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딸을 팔아야 한 엄마 마음을 아시나요?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4월 21일, 오늘은 과학의 날입니다.

그리고 어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어요.

UN이 정한 12월 3일인 세계 장애인의 날과 다르지요.

과학의 날을 맞아 과학 선생인 제가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제로 잡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오늘 제 이야기는 과학과는 너무 동떨어진, 어쩌면 너무나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장애인의 날을 맞아 아이들과 그것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요?

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반에는 장애인 가족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눈을 마주보며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고 우리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하고 등의 이야기를 차마 할 수가 없어 끝내 그 주제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친정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는 신분증의 하나가 장애인증이고 지금 재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어제 하루는 그 분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어요.

이처럼 너무나 가까이 장애인이라는 이름의 가족이 있으니 아이들에게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더군요.

왜냐하면 그 분은 너무나 소중한 가족일 뿐이잖아요.

혹여 몸이 불편한, 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꺼냈다가 정빈이가 그럼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말하나뇨, 라고 묻기라도 한다며,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몰라서.

그 아이에게 할아버지라는 인식보다 더 강하게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을 굳이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니,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지요.

장애인은 없는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참으로 절실한 날이었어요.

오늘은 제 이야기의 주제는 『제 마음의 장애』입니다.

일주일 전, 저와 정빈이 그리고 친정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자란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니 저 혼자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이 눈시울이 젖어 오네요.

그런 말 들어 보셨어요?

아이를 풀밭이나 나무나 산 등에 판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지난 일요일 시골에 간 것은 바로 "정빈이를 풀밭에 팔기"위해서 였어요.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무슨 이야기냐,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것도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과학 선생이 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이를 판다?

엄마인 저와 인연이 맞지 않아 아이가 여러 가지로 힘들어 하니 다른 곳에 팔아 그 힘든 인연의 물꼬를 바꾸어 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군요.

"엄마와 인연이 맞지 않다. 그래서 아이가 저렇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쉽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말을 듣는 이 엄마의 심정은 어떠한지 과연 짐작이나 할까요?

그 이야기를 맨 처음 들은 것은 정빈이가 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었던 96년 8월이었어요.

5개월 된 아이를 눕혀 두고 17%의 성공 확률이니 아이와 함께 밤을 잘 보내라는 의사를 말을 듣고 어쩌면 이게 이 아이와 마지막 밤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순간순간이 피가 마르는 그 시간에 들른 시누이가 제 가슴에 비수를 박더군요.

용하다는 곳에 가서 물었더니 에미와 연이 맞지 않아 그렇다더라, 에미 잘못 만나 어린것이 이 무슨 고생이냐고, 아이 불쌍하고 그거 바라보는 애 아빠 불쌍해서 어떡하느냐고 펑펑 우시더군요.

그 소리를 듣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제 탓이라는 그 말. 그 한 마디가 제게 준 상처의 크기를 과연 짐작이나 할 수….

그 다음 날 전 아이를 수술실로 보내고 대학로 포장마차에 앉아 술을 마셨었습니다.

대기실에 앉아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대신 전 대낮의 축제에 젖어 있는 대학로에서 술을 마시며 아이를 기다렸지요.

그리고 이어진 병원 생활에서 보여 준 아이의 정말 참담하기까지 한 모습들.

서울에서 아이와 둘이 보낸 병원 생활 동안 제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힌 아이의 그 모습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 아무도 모릅니다.

대구에서 가끔 와서 잠깐 보고 가는 남편, 죽음의 문턱으로 몇 번이나 달려가는 아이를 부여안고 몸부림 쳐보지 않은 그의 가슴에 남아 이는 슬픔. 글쎄요, ……….

그 다음에 이어진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통원 치료.

그 것도 온전히 저 혼자의 몫이었어요. 누군가는 돈도 벌어야 하니까.

계속되는 검사에 지쳐 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흘렸던 그 많은 눈물들, 마취에서 깨지 못한 아이를 안고 병원 바닥에 비친 듯이 뒹굴던 그 순간들.

그 때 마다 울려오는 " 다 에미 탓이란다. 다 에미 잘못 만난 탓이란다."

그 옥죄어 오던, 몸서리쳐지던 그 말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참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더군요.

"젊은 사람이기도 하고 특히 과학 선생님이라 이런 말을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어디 가면 용한 사람이 있어서 한 번 만져만 봐도 그 정도는 깨끗하게 낫는 대요."

대충 이런 비슷 비슷한 이야기들.

제가 어땠을 것 같아요?

아이를 해 업고 좋다는 곳, 용하다는 곳 많이 찾아다녔답니다.

젊은 엄마는 엄마 아니랍니까? 과학선생은 엄마 아니랍디까?

그런데 그런 곳에 가면 대부분이 엄마와 연이 맞지 않아 그러다는 말을 참 만이 듣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아이를 팔아야 한다고.

