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이거 선생님께 드릴 촌지야!

착한재벌샘정 2003. 11. 24. 11:05
내가 다시 퀼트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이 너무도 컸었기에 예슬이가 퀼트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직접 가르치지 않고 강습소에 보내기까지 했었는데.

퀼트는 한 때 내게 있어 기도였다.

작은아이의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는 중환자 실에 있고 아침저녁으로 30분씩 밖에 면회가 되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긴 기다림의 시간은 내게 너무도 큰 고통이었기에 서울대 병원에서 가까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여러 종류의 천과 퀼트에 필요한 도구를 사 가지고 와 이것저것 만들었었다.

그 한 땀 한 땀에 내 간절한 기도를 담았었다.

괜히 혼자서 내기를 걸어 내 기도를 시험하기도 하면서.

바늘에 실을 꿰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실을 자른다. 그러면서 이 실이 두 줄 박는데 딱 맞는 길이라면 오후 면회 때 상태가 좋아진 아이를 만날 거야, 라며 혼자 내기를 하곤 했었다.

그 실 길이에 아이의 운명을 걸곤 했었던 나.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을 가져보고 또 절망을 하곤 하면서 나는 손가락에 낀 골무가 구멍이 나도록 바느질을 했었다.

아이가 퇴원을 하고 나서도 보채는 아이를 업고 밤을 새워야 할 때에도 늘 내 손에는 바느질거리가 들려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난 바느질을 그만두었다.

내 평생 다시는 바느질로 인형을 만드는 일도 가방을 만드는 일도 벽걸이를 만드는 일도 없으리라 다짐하며 아끼며 모아두었던 조각 천들 마저 모두 버려 버렸었는데.

예슬이는 요즈음 너무 바쁘다.

아이는 전자 실험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오늘 학교 예선에서 학교 대표가 되었고 4월 28일 서구청 예선을 앞두고 아이는 보통 하루에 적게는 3시간 많게는 6시간씩 대회 준비에 매달려 있다.

아이는 대회 준비를 정년 퇴임을 하신 선생님께 지도를 받고 있다.

엄마가 과학 선생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엄마의 실력을 아주 깔보면서(내 실력은 아이에게 외면 당할만한 게 사실이다)자신이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고 이른 저녁을 먹고 매일을 선생님 댁에 가서 대회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퇴근해서 아이를 선생님 댁에 데려다 주고 끝나면 데리러 가는 것은 내 몫이다.

늦는 날은 밤 12시가 넘을 때도 많으니.

"슬아, 난 아이들 이리저리 데려 다니면서 뒷바라지하는 엄마 무지 존경스럽다. 엄마는 매년 봄에 한 두 달, 이 대회 준비 때문에 너 실어 나르는 것도 이리도 힘이 드니. 엄마가 병나겠어, 야."

하며 끙끙거리기 여사니, 난 역시 무늬만 엄만가 보다.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의 지도에 대한 사례를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며칠을 고민을 했었다.

갈비짝을 사다 드릴까? 아니야, 요즈음 누구 고기를 선물 하냐? 그리고 그건 왠지 내키지 않고.

그럼 상품권? 현금이 아니니 괜찮은 건가? 현직에 계신 분도 아니고?

그런 고민의 끝자락에 몇 해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난 사실 학창 시절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날 "주이쎄"로 만드는 신 분, 고등학교 시절 영어 단어로 한 시간에 8대나 내 뺨을 때리셨던 분, 아, 역시 내게 있어 영어는 악몽의 추억이다.

그런 중에 내 가슴에 늘 자리하고 계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 바로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신정자 선생님이시다.

긴 생 머리에 하얀 얼굴이 너무나 눈부셨던 분. 가늘고 길었던 그 손가락들.

난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손을 가장 먼저 본다.

저 사람의 손은 과연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손일까?

저 손은 남을 위해 뭘 하고 있는 손일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사람의 손을 참 꼼꼼히 보는 편이다.

