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선생이 적성이 아닌데도 행복하잖아!
학교 방송반 시험에 4차에서 떨어진 것, 많은 숙제, 2km의 거리를 걸어오는 것, 생각만큼 공부가 되지 않는 것 등등 예슬이를 힘들게 하는 것이 많다고 하네요.
그래서 어제 예슬이와의 산책 시간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양품점으로, 키다리 영어 서점과 한빛 서점으로, 떡볶이와 순대를 파는 길거리 노점 등을 돌아다니면서 예슬이의 긴 푸념이 이어지더군요.
산책 나가기 전에 한바탕 울며 난리를 친 뒤였건만 할 이야기가 엄청 많더군요.
예슬이 중학교 진학과 함께 저희 집에 작은 폭풍(?)이 한 번 지나갔습니다.
예슬이의 플릇 레슨을 두고 남편과 저의 의논이 오늘의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예슬이가 플릇을 시작했다는 말씀은 드렸었지요.
음악에는 전혀 문외한인 저이기에 예슬이를 어떻게 도와 줄까 고민하다가 마침 저희 학교 교감 선생님이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라 의논을 드렸지요.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두 번 음악 학원에 가서 배웠는데 계속 그렇게 하는 게 나을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말입니다.
그 분의 조언은 처음 배울 때 제대로 잘 배워야 한다, 손동작 등을 잘못 배워 교정을 하려고 하면 힘이 드니까 전공을 할 것 같으면 처음에 제대로 잘 배워야 하니 선생님의 선택에 신중을 해야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제가 그런 쪽으로 전혀 아는 바가 없어 선생님 소개까지 부탁을 드려 교수님 한 분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 남편과 예슬이의 진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요.
제가 예슬이가 플릇을 하고 싶어하니 소개받은 교수님께 배우게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이 그러더군요.
"너무 성급한 게 아닐까? 아이의 적성을 찾아 빨리 그쪽으로 밀어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가 아이의 더 나은 적성이 발견되었을 때, 그 때가서 이제까지 해 온 것이 있어서 길을 바꿀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잖아.
음악이라.
당신이 알다시피 우리 부부 모두 음악하고는 별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잖아. 내 생각은 그래. 예능이라고 하는 것은 학습에 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돈이 많아서 좋은 선생님께 계속 레슨을 받고 좋은 악기를 사줌으로 해서 어느 정도는 극복 할 수 있겠지만 우리 형편이 그렇게까지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잖아.
타고난다는 것, 물론 우리 부부가 다 음악에 별 소질이 없다고 해서 예슬이가 소질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섣불리 시작했다가 끝까지 밀어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때 가서 아이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여건이 안되어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난 못할 것 같아.
내 말은 정말 소질이,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야, 다른 가족들의 희생이 조금 따르더라고 밀어줘야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 소질, 아이가 하고 싶다는 마음, 이 것만으로는 그것에 드는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게 내 생각이야.
사실 공부가 가장 싸게 먹히잖아. 플릇을 하다가 다른 것으로 방향을 틀기는 어려울 거야. 학과 공부도 일반 공부만 하는 아이들 보다가는 소홀하게 될거니까.
하지만 그냥 공부를 해 놓으면 나중에 속된 말로 "법대가 안 되면 상대라도" 라는 것이 가능하니까.
내 생각은 그래. 많은 부모들이 공부를 하길 바라는 것은 이런 예능이나 기타 다른 것을 하는 것 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실패의 확률도 낮기 때문일 거라고.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아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가능성을 나타내게 될지도 모르잖아. 지금 이렇게 많은 비용을, 물론 우리 형편에 많은 비용이겠지만, 그런 비용을 들여 시작을 했다가 그저 음대에 겨우 갈 수 있는 정도라면 나는 반대야.
그 정도 될 것 같으면 내 자만인지는 모르지만 예슬이는 공부만 해서라도 다른 쪽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이야.
부모가 되어서 아이 교육에 돈이 문제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생각이 달라.
우리 형편을 넘어서는,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가면서 까지 아이들에게 투자를 해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아.
우리가 이제까지 사교육비를 들이지 않고 아이를 키워와서 그렇지 공부만 하더라도 어쩌면 그 정도의 사교육비가 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을 했지만 그 비용으로 영어를 남보다 잘하게 되었다고 치지. 예를 들어서 말이야.플릇을 하면 음악이 아닌 다른 선택이 힘들어지겠지만 영어는 참 많은 여러 갈래의 길을 아이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야.
