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갑자기 정빈이가 저를 아주 분노에 찬 눈으로 보는 겁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제 책상 앞에서 삐딱하게 서서 저를 노려보는데, 정말 노려본다는 단어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한 참을 서 있던 아이는 왜 그러느냐는 저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서재 문을 닫고 나가버리더군요.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그런 표정을 짓게 했을까 곰곰 나름 생각을 하고 정빈이와 이야기를 하러 방으로 갔더니 아이는 이미 잠이 들어 버린 후 였습니다. 잠이 든 아이의 옆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밤새 잠을 설쳤지요. 아침에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전날 학교 폭력 예방 글쓰기에서 상장을 받아 온 것을 가장 잘 보이는 주방 칠판에다 붙여 두고 남편을 깨워 현장학습 가는데 용돈 두둑하게 주라고 귀띔을 해두고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보, 정빈이 상장 타 온 거 보셨어요? 저기 저기 붙인 거 보이죠? 글쓰기에서 상을 탔대요. 그리고 오늘 현장 학습 가는데 용돈도 넉넉하게 주세요, 알았죠.”
남편도 마치 연극을 하듯이(ㅋㅋㅋ)
“우와, 상장 타왔네. 현장학습 간다고? 소풍가는 거지? 이런 날은 군것질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용돈을 얼마나 줘야 하나? 근데 일어나서 얼굴을 봐야 용돈을 주던지 하지. 아버지 출근하기 전에 일어나면 용돈을 줄 텐데.... 일어났나? 아직 자나?”
그래도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정빈이. 원인은 휴대폰이었습니다.
그 전날 퇴근해 들어오는 저에게 현장학습 갈 때 휴대폰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었거든요. 하지만 그 다음날은 출근 전에 교육청에 들러야 하는 일도 있고 다른 날 보다 통화할 일이 많을 것 같아 안 된다고 했었지요. 그 순간에는 그래도 좀 빌려 주지, 하는 정도의 얼굴을 했었는데 아마 생각해 보니 더 속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정빈이가 서재를 나가고 난 뒤 곰곰 생각을 해보니 휴대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에 깨우면서 휴대폰 못 빌려가서 그러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죠. 모른 척.
억지로 일어난 아이는 저와 눈도 안 마주치고 머리를 감고 말리고 현장학습 갈 준비를 하더군요. 아침도 안 먹겠다기에 억지로 먹으란 소리 하지 않고 저 혼자 다 먹고 식탁도 치워버렸습니다.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 옷을 갈아입는 아이를 불러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는데 아이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않더군요. 저 또한 그런 아이를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고요. 머리를 다 말려주고 블라우스 다림질을 하고 있는데 정빈이가 뒤에서 제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엄마에게 화를 내고 나니 마음이 좀 풀어졌어?”
아이는 제 목을 더 세게 끌어안으면서 거의 업히다 시피 하는 거예요. 다림질을 멈추고 아이를 등에 업고 일어섰습니다. 이제는 덩치가 얼마나 큰 지 업는 게 힘들었지만 한참을 그렇게 업어 주었습니다. 제 등에 업힌 채로 입을 뗀 아이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듬뿍 묻어 있었어요.
“휴대폰... 휴대폰 때문에....”
“휴대폰이 없어서 맘이 많이 상한 모양이지?”
“우리 반에 휴대폰 없는 아이가 딱 두명”
거기서 아이는 숨을 탁 멈추었는데 업혀 있는 아이의 몸도 함께 굳어지더군요.
“너희 반에 휴대폰 없는 아이가 두 명이야? 너랑 한 명이겠네.”
아이는 제 등에서 내려 저와 마주 보고 서더니 이러는 겁니다.
“억울하단 말이에요.”
“억울? 이런 부모,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사 주지 않는 부모에게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는 거니?”
“그게 아니라..... 휴대폰 가난해서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억울하잖아요. 애들이 휴대폰 사서는 자랑할 때... 넌 휴대폰 없지, 뭐 이딴 말 할 때.... 못 사는 게, 살 돈이 없어 못 사는 게 아닌데.... 그게 너무 억울하단 말이에요. 어떤 애는 벌써 몇 번이나 새로 바꾼 아이도 있어요. 처음 사는 아이건 새로 다시 사는 아이건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아세요? 그 애들은 내가 휴대폰 살 형편이 안 되서 못 사는 지 알거잖아요.”
"그거야 네가 이야기를 하면 되지. 돈이 없어서 못사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의 약속 때문이라고. 언니가 중학교 3학년 때 샀기 때문에 그래도 너는 1년 앞당겨 중학교 2학년 때는 살 거라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그냥 자랑하는 아이 이야기 듣고 가만있는 게.... 어쨌든 휴대폰 없는 두 명에 제가 그 중 하나라는 게 얼마나.... ”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더군요.
아이의 감정이 조금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다시 이야기를 하더군요.
“언니 때와는 달라졌다는 걸 생각해야지요. 그 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아이도 적었을 것이고... 언니하고 제 나이가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언니하고 똑같이 한다는 거예요?”
“글쎄다... 너 평소에 차별하는 사람 제일 싫다면서?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면, 언니 입장에서 생각하면 지금 너에게 휴대폰을 사주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텐데... 1년이나 앞당겨 사 준다는 것도 사실 서운할 수 있어. 언니도 그 때 휴대폰 많이 사고 싶어 했었지만 우리가 사주겠다고 한 중3까지 힘들게 기다린 거였으니까.”
“세월이 달라진 걸 생각해야죠, 세월이. 이런 건 똑같이 하는 것만이 공평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금 더 있다가 사주겠다는 건, 그 이유는 너도 잘 알 텐데?”
