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쓴 글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신 것에 대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 이런 엄청난 관심을 받고 보니....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저는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해 온 사람입니다. 열정만 앞섰던 시절....
제가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면 이 사진이 보입니다.
책장 앞에 걸어 둔 사진은 지금 고3이 된 아이들이 중학교 2학년 때의 사진입니다. 그 해는 유난히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 반의 담임을 맡게 되어 담임으로서 반부모가 아닌 ‘진짜 엄마’가 되어 주어야 했던 아이들이 많았었습니다. 반 아이들의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그 해 1년 동안 교실에 걸어 두었다가 학년이 바뀐 뒤 집으로 가져와 달력이 있던 밑 부분은 잘라내고 이렇게 제가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위치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35명 중 학비 지원을 받는 아이들이 28명이었으니... 하지만 아이들은 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커주었답니다. 비록 형편은 너무나 어려웠지만 말썽부리는 아이 한 명 없이 잘 커주어 3학년 올려 보내면서 제가 정말 눈이 퉁퉁 붓도록 밤새 울었었지요. 저 아이들을 보면서 혼자 흐뭇해서 웃곤 하는, 제게는 늘 희망이 되어주는 사진이랍니다.
그리고 제가 매일 보는 사진이 한 장 더 있답니다. 저희 집 주방 벽에 칠판이 있는 건 아시죠? 이제까지 그런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다가 모르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오늘 글쓰기가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 욕심이 이런 건 가봐요. 지난 번에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셨으니 예전보다는 많은 분들이 읽어주지 않을까 하는.... 제가 이런 못난 사람입니다.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오르는 것이....아무도 보는 사람없어 다행이지 저 혼자서 한 동안 민망해 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참나~~~
식탁의 제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이 칠판의 오른쪽 위에 있는 사진.
제가 첫 담임을 했었던 아이들과 가을 소풍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경험도 없고 여러모로 미숙했던 담임을 만나 고생(?) 많았을 우리 공주님들. 저는 저 사진을 매일 보면서 출근 준비를 하고 아침 밥을 먹습니다. 저 아이들에게 했던 시행착오는 다시는 하지 말자, 저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많은 것들, 지금의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 해 해주자,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는 일년을 만들자, 조금 덜 미안한 일년을 살아가자 다짐을 하며 학교로 향하지요.
이렇듯 저는 참으로 후회가 많은 교사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은 마음에서 후배들을 교생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거랍니다. 저와 같은 교사가 되지 말라고. 조금 덜 후회하고 조금 더 잘하는 교사가 되어 달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저와 같이 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또한 뒤늦게 부족하고 미흡했던 부분을 깨달아도 이미 그 때는 너무 늦어 아이들과의 그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도 저는 교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행복하다고, 복이 많다고,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교사가 되게 해주신 저의 친정어머니께 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대학 원서를 쓰는 순간까지 사범대학, 교사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먼저 제가 가끔 혼자 입안으로 웅얼거리는 김초혜님의 시를 소개합니다.
어머니 1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시집 ‘떠도는 새’ 중에서>
저희 어머니께서 치대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저에게 6년이 아닌 4년, 등록금이 가장 싼 국립대 사대, 그리고 사촌 오빠의 여자친구가 다니고 있어 책을 얻어 볼 수 있어 책값이 안 들거라는 이유로 저를 생물교육과에 보내셨다는 건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딸의 장래를 조금은 어처구니없게 결정해버리셨던 어머니. 그리고 고생을 너무도 많이 하시는 어머니의 인생이 안쓰럽다는 이유로 가고 싶던 미대도, 치대도 모두 접고 사범대생이 되었던 저.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
가운데 사진은 저의 첫 돌 사진이고 왼쪽은 15일 스승의 날, 저를 교사로 살게 해 준 것이 고마워 어머니 댁을 찾았을 때 기념으로 찍은 저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그날 정빈이가 찍어 준 저의 사진입니다. 예슬이가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렸지만 오늘 글과 가장 잘 맞는 사진이라 특별히(?) 선정된 사진이랍니다.(선정 이유는 한참 뒤에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사진기가 다르니 사진의 느낌도 다르네요. 예쁜 거 너무 좋아하시는, 왕공주마마인 저희 어머니 이 글 보시면 화내실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사진이 흐리다고. 뽀샵을 싫어하는 저인지라....어머니 이해해 주세요. 호호호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시죠?
