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부모 강박증에 걸린 건 아닐까?
5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중에 계신 친정 아버지께서 지난 토요일에 5년만에 시내 외출을 하셨습니다.
"그기 어디 있노?" "한일 극장 기억하시죠? 지금은 새로 건물을 지어 많아 달라졌어요. 그 옆에 아주 큰 서점이 있어요. 교보라고. 어디쯤인지 아시겠어요?" "안다." 귀를 쫑긋이 세워 입 모양을 보며 집중하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아버지의 말씀에서 떨림이 느껴졌습니다. 아버지의 외출 행선지는 바로 제 책을 구경하기 위해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교보서점이었어요. 교보의 베스트 순위에 올랐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솔직히 무척 기뻤습니다. 그 순위라는 것이 그리 큰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난 13일, 선거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교보에 갔을 때 베스트코너에 올라 있는 책을 직접 보니 괜시리 가슴이 뛰더군요. 지난 번 사진 때문에 창피를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편도 첫날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볼 때와는 달리 사뭇 흥분된 얼굴로 기뻐해 주었어요. 그런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나는 얼굴이 친정 아버지였어요. 이걸 보시면 참 좋아하실 텐데……. 그래서 토요일 출근길에 어머니께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시내 서점에 가보시겠냐고 했더니 어머니께서도 너무 좋아하시더군요. 토요일이라 남편은 정빈이를 데리고 태어난 지 보름쯤 되는 강아지를 보러 시골에 가고 없어 친정부모님과 예슬이가 함께 갔었어요. 아침부터 한 올도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면도를 해달라시며 딸의 책이 꽂혀있는 서점에 간다는 설레임으로 들떠 계셨다는 아버지. "아버지, 오늘 억수로 예쁘시네요?" 평소보다 더 강한 액센트의 사투리로 아버지의 모습을 칭찬해드리니 "이쁘나?"하시고는 늘 그런 것처럼 찾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정빈이는? 밑에 차에 있나?" 아마도 제게 있어 가장 큰 응어리를 그 한마디로 어루만져주시려는 게 아닌가 싶어 그 물음에 대한 제 대답은 언제나 목이 매입니다. "정빈이는 윤서방 따라서 시골에 강아지 보러 갔어요. 강아지가 여덟 마리나 태어났거든요." 어머니께서 준비가 덜 되었다는 데도 먼저 내려가 차에 앉아 기다리시던 아버지. "저기예요. 저기 맨 위에 왼쪽에서 두 번째, 보이세요? 각 부문별로 나누는데 여성 부분에서 2등이라는 의미예요." 아버지는 눈물만 글썽이실 뿐 아무 말씀도 않으시더군요.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어도 끝내 말씀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 곁에서 그 순간부터 제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은 부모』 입니다.부모가 되어서 해 준 것도 없는데……. 과연 부모는 무엇을 해 주어야 할까요? 무엇을 얼마나 해 주어야 "좋은 부모"일까요? 자식 앞에서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며 눈물지으시는 저희 부모님은 "좋은 부모"일 수 없을 까요? 부모님에 관한 생각을 적어 놓은 책 중에 기억나는 책이 있어 책꽂이에서 뽑아 보았습니다. 「학문의 즐거움」입니다. 작가는 책의 앞부분에 부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밑줄 친 맨 마지막 글에서 저의 눈과 생각이 한참 머물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중간 중간에 저와 비슷한 심정을 적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들이 있어 몇 군데 옮겨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느껴졌고, 어머니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제가 지난주에 읽은 책 중 공통점을 가진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장밋빛 인생」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두 책 모두 만들어 낸 이미지라는 것에 대해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게 제 느낌이었어요. 그 책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만들어 낸 이미지"라는 것이, 자식에게 해준 것이 없다며 눈물지으시던 제 부모님과 "좋은 부모"와 서로 얽히면서 저를 끝없는 생각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과연 "좋은 부모"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이 시대가 만들어 낸 "좋은 부모"라는 환상에 등 떠밀려 혼돈의 한 중간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 그런 것에 저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책을 읽으신 분들 중 간혹 "정말 좋은 엄마시군요?"라는 메일을 보내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말 뭘 했는지, 얼마나 나쁜 엄마였는지를 자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저는 정말 "좋은 엄마"일까요? 마치 제가 위에서 말한 늘 좋은 점만 보이려 하는 엄마로 보여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특히 책이 나오고 나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걸 실감할 때가 있어요. 7월 호 여성 잡지의 인터뷰 기사에 넣을 사진을 보내달라는 전화가 왔었어요. 지난 번 신문의 인터뷰 사진 때문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서 아이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인터뷰는 거절을 하고 있는 데 사진을 엄마가 찍어서 보내도 된다기에 응한 것이지요. 마침 그 날이 시댁의 모심기 날이라 사진 찍을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시댁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덕분에 곡식과 채소들을 마음껏, 그것도 유기농법으로 지은 것들을 먹을 수 있다고 자랑을 쬐끔했더니 대번 질문이
