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부부로 사는 것은 배드민턴 치기와 같다

착한재벌샘정 2006. 5. 21. 03:20
 

토요일 저녁을 냉면으로 먹자는 남편의 제의에 같이 장을 보러 갔습니다. 저희 부부가 함께 다닐 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남편은 뒷짐을 지고 저는 남편의 오른쪽 팔에 팔짱을 끼고 걷지요. 어제도 그렇게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을 잡고 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팔짱 말고 손잡고 가요.”

“야~아~가~갑자기 와 이라노?”

"팔짱 말고 손잡자니까요.“

하며 제가 남편의 뒤로 잡은 두 손을 풀고 남편의 손을 잡았습니다.

“어허~ 남들 보면 욕한다. 젊은 아~~들도 아니고....”

“난 젊은 애들도 이쁘지만 나이 많은 부부가 다정하게 손잡고 가는 거 정말 보기 좋던데.... 그리고 남들이 왜 우리를 봐요?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쓰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리고 본 들 뭐 어때요? 어어~~ 손 빼려고 그러죠? 손 빼면 사랑이 식은 거예요.”

남편은 많이 쑥스러워하면서도 저와 맞잡은 손을 빼지는 않고 집에서 꽤 되는 거리에 있는 마트까지 걸어갔습니다.

 

저희들이 일명 ‘닭살 부부’인 거 아시죠? 며칠 전에는 남편으로부터 어린이날 선물까지 받았답니다. 뭔 어린이날 선물? 하시겠죠? 제가 어린이날 아침에 남편에게 그랬습니다.

“선물 줘요.”

“뭔 선물? 니가 어린이냐?”

“내가 말 하지 않았었나? 남편에게 있어 아내는 적어도 백 살까지는 어린이다, 라고?”

“그럼, 거의 죽을 때까지 어린이날 선물 줘야겠네?”

“당연하죠.”

대부분 시장에서 옷을 사는 저에게 남편은 어린이날 선물로 백화점에서 옷을 한 벌 사주겠다고 했고 그 선물을 받기 위해 백화점을 몇 번이나 갔었답니다. 옷이 왜 그렇게 비싼지요? 백화점 간 첫 날 이렇게 외쳐댔습니다. 

“오늘 백화점 가면 매대는 절대 안 볼 거예요. 맨 날 시장 물건 아니면 이월 상품 싸게 파는 매대에서 샀는데 당신이 사준댔으니까 진짜 매장에서 한 벌 쫘악 빼 입어야지. 그래도 되죠?”     

그런데 그렇게 다짐을 하고 갔건만 백화점 가자마자 저의 발길은 ‘파격 세일’이라는 말과 함께 주욱 널려 있는 매대를 향하여!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저를 보고 남편이 이러는 겁니다.

“매대 꺼 안 산다며?”

남편 쪽으로 돌아서며 ‘호호호’ 거리며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아~~~, 이런 이런 매대 본능!!!!

몇 번을 갔지만 맘에 드는 것은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적당히 사려고 하니 썩 내키지 않고. 그러니 주말이나 남편이 일찍 퇴근 하는 날에는 남편을 졸라댔습니다.

“선물 사 주세요. 선물 사 주세요.” 하며 백화점에 가자고 졸라댔지요.

급기야 남편이 이러는 겁니다.

“너 그렇게 졸라대는 것이 영화 말아톤에 나오는 그 아이 같아. 똑같은 톤으로 선물 사주세요, 선물 사주세요, 하는 것이 영판 말아톤 주인공이야. 내가 안 사준 게 아니다. 사라고 했는데도 네가 안 산거야.”

“너무 비싸니까 그렇죠.”

“모처럼인데 그냥 맘에 드는 걸로 사라니까.”

“싫어요. 너무 비싼 옷은 입는 내가 불편해서 안 돼요. 정말 너무너무 맘에 쏙 드는 거면 또 몰라도. 가격 대비 맘에 드는 것이 없어요. 왜 디자이너들은 내가 원하는 옷을 안 만들지?”

“워낙에 유별스러운 것을 원하니까 그렇지. 영~~~ 안되면 차라리 옷감을 떠서 네가 직접 만들거나 디자이너에게 맞추는 건 어때?”

“오늘 한 번만 더 나가보고요.”

“남자들 쇼핑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알아요. 세상 남자 다 그렇대도 그래도 당신은 좋아하잖아요?”

“.... 사실.... 나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

이럴 때일수록 웃으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 절대 흥분하지 말고 성도 내지 말고 애교 만점의 표정으로

“세상 남자들이 다 안 좋아해도 당신은 좋아해야 되요.”

