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스로 하겠다 나선 일에 대한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착한재벌샘정 2006. 11. 20. 23:27

책임감이라는 것에 짓눌릴 때가 가끔 있습니다.

책임감.....

어제 저녁부터 정빈이가 열이 많이 나고 무척 아팠답니다. 정빈이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어머니 아플까봐, 기운이 번쩍 나라고 제가 아픈 거예요.”

“어이구, 우리 효녀 고맙군, 고마워. 어머니 기운나라고 아프지 말라고 자신의 몸을 아프게 까지 하는 우리 딸 상이라도 줘야겠네.”

“당연하지요. 그러게 왜 기운이 빠지느냐고요? 그러니까 저도 아프잖아요.”

심장 수술을 한 아이들에게 열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단순한 감기이면 가장 좋겠지만 다른 것들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 결국은 혈액검사까지 하게 되었답니다. 일의 발단은 지난 토요일 정빈이가 어금니를 혼자서 뺀 것입니다. 입안의 상처 등으로도 감염이 될 수 있어 심장 수술을 한 아이들은 치과 치료를 하기 전에 항생제 처방을 먼저 해야 하는데 흔들리는 이를 참을 수가 없던 정빈이가 혼자서 이를 뺐고 하루쯤 지난 후부터 열이 오른 탓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입니다. 정빈이 상태도 많이 좋아져 단순 감기일 것 같아요.

지난 토요일 오후부터 먹는 것이면 정말 좋아하는 제가 입맛이 하나도 없는 것이 자꾸만 기운이 빠지더니 일요일까지 이어져 가족들이 걱정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답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니요.”

“그래도 잘 생각해 봐.”

“귀찮아요. 먹는 것도. 힘들어.”

“어머니 왜 그래요?”

“글쎄다.... 자가 진단에 의하면 심한 무기력증과 약간의 우울증....”

“참나, 큰일이네. 저렇게 가라앉아서야....”

이러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저를 바라보는 정빈이의 두 눈이 충혈이 되어 있다 싶더니 울먹울먹 저에게 안겨 오더니 그 때부터는 열이 펄펄펄....

그 순간 벌떡 일어나..... 그 다음부터는 참으로 숨 가쁜 시간들이 이어졌고 무기력증이고 우울증이고 뭐고... 그 마저도 호강이었다 싶더군요. 지금 정빈이는 남편이 데리고 있고 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랍니다. 정빈이 말대로 엄마 기운 빠져 있는 거 보 싫어 자기가 아픈가 싶기도 해요.

이렇게 저를 힘들 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멘토 활동’입니다. ‘매니저 정, 기억하시죠? 작년에 만나 2년째 저의 멘티인 아이. 고3이라 취업 등 제가 힘이 되어 주어야 할 시기이건만.... 제가 그동안 그 아이를 만나러 가지를 못했었거든요. 보호관찰소에서도 담당자 전화 와서 아이 이야기를 묻고, 대구 KYC에서도 경과통보서를 보내 달라, 공동 프로그램이 있으니 행사에 참여를 하라 등등의 문자나 메일이 오는데..... 그런데.... 정말 그런데....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어느 쪽에도 대답을 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아이를 만나러 가자니.....

스스로 하겠다 나선 일에 대한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저를 참 힘들게 하더군요. 하지만 아이를 만나러 갈 기운은 정말 조금도 저에게 남아 있지를 못하니....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편지를 쓰고 난 뒤 끙끙 아팠던 모양입니다.

우리 탁이 그렇게 보내고 난 뒤, 다시는 아이를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 다짐을 한 저였었는데.... 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다 보니 우리 탁이가 더 생각나고 보고 싶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교육연수원에서 겨울방학 때 독서치료에 관한 강의 의뢰가 들어 왔어요. 우리 탁이와 함께 했었던 독서 치료 과정으로 강의를 두 번 했었는데.... 오늘은 이래저래 우리 탁이를 추억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탁이가 동생 윤호(가명)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매니저 정, 윤호에게 쓴 편지입니다.

  


윤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구나. 그동안 선생님에게 많이 서운했을 거라 생각해.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네.

그동안 선생님에게 일이 많았어. 동생 정빈이가 큰 수술을 했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약을 먹고 검사를 다니고 있는 중이야. 정빈이는 정말 큰 수술을 했는데 첫 번째 수술이 잘못되어 그 다음날 다시 수술을 해야 했었어.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단다. 그래서 그런 지 선생님이 그 후로 건강이 나빠져서 지금까지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단다. 학교에도 나가야하고 정빈이 데리고 병원에도 다녀야 하니 몸져누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정말 그러고 싶은 심정이야.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던 수술이 다시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말에 선생님이 너무 기운이 빠져서.....

