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했으니까 안 혼내야 하잖아요.
무엇으로 한턱 냈느냐하면 모두에게 책을 사주었답니다.
책을 사 준 게 뭐 특별한 일이냐 하시겠지만 그냥 사 줄 책도 괜히 이름 붙이면 주는 사람도 생색이 나고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도 이 수법(?)으로 남편에게 톡톡히 점수를 땄답니다.
남편의 손수건이 다 낡아 새 것으로 사야할 때가 되었는데 곧 어버이날이고, 예슬이와 정빈이가 며칠 전부터 선물 준비로 둘이서 분홍색 돼지 저금통을 두고 의논을 하기에 아마도 손수건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고는 어버이날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핸드폰 줄을 선물로 하는 바람에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어요.
그 날은 예슬이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라 저와 시내 쇼핑을 하고 싶다고 하여 시내에서 만났었습니다.
지난 번 신문 기사에도 났었지만 예슬이는 어버이날 예쁜 머리핀과 함께 영어와 컴퓨터 시험을 잘 쳐 효도하겠다는 편지를 저에게 선물로 주었고 약속을 지켜주었어요.
어버이날인지라 쇼핑은 짧게 하고 둘이서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뵈었지요. 공휴일이 아니면 평일 어버이날에는 찾아 뵙기가 힘들었는데 마침 저와 예슬이 둘 다 일찍 마친 날이니 쇼핑으로 다 보낼 수는 없잖아요. 남편은 둘이서 신나게 쇼핑만 하다가 올 줄 알았는지 시골에 다녀왔다니 무척 기뻐하더군요.
그날 쇼핑을 하면서 저는 남편에게 줄 손수건을 사 예쁘게 포장을 해 퇴근해 온 남편에게 선물로 주었지요.
"선물."이라고 내미는 저에게 "이거 누구한테 받은 거구나?"하더군요.
"예슬이에게 물어 봐요. 아까 함께 쇼핑하면서 내가 얼마나 정성 들여 고른 건데. 그렇지 예슬아?"
끄덕이는 예슬이를 보며 남편은 "어버이날인데 무슨 선물이야?"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지요.
"몰랐어요? 내가 당신을 어버이처럼 섬기는 걸? 그러니까 선물을 마련한 거지."
물론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남편은 아니지만 무척 기분 좋아하더군요.
어차피 낡아서 새로 준비해야하는 손수건. 아무 표시 나지 않게 새로 준비해 서랍 속에 넣어 둘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날에 선물로 주니, 주는 저나 받는 남편이나 둘 다 기분이 색다른 거죠.
이렇듯 오늘의 한 턱도 뭐 특별한 날이라 서기보다는 그저 일요일 오후의 기분을 조금 북돋워 보자는 것이었어요.
시골에 한창 농사철이라 오늘 저희 부부가 시댁에 다녀왔거든요.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와 세이클럽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예슬이와 사촌동생 윤서와 놀고 싶어 시골에 가기 싫다는 정빈이를 두고 저희 부부만 다녀왔거든요.
그렇게 일요일 대부분을 아이들과 떨어져 있은지라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제가 오늘 책으로 한턱 쏘기로 하고 동네 서점 대신 시내의 대형 서점으로 온 식구가 밤나들이를 한 것입니다. 동네 서점보다는 좀 더 그럴 듯해 보이잖아요.
남편이 고른 책은 전공서적으로 세상에나, 한 권에 48,000원이나 하지 뭡니까?
마누라가 한 턱 낸다고 하니 그 동안 사려고 벼르던 걸 고른 건지, 한 번씩 당연히 사줘야 할 것을 선물로 교묘히 전해주는 마누라가 괘씸하여서 이 참에 한 번 골려 주려 작정한 것인지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저희들의 일요일 저녁 시내 서점 나들이는 즐겁게 끝이 났답니다. 물론 저는 지출이 생각 보다 커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요.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예슬이가 "어머니 이거 기억나세요? 이 음악 저번에 시립무용단 발표회에서 들었던 음악이에요." 하는데 제가 워낙에 음악하고는 거리가 먼 탓에 통 알 수가 있어야지요. 제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예슬이는 음악이라면 한 수 한다는 남편을 향해
"아버지는 기억하시죠? 그리고 그날 보았던 <골목>이라는 작품은 저희 학교 무용교생 선생님이 안무하신 거래요. 아버지, 골목이라는 작품도 기억나시죠?"하더군요. 남편이
"그 날 아빠가 정빈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음악도 그렇고 <골목>이라는 작품도 언뜻 본 것은 같은데……. 정빈이가 쉬쉬쉬 하는 바람에 나가서는 코코아 빼먹고…."
남편의 말을 가로채며 정빈이가 항의하듯 그러더군요.