이 습관은 바로 그 분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수업하다 갑자기 고약한 냄새가 나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고 코를 싸쥐고 하는 일이 종종 생겼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은 그 아이를 물가로 데려가 씻기고 새 옷으로(선생님 책상서랍에는 늘 그 아이를 위한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갈아 입히곤 하셨다.

난 그 때 그 아이를 참 미워했었는데 그 이유가 선생님의 그 희고 가늘고 고운 손이 그 아이 때문에 대소변이 묻은 옷들을 빨아야한다는 사실에 어린 내가 너무 속이 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자꾸 보는 습관이 생겼고 그 습관은 나의 성장 과정에서 사람을 보면 가장 먼저 손부터 보는 습관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그런 선생님께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우리 작은 아이가 태어나던 해 가을에 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로 연락이 닿았다.

퇴근하여 집에 오니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친정어머니께서 그 분이 다녀가셨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이고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우리 집에 몇 번 다녀가시기도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기에 어머니도 참 반가워하셨다.

그런데 바빠서 내 얼굴은 못보고 간다며 오래 이야기도 못하고 가셨다며, 아주 난처해하면서 주방 입구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어머니의 손가락은 갈비박스에 가 멈추고 있었다.

몇 밤을 한 숨 못 자고 꼬박 지새웠었다.

갈비짝이라니, 그 옛날에 날 그리도 감동시키시던 모습은 어디 가고 제자 집에 오시면서 갈비짝을 이리도 큰 갈비짝을 들고 오시다니.

그 때의 나에게 갈비 상자는 왜 그렇게 불순한 이미지로 다가왔을까?

제자에게 이런 걸 선 뜻 사오시는 분이라면 이런 걸 받는데도 너무 익숙한 분이 아닐까?

안 그래도 촌지문제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판국에 선생님마저도.

학부형들이 들고 오는 선물들에 너무 아무렇지 않는, 아니 오히려 들고 오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하면서 내 생각은 끝간데를 모르고 부풀어오르기만 했고 내 고통은 그 보다 더 커져만 갔었다.

난 언젠가는 선생님을 만나면 선생님의 그 희고 고운 두 손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내대로는 힘겨운 몸부림을 치며 견뎌(?)오고 있는데, 그런데 선생님은, 선생님은….

난 엄청난 배신감에 견디기 힘들었다.

아, 이건 아니야, 정말 이건 아니야 하면서.

그런데 그 즈음 졸업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는 길이라며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에 어찌나 안쓰럽던지.

그 아이와 헤어져 돌아서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구나, 선생님의 마음이 이거구나.

아이 때문에 종종 걸음으로 가는 저 아이에게 밥이라도 한 그릇 사 먹이고 싶은 마음, 만약 내가 저 아이의 아이가 죽음의 경계를 오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가보다는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아이 엄마가 더 안쓰럽고 가여워 정말 갈비짝 아니라 그 보다 더 한 것도 사다 주고 싶겠구나.

또 며칠을 후회와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보내다가 결국은 긴 편지 한 통을 써 들고 선생님을 만나러 갔었다.

갈비 박스를 보며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적고 싶었다.

선생님에 대한 불신과 후회까지 모두.

어찌 언어가 진실을 따라 가겠는가만은.

마침 선생님은 출장 중이라 뵙지는 못하고 내 마음을 적은 편지와 꽃다발을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전화선을 통해 들려 오는 선생님의

"이 선생, 난 자네에게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라네. 날 그리도 모른단 말인가?

난 자네가 아이 때문에 힘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자네 잘 먹여야되겠다는 것이었고 갈비탕 한 찜통 끓여두면 그래도 며칠은 국거리 걱정이라도 덜 거라는 생각에 사 가지고 간 거라네.

아침에 출근해 자네 편지 읽고 지금 우리 교실이 바다 못지 않게 되었네 그려.

참 슬픈 현실이네.

