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아버지, 그 존재의 무게

착한재벌샘정 2009. 12. 2. 19:15


 

<그림 상상스쿨 (『아빠와 토스트』)제공>

학교가 증축 공사를 하는 중이라 수업 중에 공사로 인한 소음이 적지 않게 들려옵니다. 공사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소음은 간혹 수업을 중단해야 할 만큼 클 때도 있지만 아이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습니다.

3층 창가로 지나가는 인부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아버지를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집에 돌아가면 만나게 될 아버지, 주말에만 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만날 수 있는 아버지,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아버지까지.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가 지금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아이들도 알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처음 요란한 공사 소음으로 수업을 잠시 멈추어야 했을 때 아이들의 입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더랬습니다.

“아, 이건 뭔데?”
“여기가 공사장이지, 무슨 학교야.”
“이런 데서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이야.”
“왜 하필 지금 하는데? 우리가 집에 돌아가고 난 뒤에 하거나 학교에 안 오는 일요일에 하면 되잖아.”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더군요.
“맞아. 맞아. 그러면 될 것을.”
그리고 나에게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공사는 우리 없을 때 하라고 하면 안 돼요? 시끄러워서 도무지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아이들은 서로 자신이 나서서 말하겠다며 다투기까지 하더군요. 그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아저씨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일 텐데…. 저 아저씨들에게도 저녁이면 퇴근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딸과 아들이 있지 않을까요? 일요일 하루는 아버지와 같이 놀고 싶은 아이들이 말이에요. 공사에 따른 소음이 우리가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불편하다고 공사를 저녁부터 밤까지 하거나 주말에 한다면 저분들의 아이들은 어떡하죠? 여러분처럼 낮에는 학교에 가 있고 밤과 주말에만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저분들의 아이들은 어떡하죠? 저분들이 우리 아버지라고 한번 생각해봐요. 우리 아버지라면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밤에, 우리가 쉬는 일요일에 공사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3층 창가를 걸어가는 아저씨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군요. 공사 장비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걸어다니는 그분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들. 아이들은 그 순간 자신들의 아버지를 떠올렸던가 봅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요? 여러분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요?”
아이들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어요.
“얼마 전 우리 집 둘째아이가 남자 친구와 헤어진 자기 친구 얘기를 한 뒤 2PM의 재범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혜미 남자 친구가 재범인데 오후 2시에 헤어졌단 말이니?’ 하는 거예요. 혜미 남자 친구와 재범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는데 두 이야기를 섞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한 거죠. 그러자 아이가 그러더군요. 아버지하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고. 여러분의 아버지는 어떤가요?”
그러자 한 아이가 말했어요.
“에이, 우리 아빠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때 한 아이가 고개를 떨구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요. 담임이 아니라 속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짐작을 하기는 어렵지 않았지요.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가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한 권의 책 제목을 칠판에 적었습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사계절). 아이들은 책 제목이 좀 어리둥절한 모양이더군요.
책의 제목인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열두 살 로버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이에요. 돼지를 잡는 일이 직업이었던 로버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날만큼은 마을에서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거죠. 이 책은 아버지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책이라 생각해요.
“돼지를 잡은 냄새가 온 몸에 배어 있는 아버지, 그 냄새는 곧 가족의 삶을 위한 냄새이기도 하지요. 바로 지금 우리 학교에서 공사를 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아저씨들의 땀 냄새와도 같을 겁니다. 땀 냄새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겠지요. 어쩌면 그들도 땀 냄새의 고귀함을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눈물 나게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로버트처럼. 그리고 지금 내 곁에 같이 숨 쉬고 있어야만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 속에, 나의 시간들 속에서 추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라는 것을.”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남겨지게 될 아들을 위해 어른이 되는 것을 가르쳐주려는 아버지와 그를 믿고 따르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려 하는 아들 로버트의 이야기, 내 곁을 떠났지만 내 안에 살아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어준답니다.

『놀라운 아버지 1937-1974』(새만화책)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은 미술교사였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모기에 물릴까 봐 방에 모기장을 치던 아버지. 그런데 이 책 속의 아버지는 학생들이 모기에 물릴까 봐 전국을 수소문해서 교실만 한 모기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을, 그것을 책 속의 그림으로 보고 읽으면서 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아버지는 1등 하라는 마음으로 교실만 한 모기장을 만들었을까요? 그 모기장 안에서 공부를 한 아이 중에는 1등도 있고 2등도 있고 10등도 있고 꼴찌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건 사랑이었을 겁니다. 학생들을 향한 사랑. 내 아이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가슴으로 보듬을 줄 아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은 더 큰 사랑을 가슴에 담게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키워주고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들. 비록 재범이를 모르고 2PM을 몰라 아이들과 대화는 통하지 않을지라도 그 아이들에게 땀 냄새 풍기며 달려가고 싶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