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빗속에서 정빈이와 북한 축구팀 응원했어요

착한재벌샘정 2003. 8. 31. 14:28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방학 마지막 한 주는 정말 느긋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그것도 마음만큼 되지 않더군요.
금요일 아침 일찍 서울 갔다가 토요일 새벽 2시가 되어 돌아왔더니 어찌나 피곤하던지 어제, 토요일에는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가 유니버시아드 대회 중 북한과 일본의 여자축구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는데 깜빡하고 있었지 뭡니까.
제가 유니버시아드 경기동안 아리랑 응원단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 경기 응원을 가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경기가 오후 3시부터여서 점심 겸 아침을 먹고 식구들을 채근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정말 가고 싶지만 선약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고, 예슬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육상 경기 응원을 가겠다고 싫다고 하고, 총각도 여자 친구 만나는 중이라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이 사람들이!!!"하며 잠시 흥분을 했었습니다.

남편 - "그런 것은 미리 이야기를 했었어야지."
예슬 - "갑자기, 그것도 이렇게 비가 오는데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해요."
총각 - "그런 말 없었잖아요. 결승전이라고 해서 저는 마지막 날인 내일 인줄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이러니 미리 이야기하는 것을 깜빡한 잘못이 가장 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정빈이와 둘이서 가게 되었답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남편이 시민운동장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었습니다.

어쩌면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저도 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세 사람이나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핀잔을 주니 어디 갈 기분이 났겠습니까만은 비가 오니 혹시라도 안 오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니 나라도 가야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번 대회 동안 정빈이를 한 번도 경기장에 데리고 가지 못한 것도 아쉽고 해서 적지 않은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찾았는데 아마 저처럼 비가 오니 더욱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신 분들이 많았는지 정말 많은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정빈이와 함께 다른 응원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열심히 응원했답니다. 비에 젖어 손이 목욕탕 갔을 때처럼 퉁퉁 불었지 뭡니까?
정신 없이 소리지르며 응원하다가 문득 옆에 앉은 정빈이를 보니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겁니다. 왜그러냐하고 했더니 마치 어른처럼 혀를 끌끌 차며"이러니 풍선을 7개나 터트리지. 왜 안 그러겠어요." 하는 겁니다.

한겨레21의 기자가 서울서 내려와 직접 응원단이 되어 취재하고 쓴 기사 중에 저의 응원모습도 몇 줄 적었더군요.

500여명가량 입장한 아리랑응원단을 둘러보니 눈에 띄는 분들이 많았다. 어린 여중생들 사이에 끼어 75살의 ‘운동권 할머니’ 한기명(범민련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의장)씨는 경기 내내 한반도기를 흔들며 구호와 노래를 지치지도 않고 부르셨다. <한겨레21> 논단의 필자인 이영미(경상여중 교사)씨는 응원에 도취된 나머지 기다란 응원용 풍선을 너무 세게 움켜쥐고 두드리다 7개나 터뜨리는 바람에 계속 새 풍선을 공급받아야 했다.

(기사 전문으로 바로 갑니다. )

남들이 보면 제가 무슨 천하장산 줄 알겠어요, 그죠? 하긴 제가 기운이 세기는 정말 센가 봐요.
어제 응원에서도 제가 목소리가 워낙 크니 옆에 계시던 남자 분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 있죠. 아마 속으로 그랬을 겁니다.
'이 아줌마,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이 번 대회동안 북한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많았지요.
예슬이는 이 번 대회를 통해 북한이 싫어졌다고 합니다. 대회 참가 논란부터 시작해 언론에서 마치 북한 선수들만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도 마땅치않고, 북한 응원단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호의적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북한이 싫다는 주장을 펴더군요.

집에 손님이 왔는데 한 사람에게만 더 특별 대우를 해주고 그 사람에게만 유난한 관심을 가져주면 함께 온 손님들 기분이 어떻겠냐고, 다 똑같이 운동 경기를 하러 온 동등한 입장일 뿐인데 왜 북한 선수들과 응원단에게 그렇게 야단인지, 다른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서운하고 불쾌할 거 아니냐고. 그렇게 되면 그 많은 다른 나라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겠냐며 그것으로 인해 잃게 되는 것도 많을 거라며 흥분을 하기도 했답니다.

순수한 대학생들의 스포츠 축제가 마치 남북한의 운동회처럼 비쳐져버린 감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동감할 겁니다. 아이들 눈에도 이렇게 비치는데 전쟁을 경험한, 아이들과 북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다른 어른들에게는 어쩌면 그 이상으로 비쳐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커지지 못한다면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똑같은 팔 길이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안으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가 아이를 감싸 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포옹의 모습이 됩니다.

제가 이번 응원단에 참여를 한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일단 아이들에게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봉사'에의 경험을 가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치르는 국제적인 경기이니 만큼 '참여'에도 의미를 두었고요.

여러 자원봉사가 있었는데 왜 하필 북한 선수 응원이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자원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꾸만 미루다가 너무 늦게 참여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그것말고는 남은 게 솔직히 없었습니다."

이 번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경험하면서 예슬이는 위에 적은 것처럼 북한이 싫어졌다고 하고 총각은 경기장에서 열심히 응원했던 추억과 북한 사람들을 직접 본 것이 신기했다는 느낌을 이야기합니다.
정빈이는 일기장에 쓸 것이 생겨 기쁘고 비 오는 날도 축구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엄마가 진짜 흥분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떤 목적으로 참가하였든 개인이 느끼고 자신에게 남겨두는 것은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 나쁘다, 큰 것이다 작은 것이다라고 잘라 말할 수도 없겠지요.

저 개인은 이번 일로 인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경기장에서 만난 많은 어르신들을 보고 가장 많이 놀랐습니다. 붉은 색의 응원복과 두건을 쓰고 북한 선수를 응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은 솔직히 처음에는 낯설기까지 했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했을 연세인 저분들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여기 오셨을까?

몇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세상이 변하는데 나도 변해야지. 미워하고만 있다고 뭐가 되나. 결국 우리 힘으로 통일해야 할꺼 아이가. 쟈들이 우리 민족이라고 인정해야 통일 할 마음도 나제."
참 의미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을 한 민족이라 인정해야 통일할 마음도 생길거라는 말씀.

또 하나 참 낯설게 느껴진 것이 있었는데 바로 북한 응원단들의 들썩이는 어깨춤이었습니다.
정말 '덩실덩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어깨춤.
칠팝십 할머니들이 흥겨운 잔치에서 보여주실 그런 어깨춤을 너무나 젊은 아가씨에게서 보게 되니 정말 낯설더군요.
그건 정말 우리 춤인데, 그게 젊은 사람이 춘다는 것으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의 20대 아가씨들이 신나고 흥겹다고 그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춘다는 상상, 여러분들은 되시는지요?
분명 우리 것인데 낯선 느낌에 당혹스러움을 어쩌지 못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지요.

그리고 또 하나 경기장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보이지 않은 젊은이들의 열심과 노력이었습니다.
심심찮게 '요즘 젊은 것 들'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면서 쉽게 '요즘 젊은…'을 운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로 막을 내리는 유니버시아드 대회.
아이들이나 저나 이 번 경험을 통해서 쬐끔이나마 마음의 어딘가가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