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못생겨서 시집을 못 갔나?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입추가 지났네요. 그래도 오늘 대구는 쌀쌀한 하루였어요.
오늘 올리는 글은 <책나무>라는 사외보에 실린 글인데 이 글을 읽은 동생이
"너무나 정빈이 다워. 한 눈에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고 하더군요."
이 글을 읽으시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많이 마음을 보내주신 정빈이를 좀 더 가까이 느끼지 않을까 해서 이 글을 택했습니다.

정빈이는 지난 4일 예비 소집을 다녀왔고 1학년 1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냥 1반이 좋겠다는군요.

그리고 아래 그림은 글과 함께 있는 삽화 중 저의 모습입니다. 저 혼자 어찌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냥 그렇게 웃음이 나오더군요. 저를 모르시는 분들은 어떻게 저를 떠올리실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 못생겨서 시집을 못갔나?

정빈이는 저녁만 먹으면 산책을 가자고 조른다. 추워서 안 된다는 말로는 아이를 달래기에 역부족일 때가 많아 동네 서점에 가자며 손을 잡고 나섰다. 집밖으로 나온 것이 마냥 즐거운 아이는 내 손을 뿌리치고는 인도를 두고 아파트 화단의 바위를 오르내리고 폴짝폴짝 뛰며 '어머니도 해 보세요. 재미있어요.'한다.

한글을 깨쳐 읽기와 쓰기 재미가 절정인 정빈이는 집만 나서면 이것저것 풍부하게 제공되는 읽을거리 때문에 더 즐거워한다. 글자를 깨치는 데 좋은 교재 역할을 해 주었던 길거리 간판은 여전히 아이의 관심을 끈다. 간판뿐만 아니라 작은 스티커까지 읽으려는 아이 때문에 나는 거북이보다 더 느림보가 되어야 한다.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전부 읽으려는 아이와 실갱이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시, 집, 못, 간, 암, 돼, 지! 돼지도 시집가요? 암퇘지가 여자 돼지죠? 그러니까 시집을 간다고 하는 거죠? 남자 돼지면 장가간다고 해야 하니까, 그렇죠?"
새로 생긴 식당의 간판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 아이.
"왜 시집을 못 갔어요? 안 간 거예요, 못 간 거예요? 안 간 거 하고 못 간 거하고는 다르잖아요. 왜 시집을 못 갔어요?"
아이의 질문은 끊이질 않는다.

"왜 못 갔을 것 같아?"
"으음. 못생겨서 그런가?"
'못생겨서'라는 아이의 말에 쿵하고 무엇인가가 내 가슴을 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못생기면 시집을 못 가는 거야?"
"그렇잖아요. 예뻐야 남자들이 좋아하죠."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아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예뻐야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말.

"그래? 어떤 사람이 예쁜 사람이야?"
"으음, 키도 크고 날씬하고 눈도 아주 크고 으~음 잘 모르겠어요. 맞다. 인어공주가 예뻐요."
"그럼, 어머니는 어때? 날씬하지도 않고 눈도 아주 크지도 않고, 인어 공주하고는 전혀 안 닮았는데. 안경 낀 공주는 어디에도 없잖아. 그럼 못생긴 거야?"
"어머니는 예뻐요. 공주예요."
"그렇지 않아. 정빈이에게 어머니가 예뻐 보이는 것 뿐이야. 정빈이 엄마니까. 물론 내가 못생겼다고는 생각지 않아. 예쁘고 못생긴 것에 대한 기준은 각자 다르니까.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머니는 아주 못생긴 사람이 되거든. 그런데 어머니는 결혼했잖아."

"어머니는 예쁜데요."
"그건 네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고 보일 뿐이야."
"……."
"어머니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으로는 예쁘지 않지만,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고 언니하고 정빈이 처럼 예쁜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잖아. 정빈이 말처럼 예뻐야만 시집을 갈 수 있다면, 어머니는 지금 혼자 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빈이 어머니가 되지도 못하고."
"그래도 예쁘면 좋잖아요."
"물론 예쁘면 좋겠지.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예쁜 외모만이 다는 아니야. 그리고 그 예쁘다는 것도 누가 정한 기준인지 알 수가 없어. 남들은 아무도 예쁘다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나는 이만하면 충분히 예뻐."
"우우우~~ 공주병. 공주 아니라면서……."