참 오래 망설이다가 결국은 지난 일요일에 그런 쪽으로 용하다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제가 자란 고향의 강가 너른 풀밭에 가서 아이를 파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제가 그것을 하겠다고 말을 하자 남편은 화를 내더군요.

그런 걸 믿느냐고?

제가 그랬지요.

"이제는 엄마 때문이라는 그 짐을 벗고 싶어.
당신, 한 번만 내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 봐 줘. 아이를 위한다 생각지 말고 당신 아내를 위한다 생각 해. 내가 지고 있는 그 짐의 무게를 당신이 짐작이나 할 수 있어? 물론 효과가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저 내 마음속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아.
이제는 나도 좀 편하고 싶어."

남편은 아이가 그런 의식을 치르는 동안 놀랄지도 모른다며 못내 염려를 하면서도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좀 가벼워 질 수 있다면 해보라고 하더군요.

아이와 함께 살아오면서 제가 아무리 부정을 해도 저게 있어 정빈이는 언제나 아픈 아이였어요.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드는 아픈 아이라는 생각, 아이의 얼굴 뒤로 겹쳐 오는 그 힘들었던 시절의 아이 모습들이 어쩌면 그 아이를 알게 모르게 옥죄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식물들도 키우는 사람의 시선과 그 마음에 다라 성장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하물며 아이야 더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전 자꾸만 제 마음속의 슬픈 잔영들이 섞인 시선과 마음으로 정빈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로는 아무렇지 않게 키운다고는 하지만 제 가슴 속 깊이 각인 되었던 그 모습들을 전 아직 지우지 못하고 안고 살아오면서 정빈이를 자꾸만 내 속에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가슴속에 남아 있는 그런 생각들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저는 늘 아이에게 겹쳐 오는 그 모습들에 때문에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제는 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정말 큰 슬픔의 영상들을 몰아내고 싶었다면 적당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어요.

강가 너른 풀밭에 준비된 음식들이 차려지고 촛불과 향을 켜고 무술인은 장구와 징을 두드리며 열심히 기도를 하더군요.

아이를 데리고 저를 보고 절을 하라고 하더군요.

참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하고 기원을 했습니다.

정빈이는 놀라지도 않고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제 곁에서 절을 열심히 하더군요.

건강해지라고, 쭉쭉 빵빵 크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아이는 엄마를 위해 소원을 빌고 절을 했다고 하더군요.

자기는 이미 너무나 쭉쭉 빵빵 커서 이미 그 소원은 이루어졌으니 대신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했다는 거예요. 어찌나 눈물이 나던 지요.

맞아요, 정말.

정빈이는 잘 자라고 있는데 제 가슴 속 슬픔에 자꾸만 그 아이를 가두어두려고 했었나 봐요.

제가 바로 장애인이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마음의 장애인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제가 어제 예슬이와 정빈이를 위해 책장에서 뽑아 아이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둔 책이 한 권있습니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내 친구들은 내 동생에 대해 가끔 이렇게 묻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아프지 않아?"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귀가 아픈 건 아니야. 하지만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마음이 아주 아플 거야."

My friend ask me about my little sister.
They ask, "Does it hurt to be deaf?"
"No," I say, "her ears don't hurt,
but her feelings do when people do not understand."

한 권에 우리말 번역본과 영문이 함께 들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 관해 『우리 아이, 책 날개를 달아주자』의 「번역은 작가의 마음에 다가서는 것이다」라는 부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
하지만 너무나 사랑스런
동생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저는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앞의 문장과 반대되는 뜻의 문장이 올 때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가 안 들리는 것이 '특별한'이나 '사랑스러운'과 반대편에 서 있나요?그리고 책 뒤에 실린 영어 원문에는 'but'이라는 접속사는 애당초 없습니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은 접속사를 굳이 넣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책 뒤에 있는 영문의 맨 마지막 장은

I have a sister.
My sister is deaf. 가 전부랍니다.

정빈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는 늦잠을 즐기는 저인데 일찍 일어난 정빈이는 시계의 알람을 울려대며 일어나라고 보채더니 아침 준비는 자기가 하겠다며 된장을 끓였습니다.

  

처음 된장을 끓인 날 기념으로 찰칵! 찍은 사진입니다.

두 번째 끓이는 솜씨가 여간 아닙니다.

그러더니 대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고는 말을 탄다며 온 집안을 거의 날아(?)다닙니다.

예전 같으면
'그만해. 너 그러고 또 다리 아프고 팔 아프다고 밤새워 울려고 하지.'라는 말을 했을 텐데, 이제는 그 말을 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속에는 '너는 아픈 아이야. 그러니까 그런 건 안 했으면 좋겠어.'라는 제 생각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연습 중입니다. 지금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 없이 아이의 놀이를 지켜 볼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어리석은 엄마입니다.

늘 그런가 봐요. 기껏 깨달았다 싶으면 그건 너무도 소박하고 평범한 진리라는 걸 알게 되어요.

늘 문제는 내 속에 있다는 것,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