저를 낳고 미모의 당신을 전혀 닮지 않고 너무 못생긴 딸 때문에 3일 밤낮을 우셨다는 20대 초반의 어머니는 환갑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었고 한 살 아기던 딸이 마흔 고개를 넘긴, 18살과 11살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순간의 선택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2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의 시의 한 구절처럼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저는 저의 어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저절로 고개가 살래살래 저어집니다.
그렇지만 저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이들의 행복입니다.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할 텐데... 라는.
저희 어머니도 그런 생각으로 저를 키우셨고 지금도 그 마음 여전하실 겁니다. 저는 어머니로 인해 교사가 되어 행복하기도 하지만 어머니께서 주신 더 큰 것 때문에 저희 어머니가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그건 바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가르쳐주신 ‘내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알기에 저희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알게 해 주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늘 누군가를 챙기고 나누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제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골 버스 정류장 지하에서 식당을 하실 때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참으로 고달픈 시간들을 보내셨던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한편으로는 부끄럽게 한편으로는 한없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던 저.
그런데 그렇게 힘든 시절에도 돈이 없어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늘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을 선뜻 내어주시던 어머니. 그 밥 한 끼 한 끼 값을 모아 다섯 아이 키우며 살아가야했던 힘든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새벽에 버스 정류장 대합실을 돌아다니시면서 차비가 없거나 막차를 놓쳐 대합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잔 사람들을 깨워 이른 아침을 챙겨주시곤 하셨지요. 공짜 손님이 마수를 하면 하루 장사 망친다는 주변의 걱정에도 어머니는 ‘사람 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다고?’라는 한 말씀과 함께 그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른 사춘기를 앓던 시절이라 어머니의 식당일이 부끄럽기도 했던 저였지만 그렇게 말씀하실 때만큼은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멋져 보였습니다.
26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 대구 보호관찰소 3층에서는 이런 행사가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만들기 운동 8기 결연식>이었습니다.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최대한 가려지도록 찍느라 고생이 많았었습니다. 아이들이 최대한 보호가 되어야 하니까요. 얼굴이 보이는 세 사람은 멘토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요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피습 사건으로 인해 ‘보호관찰’이라는 말이 자주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날 저희들이 만난 21명의 아이들도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동안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저희 멘토들과 앞으로 12월 말까지 1:1 결연을 맺고, 한달에 한 번 보호관찰소를 찾아가는 대신 멘토들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게 될 겁니다. 그 어떤 경우든 스스로의 변화 의지가 있어야 하잖아요. 저희 자원봉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변화의 의지가 생기도록, 그리고 그 과정이 힘들지만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일입니다.
제가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도움이 무척 컸습니다.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정빈이 때문에 예슬이는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급하게 집으로 와야 했고 남편도 아이들만 있으면 혹여 마누라 마음 안 편할까봐 부랴부랴 아이들과 함께 저녁 먹을 수 있게 퇴근을 하고. 이 프로그램은 사실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저희 가족 네 사람이 함께 하는 거랍니다. 자신의 약속을 취소하고 흔쾌히 동생 돌보러 집으로 와 준 예슬이도 남편도 이미 나눔의 행복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보호관찰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이 뿌옇게 흐려지는 저인지라.... 그날도 보호관찰소로 가는 내내 운전을 하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살아 있다면 이제 22살의 청년이 되었을 우리 탁이....제게 있어 탁이는 늘 우리 탁이입니다. 마치 그 아이의 이름이 처음부터 우리 탁이였던 것처럼요.
처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무슨 말인가 하실 겁니다. 우리 탁이는 2003년도 4월에 좋은 친구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저와 결연을 맺었던 아이입니다. 2004년 1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사정이 있어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 살던 아이였는데 비록 8개월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소중한 아들이 되어 주었던, 그리고 범죄 청소년이 자원봉사로 인해, 이 작은 관심으로 인해 과연 변화할 있을까에 대한 저의 약간의 의구심마저 깨끗하게 씻어주었던 저의 학교 밖 희망이었습니다.
보호관찰소로 출발하면서 현관에서 신을 다 신고도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소파를 한 동안이나 바라보면서요. 기억하시죠? 이 사진?
소파 없이 살던 저희들이 우리 탁이를 만나고 그 아이로 인해 소파를 샀었거든요.
소파가 오기까지의 사연을 적었던 <한겨레21 논단>의 글을 다시 가져 와 보았습니다.
