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선생님, 휴대폰 하나 마련하시지요?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정빈이가 오늘 무척 신이 났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 싸우더니 요즈음은 언니가 보고 싶다며 화장실의 칠판에다 예슬이 사진 붙여두고 그 옆에 "윤예슬이에요"라고 적고 사랑표(♡)를 두 개나 그려 놓고는 틈만 나면 가서 봅니다.

사진을 제 눈높이에 맞춰 붙였더니

"그렇게 높이 붙이면 제가 눈을 하얗게 해서 봐야 하잖아요."하더군요.

눈을 위로 치뜨고 봐야하는 걸을 하얗게 해서, 라고 표현을 했나봐요.

사랑표를 많이 하지 그러냐고 했더니 두 개지만 크기가 크니까 자기 마음이 다 표현된 거라며 더 그리지 말라면서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언니 사진이랑 자기가 쓴 글씨 때문에 이 칠판에 다른 건 하나도 못하게 하지요.

이 칠판의 쓰임새가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이 칠판의 쓰임새가 있는 칼럼으로 바로 갑니다.)

그러던 차에 진주에 살고 있는 동생네 가족이 놀러를 왔어요.

세 살이 된 사촌 동생 윤서가 와서 함께 노느라 언니를 잠시 잊은 듯합니다.

게다가 막내 이모부가 장난감 휴대폰을 사주었는데 정말 좋아합니다.

윤서와 하나씩 목에 걸고 쫑알거리는 통에 집이 엄청 시끄럽습니다.

우리 예슬이도 휴대폰을 참 가지고 싶어하지요.

가끔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보기도 하고 문자를 넣어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정도입니다.

언젠가 휴대폰에 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웬만하면 휴대폰 하나 사시지요?로 바로 갑니다.)

오늘도 전화기 이야기를 좀 하려고요.

우리 집에는 무선 전화기도 없다. 전화라고는 유선 전화기, 그것도 거실에만 있으니 가끔 불편할 때도 있다.

때르르르릉 때르르르릉

"빈아, 전화 좀 받아."

화장실에 앉은 내가 외친다. 전화를 받은 아이.

"저희 어머니 지금 똥 누고 계시는데요?"

이런, 저렇게 사실대로 말을 하다니. 아이의 목소리가 커진다.

"저희 어머니 똥 누신다니까요? 전화 못 받아요."

이때 상황을 알아차린 슬이가 전화를 바꾸어서는 말한다.

"저희 집에는 무선 전화기가 없어서 지금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는데 번호를 남기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볼일을 다 보고 나오면서 내가 묻는다.

"누구 전화였어?"

슬이는 이때다 싶은가 보다.

"그러니까 무선 전화기가 있으면 좋잖아요. 이럴 때 얼마나 편리하겠어요. 우리도 무선 전화기 사요."

"안 돼. 우리 집이 도대체 얼마나 넓어서 무선 전화기가 필요해. 그리고 무선 전화기 있어 봐.너 맨날 전화기 가지고 니 방으로 갈 텐데. 안 되지."

내가 무선 전화기를 사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크지도 않는 우리 집에 무선 전화기가 있을 필요가 없기에 거기에다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서이고, 또 하나는 10대의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10대에 들어선 아이들은 자신의 내부를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부모가 의식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한 아이의 내면 세계를 알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

거실에 있는 유선 전화기는 아이 생활의 일부분을 알게 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요즈음은 e-mail을 많이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손쉬운 통신 수단은 아직은 전화다.

아이에게 걸려 오는 전화가 대부분 나의 감청 범위 내에 있기에 아이에 대해 좀더 빨리 많은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물론 시간이 좀더 지나면 아이는 공중전화를 하기 위해 나가겠지만 말이다.

- 아줌마의 설렁설렁 잉글리쉬 중 -

그런 이유에서 사진 속의 전화기가 저희 집의 유일한 전화기랍니다.

영어 책에 무슨 전화기 타령이냐 반문하시는 분 계실지 모르지만 책의 마지막 장에 "선생인 제가 부탁 좀 드릴게요"라는 부분에

● 이렇게 조급해서야
● 뭘 위해 영어를 할까?
● 영어는 100점! 국어는 50점!
● 미국애로 키우고 싶으세요?
● 아이 방으로 내몰지 마세요!
● 혹시 간첩?
의 소 제목을 단 글들이 있어요. 그 『아이 방으로 내몰지 마세요!』의 한 부분입니다.