"제가 언제 그랬어요?" 남편도 질세라
"네가 그랬었잖아. 쉬쉬쉬 하면서 급하다고 해서." 다시 정빈,
"진심(아마도 진실이겠죠?)을 밝혀야겠어요. 그럴려면 그 때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얼른 그 때로 가 봐요."
그렇게 둘이서 【진심】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때로 돌아가 보자, 그럴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지만 아빠가 말하는 게 【진실】이다, 며 한 동안 실랑이를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의 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한 편으로는 너무 진실해서 어른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자신을 위해(?)너무도 쉽게 진실을 외면해 버리는 아이들의 말.
그런 아이들의 말에 관한 이야기 하나 할게요.
5월 달 저희 집 전화요금이 4만원이 넘는 금액이 나와 깜짝 놀랐었습니다. 전화 요금이래야 만원 안팎인 집이거든요.
저의 일 때문에 시외전화 요금이 평소보다 많이 나올 줄은 알았지만 뜻밖에도 "정보이용료"라는 명목으로 15,000원 정도의 금액이 청구되어 있어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전화국에 알아보니 "700" 과 같은 유료 서비스를 이용한 경우 그런 요금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처음으로 지목된 대상은 예슬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뜻밖에 정빈이가 "700 누르는 거 제가 했어요. 전화로 퀴즈 푼다고."하는 게 아닙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보니 "혼내지 않을 거죠? 사실대로 말하는 거니까."하더군요.
"700은 어디서 보고 누른 거야?"
"만화 같은 거 할 때 보았던 전화 번호를 기억해서 눌러 보니까 1번은 게임이고 2번은 퀴즈라고 해서…."
"몇 번 눌러서 무얼 했는데?"
"2번 눌러서 퀴즈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몇 번쯤 했어?"
"한 여섯 번쯤요."
"재미있었어?"
"아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만 자꾸 나와요."
"이제는 어떻게 할 건데?"
"이제는 안 해요. 저번에 하고는 안 했어요. 재미없어서."
"그런데 그 전화하면 따로 돈을 내야하거든. 정빈이가 그렇게 전화한 것에 대해 나온 돈은 어떻게 하지? 정빈이가 내야 할 것 같은데."
"저 돈이 없는데요. 저금통에 있는 거 꺼내서 내야해요? 근데 그거 너무 많은 돈이라서 저금통에 있는 돈 다 꺼내야 되죠? 그러면 안돼요. 싫어요."
"하지만 이건 분명히 네가 쓴 거니까 조금이라도 내야할 것 같은데."
"솔직히 말했으니까 안 혼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돈 내라는 소리도 안 해야지."
"솔직히 말한다고 모든 게 용서되는 것은 아니야. 그럴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을 괴롭혀 놓고 제가 그랬어요. 사실대로 말하니까 용서해야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겠지. 나중에 사실대로 말하면 다 용서될텐데 뭐 하면서."
"그러면 말 안하고 내가 안 그랬다고 하면 되잖아요.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혼나면!"
"글쎄. 그 순간은 모르고 넘어 갈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 번 경우에도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고 하면 엄마가 전화국에 들고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겠지. 그러면 누가 어디에 전화한 것인지 알게 될 거고 그 때는 정빈이가 아니라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거야. 그 때는 어떻게 하지?"
"……"
"700누르는 전화가 돈이 필요한 것인지 정빈이가 몰라서 그랬다는 건 엄마도 알아. 그래서 이번만은 그냥 넘어 가기로 하겠어. 하지만 이제 정빈이 글자 읽을 줄 아니 "유료"라는 말이 있으면 돈을 따로 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해. 글자를 알아서 좋은 것 중 하나가 누가 옆에서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글씨를 읽고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너 판박이 온 몸에다 붙이다가 판박이 종이에 적혀 있는 '피부에는 붙이지 마세요'라는 글을 읽을 줄 알게 되고 부터는 안 붙이려고 노력하잖아. 물론 글자를 읽을 줄 알아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지. 그럴 때는 무슨 뜻인지 물어 보면 되겠지. 사실대로 말해도 야단을 맞을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래도 혼나는 건 싫어요."
"그럼 일을 할 때 신중해야지."
"신중이 뭐예요?"
"잘 생각해 보는 거지. 해도 되는 일인지 아닌지."
"그래도 하고 싶으면요?"
"하고 책임을 지는 거지."
"어떻게요?"
"그거야 경우에 따라 다르지. 이 번 같으면 돈을 내야 할 것이고."
"야단을 맞던가요?"
"때로는."
이것이 "정보이용료"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의 말이란 게 어디까지 진실인지 그 걸 꼭 집어 낼 수 있다면.
정빈이는 차안에서 결코 자신은 무용 보다가 쉬하러 나가 코코아를 먹은 적이 없다고 우겨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