“알아요. 제가 전화나 문자 잘 조절해서 쓰지 못한 다는 거요. 하지만 그건 제 휴대폰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으니 모르는 거죠? 어머니 휴대폰을 저녁에 잠시 쓰니까.... ”
이런 일이 있었어요. 8월 1일 오후에 휴대폰 문자 온 것을 확인하고 있는데 정액 요금을 다 사용하였다는 문자가 와 있는 겁니다. 1일은 요금이 충전이 되는 날인데. 처음에는 7월 말일에 온 문자인 줄 알았는데 다시 확인을 해 봐도 8월 1일인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정빈이에게 물었더니 제 폰으로 친구들과 전화를 조금, 자기 말로는 조금 오래 몇 통 했는데 그런 문자가 오더라는 겁니다. 한 달 사용할 정액 요금을 하루 만에 다 써버린 거죠. 8월에는 지방 강의가 엄청 많았던 지라 충전 할 수 있는 금액으로 부족하여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도 요금이 없어 걸 수가 없는, 받기만 하는 전화로 버텨야 했답니다. 이런 일이 있었던 지라 정빈이 스스로도 그 일을 이야기 하며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여러 가지로 생각 해 보아도 아직 휴대폰을 사 줄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해. 네가 휴대폰을 산다고 해도 학교도 못 가져 갈 거고. 어차피 내가 퇴근해 오면 그 때 내 폰을 사용해도 충분하잖아? 가끔 친구들과 시내가거나 오늘처럼 현장학습 가는 날, 사실 이런 날도 꼭 필요한 건 아니지. mp없으니 오고가는 차 안에서 음악 듣는 거, 친구들과 문자 주고받는 거 하고 싶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거 때문에 휴대폰을 사고 한 달에 꼬박꼬박 비용을 물어야 한다는 건 너무 낭비라고 생각해.”
“그래도 지금은 너무 속이 상한단 말이에요. 휴대폰 없는 게.”
“그럼 오늘은 내가 빌려 줄게.”
“정말요? 정말 빌려 주시는 거예요? 근데 오늘 전화 하실 일이 많다면서요?”
“그거야 너를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지 뭐.”
그래서 현장학습을 가면서 정빈이는 제 휴대폰을 빌려갔답니다.
“전화가 오면 받아서 공손하게 이영미선생님 폰입니다 말씀드리고 오늘은 제가 어머니 폰을 빌려와서 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없다고 나중에 전해 드린다고 해. 문자도 그런 내용으로 답장을 꼭 보내고. 혹여 급한 일이 있으면 학교로 전화를 하거나 하겠지. 죄송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할 수 없지 뭐.”
그리고 오후에 퇴근해서 만난 정빈이. 평소 같으면 숙제하는 책상 위에 폰이 있을 텐데 하루 종일 가지고 있어서 인지 거실 테이블에 놓아두었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유난히 전화와 문자가 많았던 하루였습니다. 정빈이가 알아서 다 처리를 했다고 하더군요. 저녁을 먹기 위해 마주 앉은 정빈이는 그날 현장 학습 이야기를 하느라고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참을 아이의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물었지요.
“그렇게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어찌나 험악한 눈빛으로 보던 지 무서웠어. 마음 아프고. 그러고 나니 어때?”
“으음~~~ 뭐랄까? 그동안 그러니까 오래, 1년 정도 휴대폰 때문에 쌓이고 쌓였던 게 화악 풀어진 느낌이랄까. 하여튼 속이 후련하고 텅 빈 것 같아요. 홀가분하기도 하고.”
“그래? 그럼 1년에 한 번 씩 어머니에게 화내고 중2까지 가면 되겠다, 그지?”
“그러게요. 큭큭큭”
“그래봤자 1년하고 조금 더 남았어. 중 2, 1월 9일에 사 줄 거니까. 알지? 언니보다 1년하고도 하루를 더 앞당겨 준 거라는 거. 언닌 중3, 1월 10일에 샀으니까. 진짜 너 한테 큰 인심 쓰는 거야. 그 동안은 조금 불편해도 어머니와 같이 쓰자. 친구들이 모두 가지고 있으니 가지고 싶다는 것도 알고 어머니와 같이 쓰는 이 폰을 네 것이라 말해 두어 친구들이 왜 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느냐고 묻을 수도 있을 거야. 난처하고 속상할 때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해. 네가 멀리 가는 일이 있어 연락을 할 일도 거의 없고 집에 전화기 있고 공중전화 콜렉트콜도 이용할 수 있으니 통화를 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물론 친구들과 문자 주고받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건 저녁에 내 것으로도 가능하지 않니? 사진, 동영상, 음악 듣기 등 아쉬운 것이 많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해. 넌 가난해서 못 사는 것도 아닌데 라고 했지만 휴대폰을 사지 못할 만큼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매달 몇 만원의 전화요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야. 집 전화와 휴대폰 3대. 휴대폰 한 대 요금이 삼 만원이라 해도 십 만원에 가까운 요금이야. 그리고 휴대폰 사는 거 요금 내는 거, 그런 비용을 부모가 당연히 줘야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네 용돈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폰 사달라는 소리가 쉽게 나오지 못할 거잖아. 사실 언니에게 폰을 사주고 보니 중3때도 일찍은 것 같았었어. 하지만 아버지가 네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엄마와 의논도 하지 않고 덜컥 1년 앞당겨 사 주겠다 약속을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약속은 지키려는 거야.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없다는 이유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누구나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어.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다른 아이들이 가지지 못하는 것도 많을 거라 생각해. 그게 물건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건 네가 극복해야 할 네 몫이야. 네가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을 부모가 다 해결해주고 풀어줄 수는 없는 거야. 나로서는 너에게 하루 휴대폰을 빌려주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
씨익 웃으며 정빈이가 그러더군요.
“네네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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