“왜?”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같이 살고 있으니까 자기는 좋아해야해요. 내 말 맞죠? 그러니까 얼른 가요.”

얼떨결에 따라 나서는 남편과의 쇼핑은 그 후로도 몇 번 더 있었고 저는 결국 백화점이 아닌 할인 매장에서 가격도 디자인도 모두 맘에 드는 원피스를 찾을 수 있었답니다. 두 개의 원피스를 두고 갈등하며 남편에게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느냐 물었더니 남편은 아무거나 제 맘에 드는 걸로 하라고 하더군요.

“난 둘 다 비슷하게 맘에 들어요. 난 당신에게 이뻐 보이고 싶으니까 내가 어떤 걸 입었을 때 더 이뻐 보이는 지 당신이 선택해요.”

저는 정말 남편에게 이쁜 아내이고 싶거든요.

 

1988년 12월 24일 결혼을 했으니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희들. 친구는 가끔 그럽니다. 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드라마 궁에 나오는 왕세자와 가수 팀의 얼굴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 멋지고 잘 생긴 두 젊은이보다 열 번을 봐도 남편이 더 잘생기고 멋지다는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어디를 봐서 오십을 향해 가고 있는 남편이 그 청년들보다 멋져 보이느냐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텔레비전에 나오는 청년들이 멋져 보이는 것은 별개라고.

 

이 글 읽으시면서 ‘치이~~~’ 하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마음 잠시 눌러 두시고 끝까지 읽어 주십사 부탁을 드립니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이 기념일을 5월 21일로 정한 데는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네요.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생각이 같은 거? 추구하는 것이 같은 거? 삶의 목표가 같은 거? 같은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는 거?

 

저는 남편을 많이 사랑하면서 한편으로 남편이 많이 고맙습니다. 고마운 이유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저를 인정(?)해준다고나 할까요? 저를 굳이 남편의 방식에 맞추어 바꾸려 하지 않는 마음...

한 예로 저는 식성이 남편과 거의 정 반대입니다. 저는 매운 음식을 정빈이 보다 못 먹고 제일 싫어하는데 남편은 매운탕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는 국수를 먹지 않는데 남편은 국수를 진짜 진짜 좋아합니다. 연애 시절까지 합하면 20년 넘는 세월을 같이 했지만 남편은 저에게 웬만하면 남편 식성 따라간다는데 넌 왜 아직도 국수를 먹지 않느냐고도, 식구들 국수 끓여 주고 혼자 밥 먹는 저에게 그냥 같이 국수 먹고 치우지, 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이 좋기에 남편의 그런 부분도 될 수 있으면 지켜주려 노력을 한답니다.

 

언젠가 제가 부부로 사는 것은 <배드민턴 치기>과 같다는 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왜 우리 그런 경험 있잖아요. 상대방이 거칠게 공격을 해오면 ‘앗, 이것이!’ 하는 마음과 함께 상대를 능가할 정도의 공격을 하게 되는데 상대방이 잘 받을 수 있게 살살 쳐 주면 나도 그래주고 싶은.

어느 날 남편과 배드민턴을 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부부도 이 배드민턴 치기와 같은 것이구나, 하는. 남편이 잘해주면 저도 잘해주게 되고 남편이 날카로운 공격을 해오면 저도 그렇게 맞받아치고. 남편이 공격을 해오니 ‘어쭈구리, 해 보잔 말이지?’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면서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맹공격을 하게 되는. 그렇게 서로 강한 공격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제가 공격을 멈추고 아주 곱게 넘겨줬더니 처음 몇 번은 눈치 없는 남편이 더더욱 신이 나서 맹공격을 퍼부어대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남편의 공격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부부로 사는 것이 누구 한 사람이 승리를 해야 하는 대회나 게임은 아니잖아요. <배드민턴 대회>가 아니라 같이 즐거운 <배드민턴 치기>라는 걸.

 

직장에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일에 욕심을 내다보니 늘 남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남편을 위해 꼭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늦게, 아니면 다음 날 새벽 일찍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을 데리러 가는 일입니다. 밤 12시, 1시, 2시 그 어떤 시간에도 남편의 혀 꼬인 소리로 ‘나 데리러 와’하면 그 길로 달려가 남편을 옆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대리 운전을 해도 되고 택시를 타고와도 되지만 언제든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하고는 달려갑니다. 회사원인 남편, 술자리가 많습니다. 물론 그 모든 날들이 회사 일의 연장이지는 않을 겁니다. 워낙에 잡기에 능하고 친구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힘든 일이 많았던 날 지치고 기운 빠져 있을 때, 한 걸음 떼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 때 아내가 자기를 마중 나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그리 큰 힘은 되어주지 못해도 조금은 위로가 되어 줄 것 같아서요. 남편 주변에서 그런다고 하네요. 술 마시고 늦는 남편 도대체 뭐가 이쁘다고 이렇게 전화만 하면 달려오는 지 저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럽다고.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대답을 해주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럴 경우 남편이 저를 데리러 오면 정말 좋을 것 같거든요.’라고.