당신, 이 시점에서 꼭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어.
요즈음 어디서나 특기, 특기, 적성, 적성을 외쳐대지만 과연 지금의 아이에게 한 가지 길만을 제시한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를 생각해 봐.
너무 늦어서 후회하는 일도 많지만 모든 게 꼭 결정이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닐 거야.
난 좀 더 시간을 가졌으면 해.
그리고 사람의 적성이 꼭 한 가지만은 아닐 거고 그 적성에 따른 직업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다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당장 당신만 봐도 과학 선생이 당신의 적성은 아니었어도 지금 그 일을 너무 좋아하면서 행복해 하면서 살잖아.
나 또한 내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아. 난 회사원이 장래 희망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럼 지금의 나는 정말 불행한가 하면 그건 아니거든.
요즈음 마치 아이의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를 선택하면 당장 무슨 큰 일이 나는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지만 적성에 맞는 걸 찾다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이 보잖아.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적성에 맞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하면서 살면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없겠지.
예슬이가 음악에 나타내는 재능정도는 미술에서도 나타내잖아. 글쓰기에서도 나타나고 말이야. 당신이 미술에 대해 그렇게 미련과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 아닌 음악을 선택했다는 게 난 좀 이상해.
내가 보기에는 거의 비슷한 수준의 소질을 나타내는 것 같은 데 말이야.
차라리 요리에 음악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물론 선택은 당신이 한 게 아니라 예슬이가 했겠지. 알아, 그 어떤 것보다 아이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선택이 아이의 인생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저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좀 더 세상을 산 부모가 너 넓은 안목으로 한번쯤 짚어 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야.
당신은 이제까지 늘 아이의 생각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키워 온 거 알아. 하지만 우린 그 아이 보다 좀 더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의 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조언하고 제시할 수도 있잖아."
며칠 동안 의논하는 사이 남편의 의견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의논을 한 끝에 예슬이는 플릇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슬이가 플릇을 하기로 결정이 된 후 제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아이와 영화 『비욘드 사일런스』를 함께 본 것이었습니다.
[제43호] 촌스러운 여자에서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 이야기에서 제가 소개했었던 김정은님의 홈에 이 영화에 대한 글이 있어 또 한 번 소개를 해 봅니다.
(김정은님의 비욘드 사일런스에 관한 글로 바로 갑니다 )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여러 가지예요.
우선 음악 영화라는 것,
클라리넷을 하겠다는 라라와 농아인 아버지와의 갈등
자신의 음악 세계를 찾아가는 라라의 모습
라라와 동생 마리가 보여주는 나이 차가 많은 자매 사이의 갈등
장애인을 부모로 둔 라라를 통해 보게 되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 등등
이런 많은 이유들 중에서 예슬이가 놓치지 말고 가슴에 담기를 바란 것은 라라가 찾아가는 "자신만의 음악 세계, 부모와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면서도 결국 홀로서기를 해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제가 이야기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기에 예슬이의 몫으로 남겨 두었지만 말입니다.
민요를 좋아한다는 라라, 그 속에는 슬프고 자유롭지 못한 감정들이 담겨져 있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있는 라라.
영화 속에 할아버지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클라리넷을 부는 고모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거든요.
예슬이는 금요일과 일요일, 일주일에 두 번 선생님 댁으로 플릇을 배우러 갑니다.
선생님에게 받는 레슨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며 언니 오빠들의 연습을 많이 보고 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보통 3∼4시간을 선생님 댁에서 보내고 옵니다.
지난 주말에는 여행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님과 통영과 거제도 등으로 1박2일 여행을 갔었는데 예슬이는 그 여행에서 돌아오자 저녁도 먹지 않고 선생님 댁으로 달려가더군요.
선생님 댁이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정도 거리에 있기에 예슬이를 마중하러 지하철역으로 가니 밤 10시가 다 되었더군요.
아이는
"죽을 만큼하고 왔어요. 힘들지만 너무 좋아요."라며 제게 안기더군요. 덩치가 산만한 아이가 갈수록 어리광이 늘고 있습니다.^_^
♥♥오랜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늘 하는 핑계이지만 제가 좀 바빴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딱 한 달만 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게 휴가를 주신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다시 돌아 올 때에는 새로운 책 한 권을 갖고 돌아오겠습니다. 영어 책은 아니랍니다.!!!
기다려 주시길 바랄게요.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