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왜 욕을 하는 걸까요?

착한재벌샘정 2009. 2. 3. 07:50

왜 욕을 하는 걸까요?

 

 

“아, 씨바 배고파 디지겠다.”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과학실 옆 계단을 내려가는 아이의 말이 들려왔고 일순간 과학실에서 수업을 하던 서른다섯 명의 아이들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군요.
수업을 좀 일찍 마친 반의 아이가 과학실 아래 매점으로 가면서 한 말이었나 봅니다. 과학실 안에 있던 아이들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잔뜩 긴장한 채 침을 ‘꼴깍’ 하고 삼켰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쌤~ 저희가 욕한 게 아니에요. 저흰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긴장한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는데 그게 도리어 아이들을 긴장시킨 모양입니다.
‘어, 쌤이 이상하네. 에이씨조차 안 된다는 쌤인데, 너무 충격을 받았나? 우리가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아이 때문에 우리가 날벼락을 맞는 건 아닐까?’ 뭐 이런 표정이었죠.

 

 

 

 

< 그림 창비(『완득이』) 제공 >
신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즈음 한 아이가 궁금한 것이 있다며 나를 찾아왔어요. 아이는 정말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며 이렇게 묻더군요.
“선생님은 속으로도 욕 안 해요?”

고등학교 2학년 과학을 가르치는 나는 아이들에게 늘 예쁘고 바르고 고운 말을 쓸 것을 부탁합니다. 아이들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아이들과 개인적인 대화가 아니면 늘 경어를 쓰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하려 노력하고요. 그래서 아이들은 과학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조심하게 된다고 해요. 어느 순간부터 과학실에서는 ‘졸라’ ‘지랄’ 같은 말을 쓰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스스로 만들었고요. 처음에는 과학선생님이 교과서 내용보다 왜 아이들의 말투에 더 신경을 쓰는지 이상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고.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선생님은 정말 속으로도 욕을 하지 않느냐고.

그러니 이날 아이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요. 긴장한 아이들과 그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나, 그러는 사이 종이 쳤고, 기다리던 급식 시간이었건만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더군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솔직히 여러분도 가끔은 저렇게 이야기하는 게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과학실 안에서 들으니 여러분 스스로도 이상하다 싶을 만큼 불편하게 들리는 거, 맞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볼게요. 조금 전 그 친구의 이야기, ‘아~ 씨바’부터. 그 말은 늦잠 자서 아침을 먹지 못하고 온 자신을 향한 말이었을까요, 아님 일찍 깨워 아침을 먹여 보냈어야 할 어머니를 향한 말이었을까요? 배가 많이 고팠겠지요. 그래서 화가 났을 것이고. 하지만 누구를 향한 것이었든 꼭 그런 표현이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배고파 디지겠다’. 길가에 강아지 한 마리가 죽어 있어도 강아지 ‘디졌다’보다는 강아지 ‘죽었다’가 나을 것 같은데. 꼭 자기 자신을 ‘디지게’ 만들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쓰고도 정말 괜찮은 건지.

 

 

 

 

 

< 그림 현문미디어(『직녀의 일기장』) 제공 >

스스로를 그렇게 대하는 아이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당연히 그 정도 수준으로 대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하지 않는데 과연 남들이 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주려고 할까요. 얼마 전 대학 졸업반인 제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주문하는 사람의 말투만 보면 그 사람을 얼마간은 짐작할 수 있다고. 그래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나는 과연 어떤 단어를, 어떤 말투를 쓰는 사람인가를. 그 일을 하고 가장 크게 얻은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성장소설이라는 『완득이』(창비)와 『직녀의 일기장』(현문미디어). 두 소설의 제목을 써놓고 문득 이런 생각이 났어요. 가수 김종국의 노래 중에 “촌스런 이름도 특별해 좋다고” 하는 가사가 있거든요. 이런 내가 좀 엉뚱하다 싶은가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성장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살까,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살고 있는 걸까, 나처럼 고민하고 나처럼 힘들고 나처럼 막막한 걸까 싶어서? 초등학교 시절 어려운 숙제를 하다가 전과를 펼쳐보는 기분이랄까요. 비록 전과처럼 정답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고등학교 남학생 ‘완득이’와 여학생 ‘직녀’의 삶을 엿보는 것은 ‘호기심’과 ‘재미’일 겁니다. 그리고 ‘공감’이겠지요. 그들이 가진 고민과 갈등,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나’를 보도록 만드는 것이 성장소설의 가장 큰 힘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아이들 중 이런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꽤 많았어요. 완득이는 자신의 삶을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진짜 나 같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없을까 싶다고.

완득이처럼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에서 온 어머니를 두지도 않았고 무료 급식을 먹지도 않고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것도 아닌 그냥 적당히 하고 매일을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나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직녀처럼 아버지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도 없고 학생주임에게 불려가는 일도 없고 반성문을 써본 적도 없고 사고를 쳐서 엄마가 학교에 불려오는 일도 없는 내가 주인공이라면?

여러분은 이 책들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지네요. 그런데 이미 10대를 지나와도 너무 많이 지나와버린 나는 두 편의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답니다.
‘과연 리얼리티라는 이유로 이렇게 욕이 난무해도 되는 것일까? 성장소설은 말 그대로 10대 아이들의 이야기이고 당연히 그 또래 아이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일 텐데, 우리 아이들은 책 속 아이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나오는 이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와~ 이 애도 나처럼 이런 말이 안 들어가면 말이 안 되는구나. 진짜 나랑 똑같다. 이 소설 졸라 짱이다.” 이처럼 의식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싶어요. 의식보다 무서운 것이 무의식이거든요. 너무 당연해 그런 인식조차 없이 지나쳐버리고, 그러면서 자신의 그것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은 기성세대의 지나친 걱정일까요.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왜 욕을 하는 걸까요? 그리고 소설 속의 욕, 리얼리티라는 말로 넘어가도 될까요?

-아침독서 신문 2009년 2월 증등호

 

* 아침독서신문 홈페이지에 있는 글을 그림과 같이 모두 옮겨 온 것입니다. 

2009년 2월부터 아침독서 신문에 <이영미 선생님과 아이들>에 책과 아이들 이야기를 연재하게 되었거든요. '십대 지금 이 순간도 삶이다'가 아침독서 신문에 소개된 인연으로 올 한 해 연재를 맡게 되었어요. 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거절을 하다가 첫 원고마감을 제 일정에 맞춰 기다려주는 등 배려와 압박(?)이 있어 결국 시작을 했습니다. 솔직한 마음은 이렇게라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덕분에 카테고리가 하나 늘었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또 하나의 공유의 장이 마련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