요즈음 세대를 "엄지 세대"라고도 한다지요?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넣는데 열중해 있는 아이들을 표현하는 말이라 하더군요.

아이들에게 있어 필수품처럼 되어 가고 있는 휴대폰.

가끔 수업 중에 휴대폰으로 문자를 넣느라 열중해 있는 아이들을 봅니다.

아이의 부모님들과 통화를 해 보면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학원에 마치고 돌아 올 때 연락을 해야하기 때문에."

"휴대폰을 사주면 마음 잡고 공부하겠다고 하길래."

"집의 전화를 없애고 가족 전부가 각자 휴대폰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

등등 다양한 이유와 접하게 되지요.

학교에서는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은 휴대폰에 목숨을 걸고.

여기서 잠시 삐삐와에 얽힌 이야기 하나 할게요.

제가 90년대 초반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근무를 할 때입니다.

그 때는 삐삐가 유행 할 때였어요.

토요일 1교시 수업을 하는데 운동장 쪽 창가에서 갑자기 삐삐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분명히 삐삐 소리였기에 삐삐 임자는 순순히 손을 들라고 했는데 아무도 안 드는 거예요.

그 때 한창 학생들 사이에서 주점 아르바이트가 성행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저희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던 터였거든요.

주점 등에서 아이들에게 삐삐로 연락을 하면 아이들이 몸이 아프다며 조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한다는 것이지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 학교였기에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이 꽤 된다더군요.

그러던 차에 울린 삐삐라 그대로 넘어 갈 수가 없었어요.

제가 예리하기로 한 가닥 하는 사람이라 수업 중에 울린 삐삐를 찾기로 했지요.

창가 분단의 아이들의 소지품을 모두 검사를 해도 삐삐는 흔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했지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삐삐는 울렸고, 선생님이 분명 책상과 가방, 주머니 등은 검사를 할테고. 나라면?

그 때 눈에 띄는 것이 커튼이었어요.

교실 커튼 생각나시죠?

흰색의 나일론으로 된 주름이 풍성한 교실 커튼.

보통 양쪽에서 주름을 잡아 와서 가운데에 묶어 두잖아요.

'옳지, 저기야. 나 같으면 이런 상황이면 저 커튼의 주름 사이에 던져 넣어버릴 거야.'

그래서 삐삐가 울렸던 중간 쯤의 커튼의 주름사이를 뒤져보았지요.

아, 진짜 그곳에 있더군요.

아이들은 그곳에서 삐삐를 꺼내는 저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고 바로 옆자리의 아이는 목까지 빨개지며 일어서더군요.

그 다음이 뒤집어 집니다.

제가 삐삐가 없었기에 삐삐의 기능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 나 - 누구한테서 온 거야?

◆ 학생 - 친구한테서 음성 들어 왔는데요.

그 다음 저의 말이 압권입니다.

◆ 나 -(아이에게 삐삐를 내밀며)음성 나오게 해 봐.

그 때 그 아이의 너무나 황당해 하던 표정.

잠시 후 아이들의 책상을 두드리며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

제가 무슨 선생입니까? 과학 선생 아닙니까.

과학 선생이 삐삐를 들고 음성 나오게 해봐, 했으니 온 교실이 뒤집어 질 수 밖에요.

황당해 하던 아이는

"삐삐에서 음성 나오게 못하는데요. 전화로 비밀 번호 눌러서 녹음된 내용을 확인하는 건데요."하더군요.

결국 교무실로 가 녹음 된 음성을 들으니 남자 친구가 수업 빼먹으며 학교 공중전화에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내용을 녹음해 둔 거였어요.

자기는 수업 빼먹고 수업 중인 여자 친구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삐삐를 치다니.

휴대폰에 얽힌 이야기 하나 더요.

제가 지금 학교에 전근 온 첫해인 98년도 일입니다.

자퇴를 했다가 복학을 한 아이가 있었는데 수업 중에 휴대폰이 울린 거예요.

그래서 빼앗아 교탁 위에 두었는데 이게 또 울리는 겁니다.

제가 '여보세요'하고 받으니 잘못 걸었나 싶었던지 끊더군요.

조금 있으니 또 울리는 거예요.

다시 받으니 또 끊고.