<소파 없이 훤한 거실을 고집하며 살아왔는데 '좋은 친구 만들기'를 통해 알게 된 새 식구를 위해 소파를 사자고 했을 때 남편은 반대했다. 이제까지 소파 없이 잘 살아왔는데 새삼스레 그것이 왜 필요하냐고. 그것도 우리 가족이 필요해서 아니라 그 아이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사람 사이에 스킨십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네 식구는 이제까지 서로 살을 맞대며 부비며 살아왔지만 그 아이는 아니잖아요. 우리 집에 자주 올 텐데 이렇게 거실에 뚝뚝 떨어져 앉아 있는 것보다는 소파가 있으면 그곳에 끼여 앉게 될 거고 자연스레 서로 맞닿는 기회가 많아질 거잖아요. 멀뚱히 떨어져 있는 것 보다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는 게 된다면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울 거라 생각해요.
소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식탁의 위치도 바꿀 거예요.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벽에 붙여 놓았는데 그 아이가 올 때마다 자신이 손님이라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테니 언제든지 다섯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위치로 바꾸면 아이가 덜 어색해 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불편해지는 건 없잖아요."
여러 날 남편을 설득해야했다. 남편은 돈도 돈이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당신이 이러는 거 남들이 보면 정말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썩 내켜하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그렇게 중요해요? 맞아요. 이해 못 하는 사람들 많아요. 심지어는 내가 그 아이를 실험 대상으로 쓰고 있느냐는 사람도 있어요. 학위 논문 준비에 필요한 자료를 위해서가 아니냐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요. 내 아이나 잘 키우지 무슨 그런 일까지 하느냐고, 왜 하는지 정말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 적지 않아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나도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고 지금도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하는 게 사실이니까. 그저 무난히 살자. 남들이 하는 것처럼 모자라지도 않게 너무 돌출 되지도 않게 말이야."
"나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 작은 힘을 보태고 싶어요. 우리가 아이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뭘까요? 난 부모가 참 열심히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 중에서 특히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남겨 주고 싶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결코 큰 것이 아니잖아요. 작지만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라 생각해요."
결국 남편이 내 뜻을 받아주어 식탁의 위치도 바꾸고 소파도 사게 되었다. >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우리 탁이를 떠나보내고 난 뒤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소파에 두 번째 멘티 ‘요술램프 지니’가 처음 저희 집에 와 앉던 날. 축구를 좋아하는 지니는 제가 읽어보라고 한 박지성 선수의 글을 그 소파에 앉아서 읽었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었죠.
“샘, 이 소파 진짜 편하네요. 제 폼이 좀 그렇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 지니를 보면서 우리 탁이 생각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바로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소파였으니까요. 문득 문득 그 소파에서 우리 탁이의 모습을 보곤 하는 저이니까요.
우리 탁이를 위해 다섯 개의 의자를 놓은 식탁에서 지니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소파에 지니와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 스스로를 달랬었죠. 목이 메여 와 자꾸만 말이 막히는 것을 혹시라도 지니가 눈치 챌까 조바심을 내며
‘이건 우리 탁이만을 위해 산 게 아니야. 우리 탁이의 동생, 그 동생, 그 동생들과 함께 쓸 거야. 그렇지 탁아? 엄마 말이 맞지? 너만을 위해 영원히 비워 두지는 말아야 하는 거지? 너를 잊는 게 아니야. 이 자리에 네 동생들이 와서 앉을 때 너는 영원히 엄마와 함께 있게 되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2004년 만났던 요술램프 지니는 저와의 시간 동안 너무 열심히 잘해서 2005년 10월까지의 보호관찰 기간을 무려 7개월이나 단축, 작년 3월 10일에 끝이 났고 그 일이 참으로 큰 격려가 되었는지 그 후로 자격증을 3개나 땄답니다. 시험기간에 밤을 새워 공부하는 아이, 자기가 읽은 책을 친구들에게 권하기도 하는 책을 좋아하는 아주 멋진 청년이 되어 주었습니다. 올 2월에 졸업 한 지니는 지금 구미에 있는 회사에 취업을 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지니의 보호관찰 단축으로 작년 4월에 만나게 된 ‘매니저 정’.
요술램프 지니, 매니저 정 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제가 붙여 준 아이들 별명입니다.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그 소파에, 지니가 앉았던 그 소파에 이제는 매니저 정이 앉아 동생 정빈이와 만화책을 보기도 합니다.