사람들은 수술하고 병원에서 퇴원만 하면 모든 게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라는 것이 없었어.

윤호가 어떻게 지내는 지 선생님도 궁금하고 그리고 많이 보고 싶어. 그래서 담임선생님에게 윤호 잘 있는 지도 물어보고 누나와도 연락을 해 보고, 가끔은 윤호 집 부근이나 빵집 부근을 지날 때면 너를 잠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기웃거리기도 했지. 지난번에 친구들과 축구를 하러 가는 지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어. 부를까도 했지만..... 왜 안 불렀는지, 왜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선생님의 마음이 너무 여유가 없었어. 선생님의 슬픔이 너무 컸고, 지쳤고, 힘들어서.... 내 일 만으로도 너무 벅차 쓰러질 것 같은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기에.... 윤호를 만나러 기쁜 마음으로 갈 수가 없었어. 너를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 좋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힘이 선생님에게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야. 너도 그럴 때가 있을 거야. 말 한 마디, 손짓 하나도 힘들 때 말이야. 누군가를 향해 웃어 줄 기운마저 없을 때.....

그동안 선생님이 그렇게 살아왔거든. 그래서 윤호를 만나러 가지 못했던 거야.

추석 연휴 시작할 때 누나에게 너 만나러 갈 거라 연락했다가 너 시골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얼른 다음에 가겠다 해버렸지. 선생님 때문에 괜히 가족들 일정을 변경해야 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지만 솔직히 잘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단다. 억지로 가야겠다 싶어 연락은 했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괜히 너 만나서 잔소리나 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거든. 내가 마음이 편치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쉽게 꼬투리를 잡게 되잖아. 그럴까봐 겁이 났었어. 그래서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던 거야.

그 후로도 담임선생님과 네 친구들을 통해서 너 잘 지낸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으면서 조금만 더 기운을 차리면 너를 만나러 가야지 하면서... 내일은 가봐야지, 내일은 꼭 가야지....했는데 그것이 마음만큼 빨리 안 되더구나.

내가 즐겁고 행복해야 그 기운을 너에게 전해줄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아직은...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어. 너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하고 싶지만.... 우리 윤호 선생님하고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잖아, 그지? 그런데 아직까지 선생님이 그럴 기운이 없어서 말이야. 그렇다고 자꾸만 미루게 되면 윤호와의 사이도 서먹해질 것 같고, 아버지나 누나, 빵집 아저씨 내외분까지 선생님이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왜 이렇게 책임감이 없나 서운한 마음이 크실 것 같아서 우선 선생님의 상황과 마음만이라도 전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거야. 그리고 보호관찰소에서도 걱정을 할 테고.

선생님은 요즘 윤호가 지난겨울 kyc 행사 때 선생님에게 쓴 편지를 거의 매일 읽어 본단다. 보호관찰 기간이 끝나도 계속 만나고 좋은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다던 너의 편지 기억하지? 그게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작년 겨울 팔공산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때 윤호가 선생님에게 너의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다가와 줘서 정말 고마웠었거든.

윤호야, 보고 싶구나. 윤호는 선생님이 안 보고 싶니? 지난 번 민우(가명)를 통해 전화해달라고 해놓고 많이 기다렸었는데.... 용훈(가명)이에게 문자해서 너 잘 지내느냐 물어도 대답이 없고... 그동안 선생님이 우리 윤호에게 소홀해서 많이 화난 거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약속할게. 선생님이 조금만 더 기운을 차리면 윤호를 자주 만나러 가고 지난번에 맡겨 둔 문화상품권으로 영화도 보러가자. 선생님하고 가기 싫음 친구들하고 가게 문화상품권 돌려줄게, 원래 주인이 너니까. 너 한꺼번에 써버릴까 봐 선생님이 맡아 둔거니까. 그리고 윤호가 좋아하는 쇼핑도 같이 다니고 우리 집에도 놀러오고, 알았지?

억지로는 안 되는 것이 있더구나.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해야지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가보려고 해. 정빈이를 낳아 키우는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참 많이 힘들었지만 그 동안 잘 참고 잘해왔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식을 죽음의 목전까지 몇 번이나 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이해해요,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알았지? 부탁할게.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선생님이 아니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너에게 편지라도 쓸 수 있는 거거든.  

선생님이 우리 윤호가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알아주어야 해. 윤호가 선생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조만간 만나는 날까지 건강하길 바래. 보고 싶구나.


11월 18일 윤호에게 많이 미안한 선생님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