제가 휴대폰을 끄는 방법을 알았다면 진작에 껐을 텐데 휴대폰이 없는 저이니 얼른 봐서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예전의 삐삐 들고 "음성 나오게 해 봐"의 전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냥 교탁에 두었는데 이게 계속 울리는 거예요.

세 번째 받자 전화를 건 남자 아이

"△△ 휴대폰 아닙니까?"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지금 △△가 과학 수업 중이거든. 나는 과학 선생님이고. 나중에 수업 끝나고 전화하라고 전해 줄게. 누구라고 전할까?"

그런데 이 남학생 놀라지도 않고 자기 이름을 대며 꼭 전화하라고 전해 달라며 전화를 끊더군요.

△△의 부모님은 휴대폰을 사 주면 열심히 학교 다니겠다는 아이에게 졸려 사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요즈음 "선생님, 휴대폰 하나 마련하시지요?"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일이 많아져서 정말 필요할 때 저도 하나 마련할 계획이지만 아직은 휴대폰을 사야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정말 큰 이유가 있습니다.

프로로 일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인지 의아하시죠?

작년에 무료로 휴대폰을 쓸 기회가 생겨 가지고 다녀 봤는데 이게 영 불편합디다.

영업 사원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 하루 종일 있는 사람이니 학교에 있는 동안은 학교 전화로 충분하잖아요.

출퇴근 시간에 잠시 켜두기는 거 말고는 별 쓸 일이 없더군요.

충전시키는 일도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니고요.

혹시 수업 들어 간 사이 누가 전화를 했나 괜히 신경만 더 쓰이고.

정빈이가 건강이 좋지 못하니 집에서 혹여 급하게 전화가 올 수도 있으니 꼭 마련을 하라는 분들도 있어요.

바로 그 이유랍니다.

휴대폰이 있으니 그것으로 집과 연관이 되어 늘 마음의 조금은 집의 아이에게 가 있게 되는 게 이상하더군요.

휴대폰이 없으면 차라리 콱 잊어버리고 밖에서 일을 할 수가 있거든요.

제가 원래 좀 매정합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모성애 결핍증 환자"라는 거 아닙니까!

저는 일을 좋아합니다.

밖에서 일을 할 때에는 정빈이 엄마가 아니라 교사 이영미일 뿐이죠.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두어 달 동안은 자꾸만 울릴 것 같은 휴대폰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집을 나서면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저이지만 괜히 한 통화 해보고 싶고 그렇더군요.

그리고 아이와 통화를 하고 나면 마음이 벌써 집의 아이에게로 가 버려 일에 집중을 하기가 힘들고요.

어떤 책에서는 직장을 가진 엄마는 아이들과 수시로 전화로마나 이야기를 나누라고 하지만 전 일과 집을 좀 엄격히 구분을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기면 휴대폰이 있는 남편에게 연락이 갈 것이고 그러면 남편이 알아서 할 테니 도리어 없는 것이 직장인인 저에게는 더 편하다는 생각이에요.

가끔 연락이 안 된 상태에서 저 혼자 할 거 다 하고 집에 갔더니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거나 상태가 나빠져 남편이나 어머니께서 난리를 치르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휴대폰이 사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실지 모르지만 전 그럴 때마다 휴대폰 없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기도 해요.

전화는 받고 오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 심정 어떨까를 생각해 보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실감나지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 웬만한 일로 제게 연락을 잘 안 하십니다.

당연히 휴대폰 있는 남편에게 연락을 하고 남편과 일을 처리하지요.

물론 제가 꼭 있어야 할 상황이라면 학교로 연락을 하지만 말이에요.

한 번은 응급실 의사가 그러더래요.

이 아이는 엄마가 없냐고?

남편의 의료보험 카드에도 저는 없잖아요. 저 혼자 제 직장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아빠와 할머니가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온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했나 봐요.

아이가 아파 누워 있어도 학교에서 집으로 전화도 잘 안 해 봅니다.

직장에서 전화 해 본다고, 거기서 걱정하고 용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예슬이와 정빈이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일을 좋아하는 직장인이기도 합니다.

휴대폰이 제게는 편리함보다는 집과 직장을 엉거주춤하게 연결하여 저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 같아 아직 구입을 미루고 있는 것이 제가 아직 휴대폰이 없는 절반의 이유이지요.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예슬이 때문이라는 거 아시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