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아버지의 사랑이 뜨거운 영화 두 편

착한재벌샘정 2004. 5. 28. 12:03

 26일은 초파일이라 모든 사람들이 쉬는 날이었지만 저와 예슬이에게는 27일도 개교기념일로 하루 더 쉬는 날이었습니다.

 

예슬이와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개교기념일이 같아 모처럼 예슬이와 밀착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슬이와의 데이트가 아니라 이틀 연휴 동안 보았던 두 편의 영화에 관한 것입니다.

 

저희가 다니는 절은 초파일 전날 밤에 등을 켜기에 초파일에는 시댁에 다녀왔습니다. 마누라가 오전 10시에 있는 법회에 가자고 할 줄 알았던 남편은 그저 신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부처님 공양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저희들에게는 혼자 시골에 계시는 어머님을 한 번이라도 더 뵈러 가는 것이 더 큰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어머님을 모시고 두 아이와 함께 목욕탕에 갔었어요. 등을 밀어 드리니 당신 등에 때가 밀리는 것이 며느리에게 부끄러우신지 한 번 밀고 나면 물 한 바가지, 또 한 번 밀고 나면  물 한 바가지를 부으시더군요.

 

어제 저녁에 저희 집에 다니러 오신 친정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당신도 며느리와 목욕은 가고 싶지 않다시네요. 주름진 모습 보이기 싫으시다고. 그리고 때가 줄줄 밀리면 그것도 싫을 것 같다고.

이런, 이야기가 옆길로 샜군요.

 

시댁에서 점심을 먹고 상추와 부추를 잔뜩 가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렀습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자는 것이었는데, 정빈이가 아직 어리니 ‘전체 이용가’의 영화를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동승>을 보자고 했더니 정빈이가 이러는 겁니다.

“그런 영화를 보느니 차라리 게임을 하는 게 낫겠어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저를 제외한 남편과 예슬, 정빈이가 함께 그 영화를 보았던 겁니다. 아마 제가 일에 바빠 가족들을 내팽겨(?)친 어느 날의 일이겠지요.

“저는 어머니께서 우리가 그 영화 봤는 거 알면서도 초파일이니까 한 번 더 보자는 줄 알았어요. 똑같은 영화를 보자니까 그런 거죠.”

 

결국 다른 영화를 골라야 했는데 어렵더군요.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띤 영화가 바로 <아빠를 업고 학교에 가다>라는 영화입니다.

 

dad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야할 나이의 딸과 초등학교 입학을 앞 둔 아들을 키우고 있는 가난한 아버지.

 

아이 둘 다를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된 아버지는 프라이팬을 돌립니다. 프라이팬이 멈추었을 때 손잡이가 가리키는 아이, 한 명만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프라이팬은 아들 석와를 선택했고 석와는 강을 건너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비가 많이 오는 어느 날 석와는 함께 강을 건너 던 같은 반 친구가 급류에 휩쓸려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강을 건너지 못해 학교를 가지 못합니다.

 

 아들 석와가 사흘이나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안 아버지는 학교에 보내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 마음까지 보태 석와의 엉덩이를 심하게 때리지요.

 

다음 날 석와를 강가에 까지 배웅을 온 아버지는 석와가 강 중간에 멈춰서서 공포의 절규를 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아무 말 없이 아들을 업고 강을 건네줍니다.

 

음울하기 조차 한 배경과 말없이 굳은 아버지의 표정이지만 아버지의 마음이 뚝뚝 떨어지 나오는 것 같은 감동을 주더군요.

 

영화 내용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영화 제목이 ‘아들을 업고 학교에 가다’가 아니라 ‘아버지를 업고 학교에 가다’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고 아이들과 함께 꼭 한 번 보시라 권합니다.

 

정빈이가 아직 자막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영화의 화면이 전반적으로 어두워 남편과 제가 중간 중간 설명을 해주어야 했지만 무척 열심히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제 아버지의 모습과 부모로서의 제 자신의 모습이 겹쳐오면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 동안 영화의 장면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 편의 영화는 어제 본 <트로이>입니다. 오전 9시 조조에 휴대폰 카드 할인까지 받으니 2시간 45분짜리 영화를 2,000원에 볼 수 있더군요.

