙이더군요. 물론 저는 못들은 척 했지만요.

 

이럴 때 한 번씩 갈등하게 됩니다.

“한 권 정도 내 줄까? 아니야 그러면 안 되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거의 밤새워 갈등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슬며시 비집고 올라와 저를 힘들게 하더군요.

“이게 어떻게 살아난 자식인데…. 그런 아이가 보고 싶다는데….”

 

손목이 아프다 발목이 아프다며 힘들어 할 때면 밤새워 주무르고 얼르고 달래며 세상 모든 거 다 해줄 테니 아프지만 말아달라고 기도하면서 만화책 좀 읽은 들 어때? 그토록 좋아하는데 질리도록 읽도록 줘버릴까? 하는 생각 드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제 마음 아실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