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이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잘 참지 못합니다.
일요일, 정빈이는 부활절 예배를 위해 교회로 가고 예슬이는 곧 있을 중간고사 준비, 저희 부부는 시댁에 다녀오느라 점심은 같이 먹지 못하고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자장면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한 정빈이는 꼭 자장면을 먹어야겠다 고집을 부리더니 자장면이 아니면 저녁을 먹지 않겠다며 자기 방으로 가버리더군요.
시켜 먹는 음식에 반대인 남편은 정빈이가 좋아하는 라면은 어떻겠냐고 많이(?) 양보해 물었지만 정빈이는 ‘자장면 자장면 자장면.....’하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이들 막무가내로 떼쓸 때 많잖아요.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꼭 닫은 채 목소리 톤도 똑같이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반복해서 말하는 아이.
라면도 잘 먹이지 않는지라 저희의 입장에서는 정말 많이 양보한 것이었지만 정빈이는 라면이 식탁에 오른 뒤에도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한 번, 예슬이가 한 번 먹자고 방으로 가 권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어요.
“굶으라 그래. 고집도 어지간해야지.”
이렇게 말한 남편이었지만 저러다 정말 굶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안쓰러웠는지 저보고 달래보라는 겁니다. 이럴 때는 저는 남편보다 강경한 입장인지라 남편의 애원하는 눈빛이 쿡, 하고 웃음이 나올정도로 간절했습니다.
못이기는 척 정빈이 방으로 갔더니 책에 눈길을 주며 저는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이야기 할 때는 얼굴을 마주 봤으면 좋겠어. 너의 머리카락만 보고 이야기하기 싫거든. 너도 입장이 바뀌었을 때 똑같을 거야. 책 그만 보고 어머니 봐줘.”
“…”
말없이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정빈이의 얼굴에는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머니는 정빈이가 현명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아이였으면 해. 자장면이 먹고 싶다는 정빈이의 마음 잘 알아. 하지만 정빈이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많이 좋아하잖아. 만약 네가 지금 이 상태로 고집을 부린다면 정빈이는 원하는 자장면도 먹지 못하고 좋아하는 라면도 먹지 못해. 그 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언니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어. 고집이 세다, 융통성이 없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린다 등등. 하지만 라면을 먹으면 일단 지금 당장 먹고 싶은 자장면은 아니지만 네가 좋아하는,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라면을 먹을 수 있어. 그리고 좋은 이미지까지. 4학년이 되니 정말 많이 달라졌네, 융통성도 있구나, 상황에 따라 행동할 줄도 아는 구나 등등. 그리고 오늘 너의 모습에 따라 아버지가 조만간 정빈이에게 자장면을 사주실지도 모르고. 그건 어머니가 옆에서 슬쩍 말씀드려볼게. 어때? 그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100% 정빈이의 몫이야.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결과도 마찬가지고. 어머니는 정빈이가 현명한 판단을 할 거라 믿어. 그리고 너에게 무엇이 더 이득인가도 생각해 보기 바래.”
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정빈이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더군요.
“먹으러 가자. 대신 주방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족들에게 사과해야해. 아버지와 언니가 너에게 같이 먹자 권했지만 네가 거절했었잖아. 자장면이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너로 인해 다른 가족들이 마음이 불편하니까.”
눈을 깜박이며 갈등을 하는 정빈이.
“지난번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사과하는 거 봤지? 텔레비전 때문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화내고 난 뒤 아버지가 모르고 그랬다는 걸 알고는 어머니가 사과했었잖아.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고 말이야. 가족이라고 해서 마음이 안 상하는 거 아니고, 또 모든 게 그냥 넘어가 줄거라는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어. 이러는 건 어떨까?”
한 쪽 손을 머리에 갖다대며 건들건들하며 ‘아, 죄쏭합니다. 아, 아 죄쏭죄쏭!!!!’ 하며 개그맨의 흉내는 내는 저의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면서도 자기가 사과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못내 쑥스러웠는지 주방까지 저의 엉덩이에 매달려서 간 정빈이는 아버지와 언니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죄송합니다.’ 한 마디 하더니 주방 바닥에 쓰러져 버리더군요. 그러고는 일어나 라면 한 그릇을 뚝딱. 조금 전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거냐며 어찌나 좋아하며 먹던지. 아이는 아이에요, 정말.
정빈이는 병원에 다녀 온 후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아이들 눈치 빠르잖아요. 병원에 다녀오는 동안 평소 엄마가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던 것들을 좀(?) 해준다 싶은가 봐요. 특히 먹고 싶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들어 준다 싶은 가 봐요. 솔직히 요즘 정빈이가 좋아하는 것이 식탁에 오를 때가 많거든요. 사실 라면도 정빈이 때문에 사 둔거였어요. 혹시 너무 입맛이 없다며 밥을 안 먹으려 할 때를 대비해서요.
주변에서는 아이가 원하는 거 다해주라고, 안쓰럽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남편도 저도 솔직히 예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선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와의 시간, 늘 이렇게 갈등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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