"어머니가 널 보고 우리 예쁜 아가라고 말하지만 네 얼굴이 예쁘기만 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지?"
"네, 마음씨도 곱고 어머니의 소중한 딸이라는 뜻이라고 했어요. 그럼 저 암퇘지는 얼굴이 못 생겨서 시집을 못 간 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왜 못 갔어요?"
"그건 어머니도 모르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얼굴이 못생겨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서로 사랑하면 못생겨도 결혼 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어. 예쁘다 못생겼다는 것에 대한 생각도 다 다르지. 그리고 얼굴이 예쁘다고 사랑하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닐 거야."

"아버지도 어머니가 예쁘지는 않지만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결혼한 거예요?"
"아니야,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진짜 예쁘게 생각되었을 거야. 남들 눈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버지 눈에, 아버지 마음에는 예쁜 거지."
"으으으, 닭살. 그래도 예쁜 게 좋은데."
예쁜 공주가 나오는 그림책과 만화 영화에 둘러 싸여 자란 여덟 살 아이이니 당연하지 않겠느냐며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학교의 아이들 생각이 났다. 학기 초 1년 동안 교실에 걸어 두고 볼 달력에 아이들의 사진이 들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주문을 했는데 찾아 온 달력을 펼쳐 들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선생님, 포토샵으로 좀 예쁘게 고쳐 달라고 하지 이게 뭐예요?" 했다.
"사진 수정을 좀 할까하는 걸 그냥 그대로 해달라고 했는데 왜 그래?" 했더니 아이들은 눈은 크고 속눈썹은 길게, 눈썹은 진하게, 얼굴색은 뽀얗게, 얼굴은 작고 갸름하게, 얼굴에 있는 잡티 하나 없게 할 수 있는데 왜 그냥 했느냐며 기껏 만들어 온 내게 투정을 부렸다.

"그럼, 한 명만 찍으면 될 것을 서른 일곱 명이 왜 함께 찍는 거지? 그런 모습이라면 똑같잖아요. 눈 크고 얼굴 작고 갸름한 사진. 누구 사진이죠?

그 사진은 과연 누구의 사진이에요? 선생님은 여러분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달력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눈 크게 만들고 얼굴 작게 만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얼굴로 달력을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물론 예쁘면 좋죠. 선생님도 예쁘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봐도 낯선 사진, 그런 사진을 굳이 찍어야 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일제히 "예쁘잖아요." 했다.
"그럼, 처음부터 예쁘기만 한 배우들의 사진을 어사면 되는 걸 왜 내 얼굴을 찍어서 그렇게 고치는 거죠?"
"그래도 그건 내 사진이잖아요."
"그렇게 고쳐 놓은 사진이 내 얼굴 같던가요?"
"네! 예쁜 내 얼굴요."
"낯선 사람 같지 않아요?"
"그래도 예쁘잖아요."

이미지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아이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찍은 이미지 사진을 사진첩 하나 가득 넣어 두고 펼쳐 보는 것이 취미라는 아이. 그 아이는 과연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아이가 보는 거울 속의 실제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어떤 틀 속에 갇혀진 기준으로 이 사회가 우리들을 위협한다. 이렇게 예뻐야 할 거 아냐, 그런 모습으로 되겠니? 이 정도는 예뻐야지. 눈은 이렇게 크고 쌍꺼풀이 있고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앙증스럽게 예쁘고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얼굴은 주먹만하고,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말이다.

우리 나라 여성의 69%가 '외모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를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외모는 중요한 것이지만 정신과 영혼이 결여돼 있다면 '빈집'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에 공감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우리의 딸들도 나와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일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서점에서 정빈이와 〈종이봉지 공주〉를 함께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자기도 종이봉지를 입어 보고 싶다고 해 쇼핑백을 잘라 입어 보기도 했던, 정빈이가 아주 좋아하는 책이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책을 오랜만에 집이 아닌 서점에서 읽으니 더 색다른 모양이었다.

"♬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만화 영화 빨강머리 앤의 주제가를 함께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그런데요, 앤은 이마가 톡 튀어 나왔어요."

나는 믿는다, 우리 아이들이 예쁜 공주에의 환상을 깨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을. 언젠가는 이미지 사진첩 속의 낯설지만 예쁜 모습에서가 아닌, 진짜 자신에게서 행복을 느끼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삶에 대한 자신감이 그들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