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올해도 추석 이야기는 해야겠지요?

착한재벌샘정 2003. 9. 15. 14:07
안녕하세요, 칼럼 가족 여러분?
추석 연휴는 잘 지내셨는지요?
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는 없는지요?

저희는 추석 전날 시댁에 가서 일요일인 어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중간에 잠시 외출(?)이 있었지만요.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시댁에 자주 가지 못한 까닭에 추석 연휴동안이라도 시댁에 있자 마음을 먹었거든요.
제가 토요일까지 있자고 했더니 남편 첫 마디가 뭐였는지 아세요?
"너 밥하기 싫어서 그러지? 거기 있으면 추석 음식으로 토요일까지 먹을 수 있으니까!"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_^

추석 전 날은 제가 아침 방송이 있었던 탓에 제일 꼴찌로 시댁에 갔더니 형님께서 약간 뼈있는 말씀 한 마디를 하시더군요. ㅎㅎㅎ
주방에 들어서는 제 등에 벌이 한 마리 붙었는데 그걸 떼어주시면서 하시는 말씀.
"늦게 왔다고 벌이 붙어 주는 갑다."

새로 생긴 조선일보 '여성칼럼'에 필진으로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그 출발을 하게 되었답니다. 추석에 관한 글이라 방송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문을 사서 남편에게 보여 주었더니
"방송에서도 전 부치는데 5시간 이상 걸린다는 이야기까지 상세히 하더니만…. 꼼짝 못하게 만드는군."

즐거운 추석, 남편 하기 나름

‘며느리 패키지’란 말을 들어봤는지? 두통약을 비롯해 소화제·변비약·파스·피로회복제 등이 들어 있는 약통을 뜻한다. 특히 명절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욱신거리지 않는 데가 없는 이 나라의 힘겨운 며느리들을 위해 생겨났으므로 그 이름이 ‘며느리 패키지’다.
이 패키지가 필요한 아내들이 푸념하는 남편들의 모습은 대개 이러하다.
시댁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돌변하는 태도. 마누라 쳐다보는 눈이 마치 ‘당신 누구더라?’ 하는 빛으로 뒤바뀐다. 간혹 건네는 말투도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있기 일쑤다.
시어머니, 시누이들이랑 비교해댈 땐 속불이 난다. “당신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어머닌 저 연세에도 척척 해내시잖아. 옛날 우리 누이 같으면 한 시간 전에 끝냈겠다. 굼뜨고 느려터져 가지고는….’

뿐인가. 집안 청소에 음식 준비에, 매달리는 아이까지 달래가며 종종걸음 치고 있는 게 빤히 보일 텐데도 왕처럼 소파에 드러누워서는 잔심부름을 시킨다.
“입이 좀 심심한데 뭐 먹을 거 없나?” 시어머니 한술 더 뜨신다. “배 출출할 때도 됐다. 이것저것 좀 챙겨서 갖다 줘라.” 질세라 코맹맹이 소리 약간 섞어 “당신이 좀 갖다 먹으면 안돼?” 하고 처세를 부려보지만 남편을 대신해 주방으로 들어가시는 시어머니 표정이 좋으실 리 없다. “시어미 부려먹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남편들이여, 명절 증후군으로 사랑하는 아내 골병 들지 않게 하려면 올 추석 ‘남편패키지’를 준비하는 게 현명하다. 패키지를 위한 처방전은 아주 간단하다. 애정이 담긴 말 한마디, 그리고 간단한 실천!
“당신 이번에도 힘들어서 어떡하지? 당신이 명절마다 고생한다는 거 알아.”(★)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지 시켜만 주면 잘한다니까.”(★★)
어머니 기분도 살펴야 한다면 이건 어떤가? “어머니, 청소기는 기계라서 남자와 더 잘 어울려요. 오랜만에 몸도 풀 겸 효자노릇 좀 하게 해주실래요?”(★★★)
한두 번만 해보면 어색하지 않다.

한쪽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면 다른 한쪽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시댁’ ‘명절’이란 말만 들어도 짜증부터 내는 아내를 보며 웃을 수 있는 남편이 있을까? 명절만 되면 냉기가 흐르는 엄마 아빠를 바라보며 자란 아이들에게 명절은 어떤 의미일까?

여성학자 박혜란은 ‘나이 듦에 대하여’란 책에서 “어렸을 때 집안에서 노인을 못 보고 자랐기 때문에 나는 책을 통해 노인의 이미지를 그려왔다”고 적고 있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이런 글을 적게 될지 모른다.
“어렸을 때 즐거운 명절을 경험한 적이 없어 나는 책을 통해 그 이미지를 그려왔다. 결혼을 하니 아내의 불평과 짜증으로 명절은 여전히 불행하며, 즐거운 명절이란 책 속에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른들이 좀더 배려하고 노력하면 학교에서도, 고액 과외로도, 유명 학원에서도 배울 수 없는 ‘함께 하는, 그래서 즐거운 명절’이라는 생생한 수업을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해줄 수 있다.
딸은 엄마를 배려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아들은 인정받고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아버지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남편 패키지’를 잘만 구성한다면 암보다 무섭다는 ‘고부간의 갈등’도 뿌리째 뽑을 수 있다. 마주 보며 웃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모습을 보면서 고부간 갈등이란 것도 책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미지로 바꿔버리자.

