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초등1년생 방학 첫날 우리 집 풍경

착한재벌샘정 2003. 7. 25. 07:31
정빈이가 드디어 어제 종업식을 하고 오늘 방학 첫날을 보냈습니다.

어제 내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나면 되냐고 묻기에 네 마음껏 자보라고 했는데습관이라는 것이 무섭긴 무서워요. 보통 때와 똑같이 일어난 걸 보면 말이에요.

방학이 없는 남편 때문에 저희 집의 아침은 5시 30분에 시작을 합니다.
산에 가서 매일 물을 떠오는 부지런한 남편 덕분에(때문에가 아니고?) 저희들 모두 덩달아 움직이는 수밖에 없는 거죠.

정빈이는 오전 10시에 학교에서 하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왔어요. 방학중에도 화요일과 목요일에 레슨이 있다는군요.
정빈이는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바뀐 적 없던 꿈이었던 "화가"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바뀌었답니다.
저도 뜻밖이었답니다. 정말 꿈이라는 단어를 알고 난 뒤부터 화가에서 바뀐 적이 없었거든요. 화가에 다른 것이 덧붙긴 했어도 이렇게 바뀐 적은 없었기에 내심 놀란 것이 사실입니다.

정빈이는 다음 주 화요일부터 저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겠다는 엄청난(?) 방학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가 배웠던 그대로 아주 잘 가르쳐주겠다는데 정빈이의 조그마한 바이올린을 저의 이 큰손으로 든다고 생각하니 부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는 피아노도 못 치는데 언젠가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에게 바이올린부터 배우라더니 진짜 가르치겠다네요.

정빈이는 꿈은 바뀌었지만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기에 가게에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오면서 미술 학원 전화번호를 외워왔다면서 전화해보라고 합니다. 내일 미술학원에 가보자고 약속을 해두었습니다.
설마 제가 학원이라면 절대 안 보내는 사람으로 알고 계시는 건 아니시죠?

방학 때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첫 번째는 빈둥빈둥 노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엄마랑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오늘도 영어 공부하자는 것을 제가 바빠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정빈이 친구들이 영어를 잘하는 가 봐요. 시샘이 많은 아이라 자기도 잘하고 싶다면서 혼자 말로 너무 기대된다고 하는데 제가 잘 해줄지 의문스럽습니다.
물론 가르친다기보다는 함께 공부하는 것이겠지만요.

선배와 전화하면서 제가 바빠서 요 며칠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정빈이가 이럽니다.
"우리가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해요? 잘 놀고 있는데."
눈물나게 고맙더군요. 흑흑흑

지금 정빈이는 언니와 함께 케이크를 만드느라 몹시 분주합니다.
더워서 선풍기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달걀 거품을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희 집 요리사인 예슬이입니다.

정빈이는 언니의 조수 노릇을 열심히 하면서, 절보고는 군침이 돌지 않느냐며 열심히 제 방과 주방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예슬이는 어제 동성로에서 있었던 책 퀴즈에 도전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옆에서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갔었고, 혹시 엄마가 옆에 있으면 신경 쓰일까 봐 저는 정빈이와 백화점에 들어 가 피해있었어요. 끝나고 만난 아이는 아는 거였는데 너무 긴장이 되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며, 무지 헷갈리더라며 어찌나 아쉬워하는지 그 모습이 안쓰러워 혼났어요.

그렇게 안쓰러우면서도 어제 저는 예슬이를 심하게 꾸짖었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퀴즈의 정답을 맞추지 못한 아이가 저에게 한 말이었어요.
그 말에 제가 무척 화를 냈습니다.

"그게 왜 엄마에게 미안해?
엄마는 학교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이런 상황에서 너무 화가 나.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해 선생님께 죄송하다,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들을 때 지금처럼 화가 나.
학교 아이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성적도, 퀴즈도 왜 엄마나 선생님에게 미안하다는 거야.
물론 기대를 했을 텐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 저변에는 그것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었다고도 볼 수 있어.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라는 생각이 중요 해. 만약 그 일에 실패를 하면 자기 자신에게 가장 미안해야하는 거 아냐?
마치 엄마를 위해서 선생님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 같은 느낌에 너무 화가 난다는 거지.
그리고 이 말을 하면 너 마음이 많이 상할 거라는 거 알면서도 해야겠어.
기껏해야 책 한 권이야. 그 동안 시간이 적지 않게 있었고. 완벽하게 외워도 외울 수 있지 않았을까? 네가 준비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를 생각 해 봐. 무엇엔가 절절하게 몰입하는 것, 중요한 거야."

