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힘들지만 좋아서 하는 거야.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지난 일요일에는 저희 시댁에 마지막 모내기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논에 물이 없어 모심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태풍 라마순이 몰고 온 비 덕분에 논에 물이 잡혀 모심기를 끝낼 수 있었지요. 태풍 덕을 본 곳도 있답니다.

저희 시댁은 동네에서도 드물게 아직 일일이 손으로, 그야말로 재래식 방법으로 모를 심기 때문에 모 심는 일이 보통 큰일이 아니랍니다.

이렇게 하루종일 모를 심고나면 며칠을 남편은 로보캅처럼 걸어 다녀요. 온 몸이 수씨고 결린다며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며 힘들어 하지만 그 걷는 모습이 보통 웃기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아직 철이 덜 든 정빈이는 그런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살짝 살짝 건드리며 비명 섞인 반응을 신기한 듯 바라보기도 한답니다.
정빈이와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남편의 과장이 어찌나 심한지 저도 괜히 해보고 싶어질 정도랍니다. 물론 그 고통을 잘 알지만 괜히 저도 그런 장난을 치고 싶도록 비명 연기를 아주 실감나게 한다니까요.

여든이 훨씬 넘으신 어머님은 허리가 아프시다면서도 강풍에 넘어진 고추와 깨가 걱정이 되어 밭에 나가시고요. 농촌 일이라는 게 뭐 하나 쉬운 게 없어요.
그런 와중에 직장 다니느라 힘들다고 저에게는 고작 점심 한끼 해나가는 것으로 눈감아 주시는 시댁 식구들이 얼마나 감사하던 지요.
일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돌아 올 때는 양파와 고추를 듬뿍 갖고 왔지 뭡니까. 애호박까지.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쁜 며느리고 동서입니다.

정빈이는 새로 태어난 여덟 마리 강아지 때문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답니다. 어미개가 짖어대는데도 겁도 없이 강아지들과 어울려 노느라 신이 났었어요. 이렇게 일요일을 시골에서 보내고 나면 아이들도 활력을 찾는 것 같아요.

예슬이는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와 세이 클럽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는 이야기에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얘기하지 그랬냐니까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데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나중에 메일로 사정을 설명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까지 사주었답니다. 이래서 팔불출이라는 말이 있나 봐요, 그죠?

정골밭에 가서 된장에 넣을 고추도 따오고 논에 점심밥도 함께 가져가며 보낸 시간이 예슬이에게도 좋았을 겁니다. 모내기를 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노동의 힘겨움도 느끼고, 밥알 하나라도 소중히 해야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답니다.

논에 들어 가 직접 모심기를 해보라고 권해보았더니 급히 도망가 버리더군요. 아마 내년쯤에는 직접 모심기를 해야 할겁니다. 중학교 3학년인 사촌오빠도 하는 일이니 남편이 시키지 않을 리 없거든요.

작년가을에는 고추 따는 일을 시켜 보았는데 고추보다 아이가 더 빨갛게 익어서 왔더군요. 고추 따는 일이 쉽지 않거든요. 고추의 키가 어정쩡해서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앉아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여튼 허리가 엄청 아프답니다. 포대 하나를 다 채워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포대를 다 채우느라 혼이 단단히 났었거든요.

집에 돌아 와서는 제 일을 도와야했어요. 예전에 손으로 써 놓았던 원고를 다시 워드로 작업 해야 할 것이 있어 저보다는 워드 실력이 나은 예슬이에게 부탁을 했거든요. 아이는 예전에 써놓은 제 원고들을 옮기며 무척 재미있어했어요.
"진짜예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작업 양이 무척 많았었기에 제가 부탁한 작업을 다 하고 나서는 너무 힘들다며 벌러덩 누워 버리더군요. 그 바람에 정빈이가 통곡을 하고 난리 아닌 난리를 쳤답니다.

정빈이는 언니하고 소꿉놀이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동안 언니 기말고사 친다고 조금 밖에 못했고, 시골에 갔다와서 놀아 준다고 약속했으면서 어머니 작업해 준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래서 참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힘들어서 못한다고 한다며 언니는 거짓말쟁이, 약속도 안 지키고, 하면서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는지요. 며칠 상태가 좋지 않아 예민해져 있던 터라 데굴데굴 구르며 우는데 감당을 할 수가 없더군요. 결국 마음 좋은 언니가 양보를 해 소꿉놀이를 하게 되었지만요.

예슬이가 묻더군요.
"써 놓은 원고를 옮기는 작업도 이렇게 힘드는데 어머니는 생각을, 그것들을 다 생각해서 써야 하니까 진짜 힘들겠어요?"
"물론 힘들지."했더니 아이는
"그렇게 힘든 걸 왜 해요? 안 하면 되잖아요?"하며 저를 빤히 쳐다보더군요.
"힘들지만 좋으니까 하는 거지. 엄마는 글을 쓰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좋아. 그래서 하는 거야.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재미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아. 좋아하지만 그 과정이 힘들 때도 있어."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것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겁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매일 하면서 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늘 재미있을 거라 생각되나 봐요.

춤을 좋아해 춤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그 연습의 과정이 늘 좋고 재미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그 일에서 스스로가 만족을 하는 최고가 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힘든 연습의 과정을 인내하며 살지도 모를 일입니다.

때가 때니 만큼 축구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네요.
축구가 좋아 축구선수가 되었다는 그들. 그들은 늘 재미있게 연습을 했을까요?
그들에게 "그렇게 힘드는데 왜 해요? 그만 둬버리면 되지?"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합니다.
"힘들어도 좋아서 한다"고.

중학교에서 본 두 번의 시험이 에슬이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슬이는 이번 기말고사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고 시험 결과에도 스스로 만족하고 있답니다.

퇴근 해 집에 오니 아이가 독서실에 갔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요. 동생이 아직 어려 자꾸 같이 놀자고 보채니까 아파트 단지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오겠다며 갔다는 어머니 말씀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라니까요. 아이가 제 스스로 독서실에 가 밤늦게 까지 공부를 하고 오는데 제 기분이 뭐라 표현하기 어렵더군요.

마지막 수학 시험을 치르고 와서 제게 안기며
"저 수학 시험 잘 쳤어요. 역시 하니까 돼요. 어머니, 저 지금 날아갈 것 같아요. 너무 좋아요, 진짜 너무 좋아요."하며 빨갛게 상기되던 아이 얼굴. 영화 보러 가자는 것도 싫다며 너무 힘들게 준비를 했었기에 그저 집에서 푹 쉬고 싶다던 아이.

아이도 조금 알게 되었을 겁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힘들지만 좋아서 매달리게 되는 게 있다는 걸, 그런 인생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며 성장해 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