<매니저 정은 사진 찍는 것과 사용을 허락해주었답니다. 그래도 최대한 멀리서 찍힌 걸로...>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먹은 뒤에는 설거지를 하기도 해요. 제가 막(?) 부려먹거든요. 호호호
‘제가 왜 설거지를 해야 해요?’
라고 묻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같이 먹었잖아. 음식을 만드는 것은 선생님이 했으니까 설거지는 네가 해야지. 가족이니까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씻어 놓은 그릇, 너무 가지런하죠? 싱크대 부근에 물이 남아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것이 저를 꼭 닮은 저의 소중한 아들입니다. 기억나시죠? 매니저 정이 저에게 처음으로 만들어 주었던 볶음밥.
도마 위에 프라이팬 째로 이지만 그 맛이 정말 끝내준답니다. 요즘음도 집에 가끔 가서 저녁을 같이 먹습니다. 누나가 일 때문에 밤늦게 집에 들어 오다보니 늘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는 아이. 혼자 있는 것이 싫어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서 제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거든요. 아이와 약속한 날에 남편이 일찍 들어오지 않으면 정빈이도 같이 가기도 한답니다. 오빠 집에 간다고 하면 좋아라 먼저 나서는 정빈이거든요.
매니저 정의 보호관찰기간이 내년 2월까지라 저는 올해도 이 아이와 함께 합니다. 그 사이 매니저정의 이야기를 많이 못했죠? 자랑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작년 4월 처음 만났을 때 학교 성적이 반에서 꼴찌였어요. 그런데 여름방학이 자나고 난 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렸으면 좋겠다는 목표를 스스로 세우더니 2학기 중간고사는 반에서 29등을, 기말고사에서는 21등을 해, 저와 아이의 학교 선생님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지 뭡니까? 기말고사는 훨씬 잘 쳤는데 중간고사 성적 때문에 많이 내려갔다고 속상해 하는 모습은 정말 너무 귀여웠답니다. 신학기가 되고 담임선생님이 바뀌니 아이가 자기 담임선생님 만나러 학교에 안오느냐고 성화를 부리더군요. 자랑할거리가 있으니 제가 학교에 찾아가는 게 좋은 지 언제 올거냐고, 요일을 딱 정하라고 졸라대는 통에 열 일 제쳐두고 아이의 학교로 담임선생님을 찾아 갔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1학년 때부터 지켜봤는데 너무 달라진 아이의 모습에 선생님들도 많이 놀라고 있다고 학교 최고(?)의 사고뭉치였던 매니저 정이 성적 때문에 고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활짝 웃으시더군요. 매니저 정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저의 온몸에 전율이 일더군요.
고3이 된 매니저정은 진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고 6월말에는 드디어 처음으로 자격증 시험도 치르게 된답니다. 26일에 보호관찰소 행사에 시험 예상 문제를 들고 와 이런이런 것으로 시험을 친다면서, 굉장히 어려운 시험이라고 은근히 자랑도 하고. 많이 피우던 담배도 하루에 4개 피 정도로 줄였습니다. 담배 줄이는 거 쉽지 않다고 하는데 참으로 기특하죠? 조금 더 노력해서 완전히 끊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사이다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도 아주 좋아했는데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라는 책의 내용을 들려주었더니 이제는 그것도 많이 줄였습니다. 제가 읽어 준 부분입니다.
