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있는 예슬이는 학교에서 11시 30분까지 공부를 합니다. 9시 30분에 야자 마치고 집으로 왔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이지만 아이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습니다. 요즘 내신으로 인해 계속 이어지는 논란들로 인해 기말고사를 준비를 하고 있는 이 땅의 고3 아이들의 마음이 전부 얼마나 고달플까 싶은 것이....
지난 일요일 오후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예슬이는 답답하다며 잠시 외출을 하더군요. 어딜가는 지도 묻지 않고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 돌아온 아이는 방으로 들어서자 대뜸 이러는 겁니다.
“도대체 내신은 어쩐대요?”
“내신?”
“요즘 난리잖아요. 2등급까지 4등급까지 만점 준다하는 학교도 있고 교육부는 난리를 치고...”
“글쎄다. 네가 대학을 가니 너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일이라는 건 알아. 그래서 촉각이 곤두서겠지. 하지만 어머니 생각에는 그 일은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
“어떻게 생각을 안 해요?”
“네가 신경을 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대학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아니면 교육부의 정책을 바꿀 수 있을까? 너무 안이하고 순응적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머니 생각에는 그것에 신경 쓰는 에너지를 공부에 모았으면 해. 어머니가 늘 말 하는 것 중 하나가 네가 신경 써서 되지 않는 일에는 무심하라.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겠는데 지난 번 어머니가 학교 아이들과 함께 수련회를 갔을 때 일이야. 수련원에 가던 도중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어머니 반이 탄 차가 시동이 갑자기 걸리지 않는다는 거야. 운전수 아저씨가 이리저리 애를 쓰시다가 안 되니 다른 차의 운전수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교감 선생님도 걱정을 하시고 다른 반 선생님들도 우리 반 부근에 서성이면서 어쩌면 좋겠냐고 걱정을 하시더구나. 우리 반 아이들도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 하고. 그 때 어머니는 어땠는지 아니? 그냥 가만히 있었어. 정말 그냥 가만히. 그 일로 인해 어머니가 화를 내거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할 수도 있었을 거야.
왜 하필 우리 차가 이러는 거야?
학생들 태우고 먼 길 오는 차가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거 아냐?
도대체 수련원에 어떻게 가라고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등등 말이야. 그리고 어머니가 그렇게 화를 내거나 발을 동동 구르면 우리 반 아이들도 흥분하게 될 거고 37명의 아이들은 속상해하거나 짜증내거나 했을 거야. 그 때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어.
선생님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 그러는 모양이야. 만약 지금 차가 시동이 걸려 우리가 출발하게 되면 혹시 사고가 날 수도 있을지 모르잖아. 잠시 쉬어가라고 이러는 모양이니 잠시 기다리자. 만약에 끝까지 시동이 안 걸리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거야. 하나는 다른 반에 같이 타고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맨 앞에 간 차가 우리를 데리러 오는 거. 수련원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니 그 둘 다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물론 고장이 안 난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용을 쓴다고 해서 자동차가 고쳐질 게 아니니까 그냥 일이 되어가는 대로, 너무 맘 끓이지 말고 기다려 보자, 하고 말이야.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의 담임이 워낙 태평하게 앉아 있으니 운전수 아저씨도 옆에서 걱정해주시던 분들도 좀 머쓱해 하는 것 같더구나.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고 걸리지 않는 문제는 어머니의 영역을 넘어 선 거잖니? 그것으로 인해 속상해 하거나 맘 상해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것이 아니고. 어머니는 그런 경우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끔은 멍청하게 있는 것을 선택해. 그리고 가끔은 아마도 이 일은 다른 더 나쁜 일을 막기 위한 필연적인 작은 일일뿐이라고.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바로 시동이 걸려 차가 출발했었다면 혹시 큰 사고가 났을 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여기서 잠시 가다리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다행이 얼마 후 시동은 걸렸고 우리는 무사히 수련원에 도착할 수 있었단다. 내신 반영에 관한 것도... 으음.... 우리 이쁜 예슬이가 신경을 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그 시간에 차라리 만화 한 권 보면서 머리를 식히거나 공부를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니? 신경 쓰지 마. 너희들과 직결된 일에 대해 무심하라는 것이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참 단순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야. 가끔은 그것으로 인해 손해를 보기도 하지. 어머니가 제일 못하는 것이 체육이잖아. 우리 때는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340점 중에 20점을 차지하는 매우 큰 것이었어. 그런데 하필 그것이 절대 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뀐 거야. 절대 평가라면 그래도 18, 못해도 17점은 얻겠지만 상대평가에서는 그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받을 수 밖에 없었지. 왜 하필 내가 대학 갈 때 이러느냐며 며칠을 끙끙대었다고 한 들 무엇이 변했을까? 그 대신 체력장에서 못 받을 점수만큼 다른 곳에 더 점수를 따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었어. 내신이든 수능이든 결국은 너의 실력으로 받는 점수야.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대학이 달라지 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어머니도 알아. 하지만 지금의 네가 생각할 것은 단 하나 너 스스로의 실력을 키워가는 일이라고 생각해. 신경 쓰지 마. 정말 거기에 맘 끓일 에너지가 있다면 잠이라도 한 잠 더 자는 게 좋아.“
이렇게 시작한 예슬이와 저의 대화는 1시간을 넘게 이어졌고 결국 남편이
“예슬이 엄마, 아이 너무 방해하지 말고 그만 나오시지요.”
하는 채근에 예슬이 방을 나왔답니다.
요즘은 어머니의 정보가 아이의 입시와 직결된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정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교감의 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무심히 가자는 말밖에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까칠할 때가 종종 있답니다.
고3과 고3 엄마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공부하는 데 그냥 둬라.’
아이가 고3이라는 말에 이어지는 말 중 가장 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슬이의 책상에는 며칠 전부터 이런 글이 적힌 작은 종이가 붙어 있더군요.
<공부가 유세냐?>
며칠 전 남편이 퇴근해 왔는데 아이는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 가 아이의 얼굴을 볼 때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더군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제가 일이 있어 밤에 외출을 했다가 늦게 들어 왔는데도 아이는 ebs 강의를 듣는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겁니다. 분명히 제가 들어 온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어른이 외출했다 돌아오면 인사는 해야지 않겠니?”
저는 아이의 등 뒤로 이렇게 한 소리했었습니다. 아이의 등이 한 순간 꿈틀 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물론 제 느낌만 일수도 있을 겁니다. 아이는 강의를 잠시 멈추어 놓고는 저를 향해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하더군요. 그런 아이를 향해 제가 한 소리 더 했습니다.
“아버지가 들어오실 때도 나와서 인사를 했으면 해. 요즘은 아버지가 너에게 인사하러 방에 들어가시잖아.”
아마도 그 때의 일로 인해 예슬이가 <공부가 유세냐?>라는 글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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