 

같은 영화를 보아도 저와 예슬이는 각자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영화를 본 후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알 수 있었어요.

 

저는 원래 헥토르의 열렬 팬인데 영화에서도 헥토르는 저를 배신하지 않더군요.

저는 헥토르가 죽고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매달아 자신의 진영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던, 적군의 진영으로 찾아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아들의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씻게 해달라 애원하는 프리아모스의 모습에 어찌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궁전에서 헥토르의 두 눈에 동전을 올려주고 마지막 입맞춤을 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꺼이꺼이 울었지요. 아들에게 마지막 입맞춤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찢어지는 가슴을 프리아모스 역을 배우 피터 오둘은 전율이 느껴지도록 관객에게 전해주더군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토록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에도 경외감을 느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헥토르라는 진정한 영웅(제가 내린 결론)은 아버지로부터 뜨거운 부성애를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헥토르를 태어난 그 순간부터 너무나 사랑했다는 아버지 프리아모스. 그는 한 나라의 위대한 왕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또 한 번 부활하여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트로이>를 보러간다는 말에 자기도 학교에 안가고 같이 가겠다던 정빈이.

15세 관람이라는 말에 입이 쑥 들어갔지만 워낙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인지라 제가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 들고는 영화에 대해 묻더군요.

book <트로이아 전쟁과 목마>

 

이 사진 기억하시죠?

 

                 176

 

이 사진 속에 제가 정빈이에게 읽어 주고 있는 책이 바로 <트로이아 전쟁과 목마>입니다.

 

정빈이는 제가 영화 장면을 이야기 할 때 마다 책과 다른 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중 영화에 빠져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보충 설명하면서 신이 났었답니다.

 

예를 들면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스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책에서는

‘자네의 늙은 아버지를 생각해 보게.’

라고 아킬레스의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자네 아버지는 요절했지.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한 복이 많은 사람’

이라고 한다고 하자 정빈이는 그 장면은 책이 아니라 영화가 맞다고 자기가 그리스 로마에 관한 책은 정말 여러 권을 읽었는데 아킬레스의 아버지 페레우스는 일찍 죽었다고 하더군요.

 

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와의 1대1의 싸움에서 지자 엉금엉금 기어 형 헥토르에게로 갔다고 하자 메넬라오스가 땅에 쓰러진 파리스의 투구를 잡고 끌고 갈 때, 아프로디테가 파리스의 투구 끈을 끊고 그를 짙은 안개로 감싸서 헬레네의 침실로 옮겼다면서 영화와 책의 차이점들을 이야기 하며 어찌나 신나 하던지요.

 

영화를 본 저와 예슬이 보다 책을 통해 영화를 상상한 정빈이가 가장 멋진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새겠지만 저는 주변의 부모님들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라고 권합니다.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이 이름과 지명이 길어 자칫 그것이 아이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은 엄마나 아버지가 읽어주면 아이들이 재미있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거든요.

 

영어 듣기만 중요한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말 듣기는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한데 엄마나 아버지의 목소리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저절로 몸에 베이게 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답니다.

 

오늘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트로이>에 대해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싸우고 죽이는 것 밖에 없어서 이 영화 별로라는 아이들이 많아요.”

예슬이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신이 출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닌 인간들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참으로 크게 남아 있습니다.

신의 힘을 빌리지 않은 인간들의 힘으로 이루어 낸 역사, 그 속에 나타났다 사라진 영웅들.

과연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가는 그들의 다음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겠지요.

 

‘신은 우리를 질투 해. 인간은 죽기 때문이지,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다운 거야.’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아킬레스의 이 대사가 참 가슴에 남더군요.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기에 치열하게, 아름다울 정도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틀 동안 본 두 편의 영화로 저희들의 시간이 뻑적지근했다면 표현이 좀 우스꽝스러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