<교내 폭력을 휘두른 아이들은 탄산음료를 많이 마셨습니다. 마시고 곧바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마시면 신경질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안 마시고는 살 수 없는 아이들이 늘었고, 어떤 곳에서는 학교 내에서 팔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비행청소년은 대게 탄산음료, 인스턴트 라면 등을 먹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책으로 보는 생로병사의 비밀>의 탄산음료에 관한 부분도 함께 읽어 주면서 마시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야기 해주었더니 노력하겠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제가 이제까지 ‘좋은 친구 만들기’를 통해 만난 아이는 모두 4명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통해 만나 아이의 친구들을 모두 합치면 훨씬 많은 아이들과 인연을 맺게 된 거지요. 그 아이들 모두 제가 준 작은 관심과 노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면서 저에게 희망과 기쁨, 그리고 보람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우리 탁이 친구였던 ‘비보다 멋진 미소’가 그랬고 <멘토- 희망을 찾는다>를 함께 촬영했던 ‘정화공주’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모두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22살의 비보다 멋진 미소는 올 8월에 고졸 검정고시를 치르고 내년에는 전문대학에라도 진학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입니다. 직장 때문에 멀리 있는 아이는 가까이 있으면 수학과 과학을 저에게 배웠으면 좋겠다고. 너무 멀리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게 너무 속상하다는 아이에게 아쉽고 부족하겠지만 과학은 제가 쓴 책 정도면 충분할 거라며 선물과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진로나 고민을 이야기 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은가 봐요. 저의 직접적인 멘티도 아니었고 단지 우리 탁이 친구로 만난 아이였지만 저를 엄마처럼 또한 마치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처럼 따르고 챙겨주고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범죄자’가 아닌 ‘그저 우리들의 아이들’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래서 그렇게 대해주는 선생님 편하고 좋았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봐주고 기회를 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언론에서 우리나라 보호관찰소 직원 한 명당 담당하는 인원이 220명 정도라고 했는데 대구는 사정이 더 좋지 않아 250명 정도라고 합니다. 한 달에 만나야 하는 사람이 250명이라면 한 사람 당 주어지는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좋은 제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안 된다는 생각에서 좋은 친구만들기 라는 활동이 시작되었고 올해로 8기를 맞았습니다. 비록 20명의 자원봉사자들이지만 그 작은 활동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저희가 이제까지 보았던 그 희망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 활동은 점점 더 활성화 되리라 저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제가 예슬이가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사진을 굳이 골랐던 이유를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아이들과 가까이 가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저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화장은 로션과 영양크림만 바르고 등 중간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큰바위 얼굴이라 이 머리말고는 어울리는 머리도 없어 근 10년 째 이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좀 바꿀까 고민을 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이 머리가 제일 낫다고 말리는 바람에...저 스스로 좀 민망할 때도 있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젊어 보이고 싶어 사진에서처럼 모자를 즐겨 씁니다. ㅋㅋㅋ 위의 사진이 보통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의 제 모습이라 오늘의 사진으로 당첨(?)이 된 거랍니다.
아이들과의 대화거리가 많아야 되기 때문에 최신 유행 패션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음악 사이트에 매일 들러 어떤 노래들이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지 알아보고 폰에 다운을 받아 매일 듣습니다. 예슬이가 저보고 음악을 추천해 달라고 할 정도로 제가 더 최신 음악을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랍니다.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 아이들 줄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아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좋은 친구만들기 활동을 신청했을 때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과 현직 교사라는 이유로 퇴짜 맞을 뻔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과 충분히 친해지기 전에는 제가 학교 선생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이도요. 아이들과의 관계 형성에 학교 선생이라는 제 직업이 혹여 방해가 될까해서요. 안타깝지만 그래도 아이와의 관계에서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요.
아이들을 만날 갈 때는 옷도 최대한 불량(?)스럽게 입고 가는데 저의 이 전략이 효과가 있답니다. 매니저정을 만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 것 같냐고 물었더니 ‘나이는 스물여덟 쯤, 직업은... 백수’인 것 같다고 하지 뭡니까? 제가 아주 똑똑하다고 했더니 똑똑한 사람이 백수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학교 선생이라고 했더니 도대체 믿지를 않는 겁니다. 제가 진짜 선생 같지 않냐고 했더니 말하는 거, 옷차림새 전부 불량기(?)가 너무 많아 그건 절대 아니라고 단언을 하더군요. 제가 진짜 선생 맞다고 우기자 조금 불쌍하다는 듯이 이러는 통에 제가 한 방 먹었지요.
“꿈이 선생이었겠죠?”
헐!!! 정말 이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그랬더니 바로 한 마디 더 붙이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선생이 어딨어요?”
아이들은 제가 진짜 학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처음에는 몹시 당혹해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도 학생들이 많은데 왜 이런 일을 하는 지 물어 봅니다.
“아이들이니까. 선생님에게는 우리 학교 아이들만 학생은 아니거든. 다 같은 아이들이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저에게 물어 옵니다.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범죄자를 집에 데리고 오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집에 아이, 학교 아이 적지 않은데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언젠가 제가 왜 이 일을 하는 지에 관해 쓴 글이 있습니다. 26일 8기 결연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 글을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남편은 제가 올해 ‘좋은 친구 만들기’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었어요. 그것도 아주 심하게. 둘이 술집에 마주 앉아 긴 시간을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저는 올해뿐만 아니라 아마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정말 나이가 너무 많아 아이들과 직접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이 일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게 될 거라고. 그러기 전에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이니까요.