모심기, 유기농 채소 길러 먹기 등과 관련. 1)먹거리에 신경을 쓰는 이유와 2)어떻게 실천에 옮기는지.라는 질문이 오더군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피자를 무척 좋아합니다. 이런 제가 무슨 "실천"씩이나 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아이들에게 먹이지 말아야 할 음식 1위에 꼽히는 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외식하자고 조르는 사람인데 그런 질문은 부담스럽다고 대답을 했지만 그 부분에 관해 과연 기사가 어떻게 나올지. 이처럼 만들어지는 이미지들. 이렇게 저 "이영미"도 여러분들 머리 속에 제가 아닌 전혀 다른 "만들어진 이미지"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처럼 이 시대의 젊은 부모인 우리의 목을 알게 모르게 조이고 있는 것이 이 시대가 만들어 낸 "좋은 부모"라는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들부터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어머니 이야기에 아이를 잘 키웠다는 사회적인 평가를 받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냈다는 엄마들의 비법과도 같은 육아법들, 남보다 빠른 그리고 뛰어난 천재들의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은 대단한 엄마들이 전해 주는 혀를 내두르게 하는 충고들. 게다가 저처럼 사회적인 인정도 못 받는 사람까지저는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요 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홍수 속에 우리는 이런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도 좋은 엄마가 되어야만 해. 참 좋은 엄마군요, 라는 말을 가끔 듣는 저의 이런 모습 어떠세요? 아이에게 돈을 잘 써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저, 매달 부록으로 주는 선물에 눈이 멀어 잡지책을 사고는 예슬이에게 엄청 잔소리를 듣습니다. 예슬이의 도시락 어떻게 싸줄 것 같아요? 무방부제 무색소라고 적혀 있는 광고문구에 안심하는 척 하며 가끔 햄을 구워 주기도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 하복을 너무 늦게 사는 바람에(얻은 교복 모두 미니스커트 상태인지라) 키가 큰 예슬이의 사이즈를 구할 수 없어 한 벌밖에 못 사 얼룩진 치마를 입혀 학교에 보내면서 왜 옷을 깨끗하게 입지 못하느냐고 잔소리도 합니다. 스쿨 뱅킹 은행통장 잔고 확인 안하고 있다가 독촉장 들고 온 아이에게 "미안해"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귀찮으니 찬밥에 라면 끓여 김치로 저녁 때우자고 하다가 어머니께 엄청 잔소리 듣습니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느냐고? 아이들이 귀찮아한다는 이유로 가끔 씻기지도 않고 재웁니다. 정빈이의 까마귀발에 우리 집 씻기 대장 남편의 잔소리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쉬고 싶은 마음에 '까이유 보고 싶지? 그렇지? 너 까이유 좋아하잖아.'를 외쳐대기도 합니다. 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이건 이미지가 아니라 제 실체의 일부분입니다. 저는 5년만에 딸의 책을 보기 위해 외출을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 곳에 서 있던 저는 부모님이 바랐던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건 제가 원하던 모습 중의 일부분이었거든요. 저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 저희 아이들과 함께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날 제가 부모님 앞에서 떠올렸던 이 구절을 저희 집 두 아이도 기억할런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도 배우려는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저희 부모님은 요즈음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대의 좋은 부모』라는 기준의 자로 잰다면 결코 좋은 부모에 속하지 못할 겁니다. 저보다 10살 아래인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던 날 저희 어머니 이러셨답니다. "협아, 정말 고맙다. 이렇게 잘 자라줘서. 부자 친구들 틈에 끼여, 그것 때문에 너 상처받아서 혹시 빗나갈까봐 엄마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나? 그런데 네가 원하는 의사가 되었구나. 정말 고맙다." 그랬더니 제 막내 대답이 저희 어머니의 꿈은 첫 사위(회사원인 저희 집 남자)에서 물거품이 된 판사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는 것이었는데(그 시대 어머니들의 일반적인 꿈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도 결국 이루지 못하셨어요. 부모가 자식에게 꾸는 꿈, 우린 얼마나 이루어 드리고 있는 걸까요?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우리 부모님들이 "좋은 부모, 열성 부모"가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우리는 지금 불행하기만 한 걸까요? 우리 아이들도 자신들만이 꾸는 꿈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대신 세워주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그들 가슴에 스스로 생긴, 앞으로 생길 꿈들이 말입니다. 부모의 몫 중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도록, 내 삶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 까 합니다.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자유"를 줄 수 밖에 없었던 그 분들에게서 얻은 교훈과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있듯이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