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유치원에 쓴 편지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어머니, 유치원에서 발표회를 한대요. 이 동화 외워야 해요.'하면서 5살된 둘째 아이가 '실로폰'이라는 제목의 동화가 적힌 종이를 내놓았다.

'그런데 저는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해요?' 하며 걱정을 하고. 글자를 모르는 아이는 할머니가 읽어 주시는 것을 듣고 동화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무용을 한다면서 혼자서 엉덩이를 이리 저리 돌려도 보고 하더니 순서를 잊어 버렸다고 짜증을 내고.

유치원 발표회.

나는 아이들에게는 의도된 교육은 가능하면 적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기에 큰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전에 1년만 유치원을 다녔었는데 둘째는 하도 가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지난 9월부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계속 보내야할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유치원 발표회를 한다는 가정 통신문이 온 것이다.

하루에 10번씩 동화를 읽고 외우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난 유치원에 편지를 한 통 보냈다. 내가 현직 교사이기에 그런 발표회가 아이와 선생님 모두에게 얼마나 큰 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선생님께

저는 신나는 반의 윤정빈의 어머니입니다.

발표회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 소견을 말씀 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왜 발표회라는 것이 필요한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5살 아이들이 뜻도 잘 모르는 단어들이 섞인 동화를 외워서 혼자 무대에 올라 외운 동화를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요?

저는 이 나이가 되어도, 직업이 선생이라 매일 아이들 앞에 서서 수업을 하는 사람인데도 누군가를 앞에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할라치면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이 긴장되어 그 순간을 피하고만 싶어지는데 우리 꼬마들의 심정은 어떨지 저는 안타깝습니다.

한글자라도 틀리지 않으려 얼마나 긴장을 할 것이며 강당에 모인 많은 어른들은 그저 몸덩치만으로도 그 아이들을 제압할텐데....

그 발표를 잘해낸 뒤 자신감을 얻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 무대 경험이 큰 상처가 될 아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용을 하면서 아이들이 받는 부담은 또 얼마나 클까요. 순서를 다 외워야 하고 다른 친구들과 보조를 맞추어야하고....

자꾸만 틀려 선생님과 친구들로 부터 지적을 당할 때 아이의 심정은요?

또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연습을 시켜야하는 선생님들의 수고는요?

도데체 아이도 힘들고 선생님도 힘든 이 발표회는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지요?

동화를 왜 아이가 엄마들을 모아 놓고 들려줘야 하는지요? 동화는 글도 잘 알고 어려운 단어도 이해하기 쉽게 풀러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되는게 아닐까요?

저도 현직에 있는 사람이라 학부님들로 부터 이런 편지를 받게 되면 참 마음이 좋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제 글을 용서하십시요."

발표회날

아이들은 대부분 손가락을 입에 물고 쭈뼛쭈뼛 마이크 앞에 섰고 생각나지 않는 단어들을 떠올리느라 힘겨운 모습들이었다.

즐거운 반, 신나는 반의 40명 아이들이 모두 발표를 하느라 시간은 2시간이나 걸렸고 뒤의 차례의 아이들은 그 오랜 시간을 긴장하며 기다려야했다.

그 두 시간동안 아이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