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故 김선일님이 저에게 준 선물

착한재벌샘정 2004. 6. 29. 12:35
 친구는 제가 선택한 목걸이를 보더니 몇 초 동안 숨을 쉬지 않더니 이러는 겁니다.

“이걸 하고 어딜 간다 말이고?”

“어딜 가기는, 학교 가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친구는 스스로 체념을 하듯 이러더군요.

“하긴, 너라면 하고 갈 거다.”

 

쇼핑을 하다보면 이런 말을 하게 되잖아요.

“어머, 저 옷은 딱 네 것이다. 너를 위한 옷인 것 같아.”

그런데 친구들은 제게 이럽니다.

“도대체 너의 스타일은 알 수가 없어. 종잡을 수가 없으니 말이야.”

 

친구들 말에 의하면 저에게는 ‘저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입고 싶은 옷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입거든요. 디자인도 극과 극을 달리고 색깔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채색에서부터 아주 화려한 원색까지. 살이 쪄 배가 볼록볼록해도 입고 싶은 것은 거리낌 없이 입고 다닙니다.

“옷은 입는 사람이 어색해 하면 보는 사람에게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아. 반대로 어떤 옷이라도 입는 사람이 그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고 당당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느껴지는 거라 생각해. 날 보고 내 스타일이 없다고들 하는데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이 내 스타일이야. 가끔 남편도 그렇게 입고 나갈 거냐고 물을 때가 있고 아이들도, 특히 단정한 것을 좋아하는 예슬이는 밖에 나가면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할 때도 있어. 하지만 나는 내가 그 날 입는 그 옷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살아.”

 

이러다 보니 자라면서도 저희 친정어머니께 잔소리 엄청 들었답니다. 저희 시어머니는 저의 긴 머리 제일 못마땅해 하시고요.

“아들 에미가 머리가 그기 뭐꼬? 싹둑 자르고 뽀글뽀글 찌지면 좀 좋아.”

얼마 전 앞머리를 자르고도 친정어머니의 꼴 보기 싫다는 잔소리에 배가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ㅎㅎ

어른들 일명 ‘클레오파트라 머리’ 참 싫어하시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리도 말이 많으냐고 하시겠네요.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앞의 칼럼에서 적었듯이 故 김선일씨의 일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이곳 저곳 다른 분들의 칼럼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고 나니 제가 로그인을 한 상태에서 칼럼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러면서 저 스스로를 한 번 되돌아보았습니다.

이곳, 새 칼럼으로 이사를 오고 나니 로그인을 상태에서 다른 칼럼에 가게 되면 방문자에 제 이름이 남게 되도록 되어 있더군요. 저는 글을 참 어렵게 씁니다. 그러다 보니 메일 한 통도 벼르다 벼르다 답장할 시기를 놓쳐 도리어 고마운 메일에 답장을 못 보내는 일이 생길 정도거든요. 사정을 모르시는 분들은 성의 없다 하실지 모르지만 마음을 담아 써야 한다는 일종의 심각한 강박증으로 인한 결과일 때가 거의 대부분이랍니다.

 

꼬리말이 달려도 방명록에 글이 남겨져 있어도 반갑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도 선뜻 쓰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그러다 보니 다른 분들의 칼럼에 글을 남기는 것도 제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저는 항상 다른 분들의 칼럼에 갈 때는 로그아웃을 한 상태에서 가고 그로 인해 방문객에 제 이름 석자가 남겨지지 않도록 무척 조심을 하며 지냈답니다.

아마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제 이름이 다른 분의 칼럼에 남겨진 적이 거의 없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제 기억에는 한 번으로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지난 번 故 김선일씨의 명복을 빌며 쓴 글을 올린 후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칼럼여행을 하게 되었고 한참 후에야 제가 로그인을 한 상태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수 없이 많은 칼럼의 방문객에 제 이름을 남기고 다니고 있음을 알게 되고는 저 스스로 처음에는 무척 당황을 했습니다.

 

그러고 며칠....

저는 참으로 소중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는 것을요.

다른 분들의 칼럼 글을 읽고 글을 남기지 않는다고 저를 탓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저 또한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뿐인데....

저는 이제까지 스스로를 많이도 속박시켜 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분들의 칼럼 글을 읽은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  제 글을 남겨 놓을 수도 있고 글 한 번 남기지 않고 글만 읽고 돌아와도 괜찮은 것을, 저는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하게 묶어 두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제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면서 저 스스로를 착각한 것이지요. 누구에게는 글을 남기고 또 누구에게는 글을 남기지 않고...그럴 수는 없으니 차라리...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를 이제 사 깨닫고 나니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고개를 들 수조차 없습니다.

늘 ‘공유하는 기쁨’을 이야기 하면서 저는 스스로를 공유의 기쁨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었는지요.

 

그런 부끄러운 깨달음, 바로 故 김선일님이 제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저는 너무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제 저는 다른 분들의 좋은 글을 읽기 위해 로그아웃을 하지 않고 즐거이 칼럼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선뜻 꼬리글을 달지도 방명록에 글을 남겨 두지는 못하지만 서서히 제가 가지고 있던 그 틀들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 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참으로 쿠~~~울한 사람이라 착각하며 살았던 시간들이었나 봅니다.


한 때 가끔 찾곤 하던 인터넷의 한 사이트가 있었어요. 그곳에 다이어리라는 것을 쓰게 되었는데 좀처럼 다른 사람의 글에 답 글을 달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제 글을 올린다는 것이 점점 부담으로 생각이 되고 결국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되어 다이어리도 정리를 하게 되었답니다.

‘바빠서’라는 말로 저 스스로를 합리화 했지만 쉽사리 글을 쓰지 못하는 저에게는 정말 큰 부담이었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곳에서도 참으로 좋은 분들과의 인연이 있었는데 저 스스로 너무 부담스러워 하며 지내다 도망쳐 온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답니다.

 

방문객에 제 이름을 남기면서 돌아다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오해 받기 딱 쉽겠는데.”

그러다 스스로 푸하하 웃었습니다.

“이런이런, 이영미 정말 너 겨우 이거였어. 남들이 뭐래든 내가 아니면 된다고 말한 사람이 너 맞니?”

그러면서 제가 가진 그 틀을 부수는 첫 번째 일로 제 칼럼의 메인 화면을 <요리로 만나는 과학 교과서> 표지로 바꾸었습니다.

지금의 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요리로 만나는 과학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또 한 번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주인장의 한마디’의 글을 바꾸려고 합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시면

☜☜<요리로 만나는 과학 교과서>를 꼭 만나 보세요.

과학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지금의 제가 여러분들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랍니다.“

이렇게요.

 

제가 이 책을 쓴 것은 바로 많은 분들께 ‘과학’이라는 행복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분들께 당당하고 자신 있게 이 책을 만나 보시라 이야기할 수 있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이 편지 한통이 도착했습니다. 인천구치소에서 날아온 행복한 편지입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 보낸 답 글을 읽으시고 그 분이 다시 제게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저의 아이는 교통사고였습니다. 뺑소니차에 의한.

그런데 제게 편지를 보내신 분이 그곳에 가게 된 이유가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동안 운전조차 하지 못한 이유는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제 안의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과속 하는, 난폭 운전 하는 차,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제하기 어려운 분노.

하지만 저는 이 분과의 인연으로 인해 제 안의 분노를 조금씩 녹여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