제가 오늘 같이 학교 근무조를 한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그 아이가 잘 살 수가 없어요. 막말로 아무리 내 아이를 잘 키운들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주지 못하면 내 아이도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지만 얼만 전 유모씨의 사건도 그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아이가 아무리 잘 커도 사회적인 책임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 자란 아이들도 내 아이들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잖아요. 그 아이들이 사회적인 반감이 크고 적응을 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많다면 그 사회는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 거니까요.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함께 관심을 가지고 함께 보살피며 가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특히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은 아이들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어른들의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어른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와 더불어 한 가정에서 한 아이에게만 관심을 가져 줄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그리고 가장 사회적인 관심도가 적다는 것도 그 이유이고요. 굳이 관심이 아니더라도 편견과 왜곡된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큰 것이라 부탁하고 싶어요. 그 아이들도 잠깐의 실수로 인해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것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기 보다는 그 아이들이 한 행동이 그 아이의 전부인 냥 비난하거나 아이들에게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저는 작년과 올해 아이들을 만나면서 참 많이 감사해요. ‘좋은 친구 만들기’는 아이와 제가 함께 성장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지만 늘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요. 제가 멘토가 아니고 도리어 아이에게 배우고 도움을 받고 있는 멘티랍니다. 저 아이가 저를 도와주는 멘토에요. 이 어리석고 편협한 어른을 깨우쳐 주는 저의 멘토랍니다, 하고요. 지금 제가 만나고 있는 아이 지니는 진짜 제가 뭐 도와주고 말고 할 게 없는, 정말 멋진 아이에요. 도리어 저를 엄청 가르치고 있는 중이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이기를 바랍니다. 바로 함께 더불어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아이들의 이웃도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소파에 앉을 아이가 없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보호관찰을 받는 아이가 없어서, 더 이상 좋은 친구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존재 할 필요가 없는 날이 와서, 그래서 우리 탁이를 위해 샀던 소파에 와서 앉을 우리 탁이 동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날에는 우리의 아이들이 모두,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모두 함께 행복한 세상을 살게 되리라 믿어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중간고사 후 슬럼프에 빠져 있는 예슬이와 함께 단둘이 어제 하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중간고사 준비로 기운을 다 소진한 탓인 지 여행을 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장대비가 오는 날 둘이 커플 룩처럼 똑같이 흰 바지에 흰 바바리를 입고 기차를 타고 다녀 온 여행. 재충전이 되었는지 예슬이는 기운이 솟고 있다고 합니다. 여행길에 통화를 하게 된 선배는 이러더군요.
“그 집 아이 고2, 아닌가? 여행이라...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냐? 지금 그럴 여유가 어딨어? 다른 애들 다 머리 터지게 공부하고 있을 텐데. 엄마가 간이 너무 큰 거 아냐?”
26일 있었던 결연식에 관한 글을 이제 올리는 것도 예슬이와의 여행 때문입니다. 모든 엄마 마음 같을 겁니다. 내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 비결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우리 아이가 이웃과 함께 같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 그 비결은 ‘나눔과 더불어 살기’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런이런 또 저의 욕심이 지나쳤나 봅니다.
이렇게 긴 글이 되어 버렸네요. 같이 읽어 볼 책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 할게요.
긴글이 조금 더 길어지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멘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대구방송에서 방송했던 <멘토 - 희망을 찾는다> 다시 보기를 권해드렸더니 찾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셔서 찾아가는 길을 알려드릴게요. 저도 한참 찾았습니다.
http://www.tbc.co.kr 로 가셔서 왼쪽 아래쪽에 있는 <more> 클릭 하신 뒤 아래 사진을 따라 클릭해가시면 됩니다. 좀 복잡하지만 멘토라는 것이 무엇인 지 알 수 있는, 그리고 왜 그 일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지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빈이가 만든 가족신문 - 우리 가족은 멋쟁이 (0) | 2006.06.09 |
---|---|
딸의 눈에 보인 현충일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0) | 2006.06.06 |
부부로 사는 것은 배드민턴 치기와 같다 (0) | 2006.05.21 |
시험치고 돌아오는 아이, 꼬옥 안아주세요!! (0) | 2006.05.06 |
생일 선물을 주었습니다. 제가 저에게! (0) | 2006.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