 

결혼하는 동생들에게 늘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네가 남편에게 해주어라. 그리고 남편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해라.‘

저는 남편이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남편에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남편이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가끔 혼자 여행을 하고 싶기에 남편에게 가끔 여행을 다녀오라고 합니다.

저는 남편이 저희 친정 부모님에게 잘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무척 크기 때문에 남편도 똑같을 거라는 생각에 시어머니께 잘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남편이 가끔 장미꽃을 사오는 등의 이벤트를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남편 마중을 가면서 장미꽃다발을 안고 가기도 합니다.

저는 남편이 예쁜 스카프를 사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에 남편에게 멋진 넥타이를 선물합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당신만큼 이쁜 여자는 없네’라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에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봐도 당신만큼 잘 생긴 남자는 없네’ 라고 말해줍니다.

저는 제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그 어떤 시간에 들어 와도 이해하고 믿어주기 바라기 때문에 남편에게 왜 이렇게 늦었느냐, 뭘 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저는 남편이 제 월급이 그것 밖에 안 되느냐고 하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아 돈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텔레비전도 못 사고 결혼해 단칸방에서도 살았고 아파트 중도금을 내지 못해 연체를 해야 했던 적도 있지만 그럴 때 일수록 남편이 마음 아파하지 않게 무진 애를 썼답니다. 남편이 제게 돈 좀 많이 벌어 오지, 하는 말을 하면 제 기분이 어떨까를 생각해 보면서요.

저는 제가 화가 많이 나 있을 때 남편이 자꾸 뭐라 그러면 뚜껑이 열릴 것 같아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잠시 입을 다뭅니다.

저는 제가 큰 실수를 했을 때 남편이 화를 내기 보다는 그럴 수 있다며 다독여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남편의 실수에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가끔 너무 귀여워요.’

저는 남편이 남들에게 제 흉을 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남편 흉을 보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부작용(?)도 따르더군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남편이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남편인줄 오해하는 겁니다. 남편 아는 사람들이 제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내인 줄 오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굳이 해명하지 않고 그냥 웃음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똑같다고 생각해줘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나도 하고 싶다는 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당신하고 똑같이, 꼭 그만큼 하고 싶다는 거. 당신이 싫은 거 나도 꼭 그만큼 싫다는 거. 당신 친구만나고 놀고 싶은 만큼 놀아요. 당신 대학원 다니는 거 이해해. 왜냐하면 나도 그렇거든. 하지만 우리 둘 다 놀고 싶은 거 놀고 공부하고 싶다고 나도 대학원 가면 우리 아이들은요? 내가 퇴근해서 땡하면 집으로 달려오는 거, 놀 줄 몰라서 놀기 싫어서가 절대 아니에요. 나도 대학원 가서 공부 계속하고 싶어요. 당신만큼 꼭 그만큼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우리 아이들, 우리 가정을 위해 내가 양보하고 참는 거라는 거 당신이 알아야 해요. 당신이 언젠가 그랬죠? 우리 가정이 행복한 건 당신이 많이 양보하고 노력해서라고. 그것도 똑같아요. 당신이 양보하고 노력하는, 꼭 그만큼 나도 그런다는 거, 그것만 잊지 않음 돼요. 내가 일찍 오는 대신 다른 부분에서 당신이 많이 애쓴다는 거 아니까, 그거 아니까 나도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산다는 거.”

 

너무나 긴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부부의 날을 맞아 선물 하나 드릴게요. 부부가 함께 김형경의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중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책 사진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가져 왔습니다>

 

1997년 제 28회 동인문학상 수상집에 수상작인 신경숙의 <그는 언제 오는가>와 함께 실렸었는데 1999년 <90년대 대표작가 중단편소설 선집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에 첫 글로 실린 글입니다. 두 책 모두 절판이 되어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한 남자가 운전을 하고 있고 그 남자 곁에 이혼한 전처가 앉아 여행을 가면서  서로 나눈 대화를 담은 책입니다. 남자의 이야기가 열 쪽 정도 있고 다음에 여자의 이야기가 열 쪽 즈음, 그 다음엔 또 다시 남자의 이야기...이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각각 세 번씩 있는 소설입니다.

