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나이들어 가는 내 손을 다독이며 살고자....

착한재벌샘정 2004. 7. 22. 10:57

많이 더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요?
요즘 들어 건강에 대해 약간의 강박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어제는 급기야 몇 십 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MRI로 머리 사진을 찍었습니다.
결과는 이상이 없다 였지만 두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 낳을 때 외에는 병원에 잘 안가는 사람인데 스스로 사진을 찍어 봐야겠다니 모두 들 놀라시더군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몇 가지 있지만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화요일 새벽, 월요일에 조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올 들어 제 곁을 그렇게 갑자기 떠난 사람은 세 사람이나 됩니다. 모두들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저희 아이는 사고였지만 선배언니의 남편과 조카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우리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어제 얼굴을 본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작년 여름 건강에 적신호가 있었기에 그 동안 운동으로 체중을 많이 줄이고 신경을 써왔지만 올 들어 유난히 떨어지는 기억력에 저 스스로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든요.
옆자리의 후배는 몇 달 같이 지내보더니 조심스럽게 이러더군요.
"선생님, 그 때의 총기는 다 어딜 가고...."
한 후배는 그런 저를 위로한답시고
"지금이 훨씬 더 인간적이십니다. 선생님 실수하면 우리가 얼마나 통쾌한 지 아십니까? 지금이 훨씬 좋다니까요."
 
어찌나 심각한 지 저 스스로가 '치매'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그저께도 서울 모 복지관에서 '요리로 만나는 과학 교과서'를 보고 과학 캠프에 강사로 와주십사 전화가 왔지만 일정 조절이 안 돼 직접 갈 수는 없고 도움이 될만한 책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책제목이 생각이 나야 말이지요. 어찌 그리 깜깜하던 지요. 결국은 생각해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와 책을 찾아보고는 다시 전화를 해주었다니까요. 그 책은 책장이 보슬보슬하도록 아이와 제가 즐겨 보는 책인데....그런 일이 가끔도 아니니..

가끔은 친구에게 했던 이야기를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꺼내기도 합니다. 그러다 친구의 지난번에 했잖아 하는 이야기에 내가 정말 왜 이러 지 싶고.

  
그러면서 심한 두통이 잦아 더 걱정을 했죠. 제가 그 동안 남들의 '머리가 아파'라는 말을 잘 이해를 못했었거든요.

그런데도 결과는 이상이 없다며 좀 쉬면 괜찮을거라고, 담당 의사가 사촌 오빠였는데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겁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라고. 기억력은 누구나 떨어지는 것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하니까 그런다고, 예전에 비해 뇌의 활성도가 10분의 1도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게 바로 욕심이라더군요. 나이가 들면 누구나 어떤 기능이든 저하되는 것이니 받아들이라고.
그 동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럴 수 있으니 쉬어보고 그래도 두통이 계속되면 약물 치료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 와 주방 벽에 걸린 칠판에 적힌 일정들을 보았습니다.
지나간 며칠 동안의 일정들.

16일 밤 저희 집에 일본에서 온 손님들이 왔었습니다. 재일 동포 3세인 20대의 두 아가씨가 제가 활동하고 있는 KYC(한국청년연합회)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고 저희 집에서 머물게 되었거든요. 새벽 두시 까지 시내를 돌아다니고 곰장어를 구워 먹으며 서툰 말과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지요.
 
토요일에는 저희 반 아이들과의 종업식이 있었는데 저희반 공주들 저를 감동시켜주더군요. 그리고 4시부터는 영풍문고에서 저자 강연회를 했었어요. 강연회는 그냥 물을 부어버리는 것 같은 폭우 속에도 준비한 의자가 부족해 사무실 의자까지 가져올 정도로 많은 분들이 와 주셨어요.

 

일요일에는 일본에서 온 손님에게 특별한 것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약밥과 식혜'를 만들었는데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들이지요.

 

오후에는 MBC 뉴스 투데이의 교육 기획 '창의성'에 관련하여 저희 집에서 촬영이 있었어요. 아이들과 요리를 만들면서 과학 이야기도 하고 놀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면서 서울서 담당 PD가 찾아 오셨더군요.

 

저희 아이들이 인터뷰를 몹시 싫어하는 데 이번에는 '공동 필자'의 책임감 때문인지 하겠다고 하더군요. 지난 번 중앙일보 인터뷰도 뜻밖의 승낙에 놀랐었는데 이번에도 이런 제의가 들어 왔는데 어떠냐고 아이들과 의논을 했는데 해보겠다고 해 제가 사실 많이 놀랐었답니다. 그 동안은 대부분의 인터뷰 사진은 제가 찍어서 보내는 것을 전제로 인터뷰를 했었거든요.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해서요. 그 어떤 것보다 저에게는 아이들이 소중하니까 아이들과 의논해 보고 싫다는 것은 거절을 해왔거든요.

아래 주소를 누르면 다시 보기로 볼 수 있습니다. 7월 20일 <창의력은 생활속에...>의 일부분에 저희들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아참, 그 코너를 소개하는 김수정 아나운서가 고등학교 때 한 반 친구에요.

참 예쁘고 유난히 영어를 잘 하던 친구였는데 아마, MC공채 1기로 MBC에 입사를 했을 겁니다. 아직도 여전히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활동중이라 저 또한 반갑고 기쁘더군요.  

 

http://script.imnews.imbc.com/vodnews/index.asp?YYYY=ALL&MM=ALL&DD=ALL&s_FlagMedia=Y&CntsCode=A020100&media_code=A020100K034500


 
아이들과 함께 만든 수제비로 늦은 점심을 먹은 PD가 떠나고 난 뒤 저는 월요일 아침까지 넘겨줘야 하는 신문의 요리 칼럼을 쓰느라 시댁의 모임에 가지 못하고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야했어요.


밤늦게 온 또 다른 일본 손님과의 만남.
월요일 아침 일찍 경주여행을 가기 위해 출발 장소로 데려다 주고 17일 약속했었던 늦은 원고를 마무리하려는데 이런, 노트북이 고장.

노트북 맡기도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가 고장나 정비공장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노트북도 고장나고 차도 고장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어디 가지도 말고 쉬라는 걸 거야, 하면서도 화요일 있을 새벗 도서관 강의 준비로 하루를 다 보내고.
 
저녁에는 일본 서 온 손님들 환송식에 참가했다가 분위기에 취하기도 하고 우리 집에 짐이 있는 손님 때문에 결국은 또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왔어요. 밖에서 모임을 좀처럼 가지지 않는 저인지라 참으로 드문 일이지만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화요일 새벽 조카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듣고도 약속 된 강의 취소할 수 없어 강의를 하고.

 

병원에서 만난 가족들의 모습과 사진 속의 낯익은 얼굴에서 또 한 사람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 오열하고.

그 후 찾아 온 불면증. 결국은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고.


주방 의자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며칠 동안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았지요.
새삼 살아 있음에,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살고 있는 지금의 제가 한 없이 감사하더군요.
저 많은 일들 중 내가 하기 싫어 억지로 한 일들이 얼마나 될까?
병원을 찾은 일 말고는 내가 좋아서, 내가 간절히 원해서 하는 일들임에...

 

그러면서 오빠의 '욕심'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러면서 조금씩 신체의 기능들이 저하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니 안달복달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던 말.

 

나이가 든다는 것,
늙어 가는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깜빡한 자신을 질책하기보다는 싱긋 웃으며 괜찮아, 하며 저의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도닥도닥 거려 주어야겠어요.

그러면서 얼마 전 좋은 친구로 부터 선물 받은 책을 펼칩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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