하지만 걱정 말게. 난 자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손을 지금도 가지고 있으니.

그리고 자네가 나를 그토록 깊이, 내 손을 그리 이뻐하는 줄 몰랐네. 지금부터라도 마사지라도 열심히 해야 되겠구먼."

하시며 여전히 젖어 있던 선생님의 목소리.

다시 퀼트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 눈물 젖은 기도와 함께 하던 그 퀼트를.

이제 더 이상 눈물 흘릴 필요도 없다.

아이는 내 곁에 잘 있어주고 있고 그 퀼트의 한 땀 한 땀을 필요로 하는 기도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난 그저 믿고 있고 바늘 없이도 기도할 수 있으므로.

지금의 내게 있어 퀼트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아이에게 밤마다 정성을 쏟아주시는 선생님과 매일 찾아오는 꼬마 손님 때문에 밤마다 불편하실 사모님께 감사의 편지 한 장과 함께 촌지를 마련했다.

사모님의 가까운 외출에 드실 수 있는 가방 하나를 만들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내 감사의 한 땀 한 땀을 바늘 끝에다 쏟아 부었다.

밤을 새워 만드느라 삐뚤게 박힌 곳도 더러 있지만 그건 결코 삐뚤 한 마음에서 주는 것이 아닌 진정한 촌지이기에 너그러이 봐 주시리라 믿으면서.

큰 아이가 그 가방을 보고 물었다.

"어머니, 이거 누구 거예요?"

난 이렇게 대답했다.

"이거 선생님께 드릴 촌지야."

아이의 놀라 동그랗게 뜬눈에 내 쾌활한 웃음이 가 닿는다.

아이가 촌지의 진정한 뜻을 알고 마음껏 촌지를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서점에 가면 이 책 한 번 보세요.]

### 씩씩한 마들린느, MADELINE###

<아줌마의 설렁설렁 잉글리쉬 중에서>

나는 영어 동화책을 구입할 때는 보통 우리 글로 된 책과 영어로 된 책을 동시에 사는데 아이에게 영어와 한글로 번갈아 가면서 읽어 주었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은데 엄마가 특별한 목적으로 고를 때도 있다. 작은아이는 가슴에 있는 너무도 큰 수술 자국 때문에 속상해했다.

"다른 아이들은 없는데…, 나도 이런 거 없었으면 좋겠어."

하면서 속상해하기에 이럴 때 아이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무언가 없을까, 하며 여러 가지를 찾다가 ≪MADELINE(한글 번역본은 마들린느)≫라는 그림책을 만났다.

바로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아이 마음의 속상함은 사라진 것이다.

꼬마 MADELINE가 맹장염 수술을 했는데 병 문안 온 친구들에게 수술 자국을 아주 자랑스럽게 보이고 있는 장면, 너무나 부러운 듯 그걸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 한 장.

이 그림책을 읽어 주며 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MADELINE는 작지만 누구보다 씩씩하고 용감한 아이지. 이런 아이에게는 표시를 해두는 거야.

우리 정빈이도 엄마에게 특별한 고마움과 사랑을 주는 아이여서 표시해 둔 거야.

엄마 가슴을 한번 봐. 표시가 있어 없어? 없지? 언니 가슴에는 있을까 없을까? 언니 가슴에도 없거든. 아버지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없어.

우리 정빈이에게만 있는 거야. 왜 그럴까?

우리 정빈이가 엄마에게 왔고, 엄마가 정빈이를 키우면서 정말 많이 기쁘고 예전보다 엄마 마음속에 사랑이 많아졌거든.

그래서 고맙다는 표시로 그렇게 해둔 거야. 엄마도 그런 표시 있었으면 좋겠어.'

난 내 책에 마들린느를 초대해 놓았다.

용기가 필요할 때 난 이 책을 펼친다.

그녀는 내가 책을 펼칠 때마다 불끈불끈 힘이 나게 내게 용기를 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