이혼을 한 후 여자가 암에 걸린 것을 알았고 수술을 앞두고 옛 남편에게 개심사라는 절에 같이 가 줄 것을 부탁해 함께 가는 차 안에서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같이 살 때는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지요. 남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머 어머 우리 남편도 이렇겠구나. 진작에 이 글을 읽었으면 남편을 조금 더 이해 할 수 있었을 텐데...’를, 여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래, 바로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어쩜 어쩜’을 연발하며 읽은. 그래서 지금도 가끔은 다시 읽어보고 있는 글입니다.

 

이런 내용이 있어요.

아내가 이야기 합니다.

신혼 초에 몇 번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에게 점심 때 뭘 먹었는지 물었는데 남편은 귀찮고 짜증난다는 말투로 생각나지 않는다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양말을 벗어 내던지는 것과 똑같은 투>로 말을 했었다고. 그렇지만 아내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고. 거기에 맞춰 다음 날 아침 식단을 짜고 싶었기 때문에. 탄수화물만 너무 과잉섭취하는 건 아닌 지, 단백질은 어떤 지. 주부들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대체로 그런 식일 거라고. 당신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남자다움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고.

 

남편은 말합니다.

내가 그렇게도 무심한 남편이었느냐고, 말없이도 당신이 이해해주리라 믿었었다고. 퇴근해 아내의 일상을 들어주는 것이 부부간의 대화라는 걸 알고 있지만 밖에서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걸 정리해 결제를 받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당신이 점심에 뭘 먹었느냐 물었던 것도 기억하고 그 때의 당신 마음도 모르지 않았으나 정말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고. 샐러리맨의 점심에 먹을 수 있는 비슷비슷한 메뉴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성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것까지 기억할 만한 의식의 여분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다고.

 

그런데 이들 부부는 함께 사는 동안에는 그 이야기를 서로에게 꺼내지 못했고, 그런 비슷비슷한 일들이 쌓여 결국은 이혼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뒤집어 입은 팬티를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아내. 그런데 그날 남편은 바이어와 너무나 중요한 약속을 해 놓고는 사우나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잠이 깊이 들어버려 약속시간을 넘겨 깨어났고 팬티가 뒤집어져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입고 달려 나갔고 그 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가 너무 커 그 상황을 설명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는데.... 차라리 화를 내며 따지기라도 했더라면 자초지정을 설명했을 텐데 아무 말 없는 끝끝내 교양 있는 태도의 아내가 너무 싫었던 남편.

남편이 말합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교양 있는 아내와 사는 거, 정말 힘드오. 집안 살림이 반들거리는 거, 불편하지. 그게 우리 결혼할 때 약속한 분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초 이파리를 하나하나 면수건으로 닦고 있는 당신을 보면 가슴이 뭉근하게 끓어오르곤 했소. 내가 밖에서 겪는 갈등을 조금이라도 짐작이나 한다면 저렇게 한가로이 화초나 가꾸고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부부는 이혼을 한 후 처음으로 자신들 속에 꾹꾹 눌러 두었던 이야기를 하지요.

     

마지막 6번째 여자의 글 중 일부입니다.

 

<결혼 생활이란 이런 여행 같은 걸 거예요. 차를 타고 밤길을 달리기도 하고 안개나 진눈깨비를 맞기도 하고, 이렇게 차를 비탈 아래 처박기도 하고.... 문제는 차창 밖의 사물들에만 정신을 팔아 정작 옆좌석에 동승한 사람에게는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걸 거예요. 차를 버리고 걷게 되어서야 비로소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그 절이 나올 거예요. 개심사. 개심사 하면, 마음을 바꾸는 절이라는 느낌이 먼저 와요. 그런데 거기 현판에는 바꿀 개(改)자가 아니라 열개(開 )자로 표기 되어 있어요.

(중략)

여보, 우리 참 많이 살았죠? 나도 벌써 마흔이에요. 불혹이란 외부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라 어떤 유혹도 유혹으로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아닌가 싶어요. 같은 말인가요? 한 때의 꿈도, 타오르던 열정도 시나브로 사위어가는 나이 같아요. 당신은 마흔 셋. 인생의 3분의 2를 산 셈이죠.

당신, 요즈음도 양말을 도르르 말리게 벗어두나요? 바지를 입을 때 왼쪽 다리부터 꿰고, 면도 후 로션을 바를 때는 늘 턱 밑만 바르고, 아직도 신호 대기에 서 있을 때면 검지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는 버릇이 있나요?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거. 이제야 뭐, 그런 사소한 것을 기억하는 게 관심이고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요. 당신에 대해,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요. 그러고 보니 우리 참 많이 살았죠? 참 많이 살았는데, 돌이켜보면 시간이 뭉텅 잘려 나간 것 같아요. 그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