예슬이가 무척 마음이 상했겠지요?
평소 때 같으면 그렇게 아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데 어제는 그렇게 말을 해 아이의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들었답니다.

제가 이번 방학에 예슬이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기라는 것을 인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제가 그렇게 모질게(?) 이야기를 한 것은 앞으로 방학 동안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 생각되는 것에 몰입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는데 아이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내내 말이 없더군요. 저 혼자서도 마음이 상했는데 아마 평소 같지 않게 엄마까지 자기를 몰아세운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겁니다.

사실 문화유산답사기 3권은 예슬이에게는 많이 어려운 책이지요. 세 권 중에서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책입니다. 굳이 가장 어려운 3권에 도전을 해보라고 권했던 것은 퀴즈에의 참여도 목적 중의 하나였지만 아주 어려운 내용의 책을 약간 무리해서라도 읽고 나면 다른 책들이 한결 가볍고 쉽게 다가옴을 경험했기에 예슬이도 그런 경험을 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었어요.

책이라면 자신해하던 예슬이도 이번 퀴즈에 참가하면서 여러 새로운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중에 아마 제가 한 말의 충격(?)이 가장 센 폭탄이었겠지요.

오늘 방송국에서 그 프로 담당 PD를 만났는데 중학생이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할만하다며 아이가 속상해 울지 않았냐고 칭찬과 걱정을 함께 해주시더군요.
그 말을 전했더니 아주 기뻐하는 것을 보니 어제 마음이 많이 상하긴 했나 봐요.

잠시 물을 마시러 나갔더니 케이크가 구워지길 기다리며 둘이서 주방의 오븐 앞에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열기 때문에 온 집이 후끈한데 뜨거운 오븐 바로 앞에서 뭘 그리느라 저리 열심인지. 아이들이란, 정말.

앞으로 방학 동안 집에서 하루종일 셋이서 이렇게 복닥거리며 하루 하루를 보내겠지요.

한 대 뿐인 선풍기 때문에 싸우고 있는 중이라 제일 먼저 선풍기를 한 대 더 구해야겠습니다.
남편 직장 동료 집에 안 쓰는 것이 있다고 해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오늘도 깜빡하고 안 가져왔기에 화가 나서 선풍기를 제 방으로 가져 와 버렸습니다.

"내가 이 집의 왕공주니 이 선풍기는 내가 가져 갈 거야."

셋이서 황당한 모습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남편 때문에 두 아이까지 선풍기 없이 덥다고 난리 중 입니다.ㅎㅎㅎ

여기까지 쓰고 난 뒤 1시간 후의 모습입니다. 아래 독자란의 글도 쓴 그 이후지요.

정빈이가 영어 공부를 하자고 졸라대는 통에 정빈이가 좋아하는 책을 꺼내 함께 놀았습니다.

선풍기를 뺏기고 난리(?)를 치던 남편이 급기야 에어컨을 트는 바람에 위의 사진에 보는 것 처럼 베란다 문을 닫고 모처럼 버티칼까지 친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다시 1시간 후,

정빈이의 옷 차림 보이시죠?
이 삼복 더위에 아래 위 내복을 입고 있는 중입니다.

에어컨 바람에 덜덜 떨더니 급기야 코맹맹이 소리를 해대면서 춥다는 겁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에어컨을 끈 상태랍니다. 남아 있는 냉기에도 추워가지고는.....
예슬이는 에어컨 켰다고 좋아하다 말았답니다.

이러니 선풍기 빨리 구해야겠다는 제 심정 이해하시겠죠? 이사하면서 너무 낡은 것을 한 대 없앴더니 정말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