남편은 이 글 때문인지 올 추석에는 '남편 패키지'를 아주 잘 구성해 주었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러면 세상 며느리들 다 죽어요."했더니 옆에서 '맞아요'하며 맞장구도 쳐주더군요.

원래 계획은 토요일까지 계속 있을 작정이었는데 성묘 갔다 온 남편 하는 말이
"큰형님이야 오늘밤에 가실 거고 작은 형 식구들이 내일까지 있을 거니까 우리는 지금 대구 들어가서 좀 쉬기도 하고 처갓집 갔다가 모두 가고 없는 내일 오후에 다시 와서 일요일까지 있자."

남편은 형님네 식구들과 다 같이 있는 것보다는 혼자 계시는 어머니이니 하루라도 오래 어머니 곁에 나누어서 있어드리자며 형님네 식구들 계시는 동안 처갓집으로 하루 외출(?) 갔다가 일요일까지 어머니와 함께 있자더군요.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숨 푹 자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산에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섰습니다.
남편이 살빠지는데는 등산이 최고라 꼬드기(?)기도 했지만 사실은 남편과 둘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따라 나섰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산에 올랐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답니다. 엉덩방아까지 찧어서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답니다.

산에서 내려와 막내 동생 내외가 와 있다는 소식에 친정으로 가 하루 밤 자고 태풍 매미로 인해 쏟아지는 빗속을 헤치고 다시 시댁으로 갔답니다. 혹시 기다리실까봐 전화를 드렸더니 비 오고 바람 부니 오지 말라 하셨지만 남편 ,
"어른들 됐다는 말씀 치고 된 거 하나도 없어. 말씀은 이러시지만 기다리실 거야. 이걸 그대로 받아들여 그럼 나중에 비 그치고 갈게요 하면 안되지. 말씀만 그러시지 절대로 그런 마음 아니셔."

매미의 위력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의 빨간 마티즈 강풍에 날려갈 뻔했답니다.

밤에 자는데 바람은 또 어찌나 세게 불던지 정말 무섭더군요.
예슬이 혼자서 한 방 차지하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한 방, 저와 정빈이가 한 방, 큰집에 이렇게 각각 흩어져(?) 잠을 잤답니다.

바람소리 사이사이 남편이 어머니께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남편의 목소리와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제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더군요.

팔순이 훨씬 넘으신 어머니가 사십 중반의 막내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소녀처럼 웃으시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어머니는 참 행복하시겠구나,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남편도 행복하겠지, 싶은 게 말입니다.

무섭다고 제 품을 파고드는 정빈이를 꼬옥 보듬어 안으며 딸 많은 친정 집의 아직 장가 안 간 하나뿐인 남동생도 나중에 친정어머니께 저렇게 해주려나 싶은 생각도 들고, 정빈이도 나 늙으면 저렇게 해주려나 …. 왜 그리 생각이 많아지던지요.

그 사이 매미는 더욱 위력을 발휘하여 정전이 되었고 바람 소리도 더 거칠어져 잠 안 오는 밤을 결국 꼴딱 새우게 만들었답니다.

어머니를 위해 해드리는 일은 하나도 없건만 그저 저희 식구가 한 지붕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으신 지 괜히 남편과 예슬이, 정빈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시며 흐뭇해하시더군요.
오늘밤에는 갈 거냐 물으시기에 하룻밤 더 잘거라 말씀드리니 그 좋아하시는 모습이란.

일요일, 집을 떠나오면서 정빈이 보고 할머니께 뽀뽀해 드리라고 했더니 싫다는 겁니다. 이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
"그럼, 나중에 정빈이 아기가 어머니에게 뽀뽀 안 한다고 해도 정빈이는 그래 하지 마라, 할거야? 너 이 세상에서 어머니 제일 좋다고 하잖아. 그런 어머니에게 정빈이 아기가 싫다고 뽀뽀 안 한다고 하면 너 마음이 어떨 것 같아? 할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분이셔. 네가 뽀뽀해드리면 할머니도 좋아하시겠지만 아버지는 더 좋아할 걸. 힘들지 않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도 진짜 안 해드릴 거야?"

대문 앞에서 저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시던 어머니는 다시 당신 곁으로 걸어 오는 정빈이를 의아하게 바라보시다가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해드리자 어찌나 좋아하시던지요.

쭈뼛거리며 등 떠밀려 뽀뽀를 하러 갔던 정빈이도 할머니의 큰 웃음소리에 배시시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데, 자기가 한 작은 행동이 할머니를 많이 기쁘게 해드린 것에 기쁘기도 하고 안 하려 고집을 부리던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새벽 잠 없으신 어머니 밥 해놓으시고 명절 음식 많이 있으니 반찬 걱정 없는데다가 설거지는 예슬이 시키니, 밥하기 싫어 오래 있자는 거지? 라던 남편, 점쟁이라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제가 뮤직 비디오를 너무 좋아하는데 정빈이는 들과 논으로 남편 뒤를 따라 다니니 예슬이와 둘이서 음악 전문 채널 틀어 놓고 종알종알거리며 최신 가요에 뮤직비디오에, 정말 원 없이 보았으니, 연휴 길어서, 시댁에 오래 있어 힘들었다는 말은 절대 못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