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대구교육연수원의 ‘독서를 통한 부진아 지도’ 강의 준비를 위해 컴퓨터를 켰습니다. 강의 자료를 만들다가 포토샵의 기능 중 필요한 것이 있어 인터넷의 도움을 받으려 클릭을 하니...
제 눈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어 잠시 강의 준비를 뒤로 미루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이것입니다.
참 여러 번 이에 관해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미루었던 주제인데 결국은 오늘 쓰게 됩니다. 아마 요즘 여러 가지 교육 관련 문제들로 인해 제가 조금 예민해져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일요일 저녁 가끔 나가수를 보기는 하지만 경연만 보고 등수는 보지 않은 채 끄거나 다른 프로를 봅니다. 오늘도 이영현을 시작으로 신효범의 무대까지 보았지요. 그리고 강의 준비를 하려다가 지금 이러고 있는 중 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잠시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에 관한 몇 몇 몇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변화와 혁신’이었습니다. 기업과 관련하여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가수가 보여주는 것에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변화와 혁신이라고. 그런데 저는 왜 나가수를 볼 때마다 우리 교육 현실이 안타까우리만치 오버랩이 되는지요.
어떻게 해서든 1등에서 꼴찌까지 등수를 매겨야만 하는 것.
언젠가 한 번 쓴 적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앞 둔 어떤 교실 칠판에 적혀 있던 글.
‘모두 5등씩 올리자!’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였겠지만 무슨 수로 모두 5등씩 올라갈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한 등 수 올라가면 꼭 누군가는 한 등수가 내려가야 하는데?
나가수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가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거의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등수가 매겨집니다. 이 부분에서 너무도 우리 교육 현실과 닮아 있습니다. 가수들을 무대를 내려오면서 스스로의 무대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오늘은 많이 아쉬웠어요.”
“오늘은 제대로 즐긴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최선은 다 했지만 결과는 제 몫이 아니니...”
그들의 무대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청중평가단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집니다. 철저히 타인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지요. 가수가 그 무대를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고, 어떤 심정으로 무대에 섰는지, 그 무대가 가수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에 대한 것은 평가 요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4분 내외의 단 한 번의 무대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움직이는가로 인해 평가되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타인을 통해서만이 평가받는 나가수에서 바로 우리 교육의 마음 아픈 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수들이 자신이 만족하는 무대를 만들고 내려와도 외면 받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우리 교육의 현실과 겹칩니다. 청중평가단은 더 새롭고 더 다채롭고 더 신선하고 더 강한 포퍼먼스의 무대를 더더더더.... 끊임없이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나가수를 통해 이소라라는 가수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에게서 청중평가단이라는 타인의 평가보다는 자신의 노래를 더 소중하게 안고 가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변화와 혁신에서 그녀는 실패자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청중 평가단에 의해 탈락자가 되었고요. 그녀가 노래를 못해서도 절대 아닙니다. 그녀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녀의 무대는 청중 평가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들의 입맛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타인에 의해서만 평가되고 1등과 7등의 등수가 매겨지는 나가수는 우리 교육을 마음 아프게 대변하는 듯합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즐거운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몇 등 하니?”
“공부는 잘 하니?”
“어느 대학 다니니?”
라는 타인의 평가로 인해 그들의 삶을 평가받고 있으니까요.
김경호가 ‘못 다 핀 꽃 한 송이’로 자신이 꿈꾸는 무대를 펼쳐보였다 하더라도 가수의 생각과 자신이 그 무대에 부여한 의미, 그리고 그로 인해 느낀 가치와 보람은 철저히 배제된 채 청중평가단에 의한 결과만으로 순위는 매겨지는 것이지요.
이현우는 ‘이 밤을 다시 한 번’이라는 노래로 꼴찌를 했습니다. 순위에 별 신경을 안 썼는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순위가 신경이 쓰인다던 그의 말에서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테이의 탈락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지만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많은 능력들과 가능성에 대한 기회가....
나가수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처음에는 자신의 색을 고집하던 가수들도 등수의 중압감에 결국은 청중평가단의 요구에 부합하는 무대로 변해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가수....
노래 부르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노래....
일정한 형식의 말에 음을 붙여 목소리로 나타낼 수 있게 만든 음악. 또는 그 음악을 목소리로 부름
<나는 가수다>
그런데 나가수는 결코 ‘노래하는 가수’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못내 씁쓸하답니다. 일곱 명 중 노래하지 않는 가수는 없으니까요. 가수가 노래하고 노래 부르는 자신이 즐겁고 그 노래를 듣는 타인이 행복하면 되는 것인데....
나가수에서 노래하는 가수를 원하지 않듯, 1등에서 7등의 등수를 꼭 매겨 일등과 꼴찌를 타인의 기준으로 가려내듯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진정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글을 올리려고 인터넷을 다시 열었다가 지난주에 찾아보았던 기사가 있어 검색해보았습니다.
출장 다녀오는 길에 옆자리에 앉은 한 아이가 스마트 폰으로 이 기사를 보면서 친구에게 그러더군요.
“그래서? 어쩌라고? 아~~ 정말 뭔데. 오늘 집에 가면 한바탕 난리치겠는걸. 우리 엄마 해품달에 열광하는데....그럴 거 아냐. 그 애는 밤새 촬영하느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텐데 애들은 전교 50등이라는데 넌 아무것도 안하고 공부만 하는데 이 등수냐고....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확 달아나버리네. 정말 어쩌라고....”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저도 검색을 해보았지요. 저희 집이 주중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지라 본 적은 없지만 이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엄청나더군요. 연기자는 연기를 잘 하면 되는 것을 연기자들의 전교 등수까지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인지...
전교 10등이라는 소문을 해명하기 위해 50등 등수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고하더라도, 그리고 연기까지 하면서 공부도 잘 하는 아이를 칭찬하려는 마음에서 썼겠지만...
연기자도 아닌 그저 학교만 다니면서도 전교 50등, 20등 안에도 못 드는 수많은 아이들은요?
이 내용으로 기사를 쓴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기사 앞에서 고개가 푹 꺾일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왜 모두들 아이들에게 등수를 매기지 못해 이렇게 안달을 하는 것일까요?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할 큰 아이가 어릴 적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어머니 저는 할 줄 아는 게 정말 많은데 왜 사람들은 ‘공부 잘하니?’ 한 가지만 물어요? 저는 그것만 못하고 다 잘하는데.”
왜 어른들은 그 질문 밖에 안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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