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예슬이가 캐나다로 여행을 갑니다.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새해 첫 인사를 서울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희 가족은 서울 동생네 집에 와 있어요.

오늘 예슬이가 캐나다로 여행을 갑니다.

3주 동안의 어학 연수겸 문화 체험이라는 이름 하에 여행을 떠나게 되었거든요.

지난 해 봄 여행을 하면서 예슬이와 약속을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 있는 왕건 아저씨가 짜장면 시켜 먹었나?로 바로 갑니다. )

올 1월에 미국 디즈니랜드로 함께 여행을 가자고.

그 때 예슬이 스스로가 영어로 의사 소통이 될 것 같다고 정한 시기가 올 1월이었지요.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정도 있고 특히나 일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제가 이 번 방학에 계획한 일들이 너무 많아 예슬이와 함께 미국을 가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미륵씨의 "무던이"라는 책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출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책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륵씨를 생각하면 자연 떠오르는 이름이 전혜린씨지요.

책을 사 와서는 집에 있는 10년이 훨씬 넘은 무던이를 옆에 펼쳐두고 정규화씨가 어떻게 옮겼는가를 한 줄씩 비교해 가며 보기도 하고 "압록강은 흐른다"도 다시 펼쳐 보고 전혜린씨의 책들도 정말 오랜만에 펼쳐 밤새는 줄 모르고 옛날로 돌아가 보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새로 나온 <무던이>의 표지에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이라 적힌 것을 보며 저 혼자 많이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은 적어도 중학교 3학년 이상은 되어야 그 가치의 절반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중3이라고 하고 보니 그것도 좀 이상하네요.

중2와 중3이 어떻게 다르기에, 하면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본 설렘이 있는 사람, 그 가슴앓이를 아는 사람, 그리고 우리의 전통 문화의 다양성과 그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이해하며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주제넘게도 영어로 글을 쓰고 싶어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독일어로 많은 글을 남긴 이미륵씨는 제게 참 큰 의미로 다시 다가오더군요.

"영어"라면 겁부터 내며 도망만 다니던 시절 만났던 이미륵씨와는 정말 다르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무던이 라는 책 한 권으로 오랜만에 두 사람을 떠올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1920년대, 1950년대에 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 스스로의 발걸음을 떼었던 사람들이잖아요.

두 사람이 그렇게 자신들의 발걸음을 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성장 과정에서의 부모들의 영향이 적지 않음을 그들의 책 곳곳에 볼 수 있더군요.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봐요.

예전에 읽을 때는 그런 것들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책을 읽어도 인간 이영미라는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아이들의 엄마라는 시선으로 더 많이 보게 되니 말입니다.

1월의 미국 여행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영어를 열심히 했고 영어라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 예슬이는 엄마가 미국 여행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에 입이 이만 저만 나온 것이 아니었어요.

플룻을 시작하면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예슬이인지라 그 욕구는 더 커져만 갔지요.

그런 예슬이를 보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예슬이 혼자만의 외국 여행을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굳이 영어가 아니더라도 예슬이 스스로가 이렇게 원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세상을 한 번 경험하게 해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슬이가 초등학교 6년 동안 특별한 과외비를 들이지 않고 학교 공부만을 해 온 터였기에 이제까지 학원이나 다른 과외 활동에 든 비용이라 생각하고, 그리고 영어를 열심히 한 보상으로 아이에게 한 약속도 지키자며 남편에게 의논을 했지요.

저희 집 남자가 아는 사람은 아는 엄청난 절약맨(? 이런 말이 있는가요?)에 소문난 구두쇠입니다.

김치 냉장고를 사자니까 앞산에다 김장독을 묻고는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이 내다 버린 단지라는 단지는 죄다 주워오는, 단지만 주워 오는 줄 아십니까?

거의 매일 아침 운동 후 들어오는 그 남자 손이 빈손일 적이 드뭅니다.

게다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산골 학교를 다녔어도 공부만 잘했다. 지가 할 나름이지 환경은 무슨 환경."

남편은 이미 오래 전에 폐교가 되어버린 시골 학교를 나온 진짜배기 촌사람이랍니다.

그런 남편이 뜻밖에도 선뜻 제 의견에 동의를 하더군요.

아이와의 약속이니 지켜야 할 것이고 아이의 상태로 보아 지금이 적기라고 자기도 생각한다면서요.

그런데 어찌 그리 외국에 아는 사람이 없는지요.

할 수 없이 유학원을 통해 어학 연수겸 문화 체험단에 끼여 3주 동안 캐나다로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영어 수업보다는 견학이나 수업 외 활동이 많은 프로그램으로 골라 신청을 했고 오늘, 출발을 합니다.

어학 연수.

참 의견도 많지요.

그리고 꼭 외국에 나가야만 더 넓은 세상을 보느냐 시며 나무랄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제 친한 친구는

"혼자 줏대 있는 척 유난 떨더니 결국 너도 별 수 없구나.

네가 아이를 어학 연수 보낼 줄은 정말 몰랐다. 조금 있다가 조기 유학을 보냅네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결국 이럴 거면서 유난한 척하기는…….너 이제까지의 모습, 전부 위선 아냐?" 하더군요.

아래 편지는 제 마음을 담아 예슬이에게 쓴 편지입니다.

참, 올해에도 모든 분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 많이 생기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제 칼럼, 영어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없다 나무라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영어 이야기, 올해에는 많이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사랑하는 나의 딸 예슬이에게


늘 새로운 것에 대해 목말라 하는 너를 보면서 너만 할 적의 엄마를 떠올리곤 한다.

엄마는 열 네 살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시골 초등학교의 졸업식을 앞두고 있던 엄마는 TV에 나오는 내 또래의 탤런트가 입은 손뜨개질로 만든 조끼를 보고 반해 그것과 똑같은 것을 뜨기 위해 시골 5일장에서 코바늘과 실을 사서는 뜨개질을 배우며 그 겨울을 다 보냈었다.

엄마가 알고 있는 세상은 작은 시골 마을이 전부였고 내가 꿈꿀 수 있는 세상은 오직 TV를 통해 보는 세상이 전부였어.

엄마는 시골에서 가장 가까운 "대구"라는 도시를 향해, 그곳에서 공부하고 살아가는 꿈을 키웠었지.

방학 때면 한 번씩 다녀오던 대구.

그게 열 네 살의 엄마가 본 더 넓은 세상의 전부였어.

하지만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고 너희들이 보고 느끼는 세상은 더 없이 크고 넓을 거야.

이제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나는 너를 보며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설레는지 모른다.

옆집의 TV를 보면서 미래를 꿈꾸던 엄마였고, 거의 매일을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는 대구를 향해 떠나는 버스를 보며 그 도시를 향해 더 먼저 달리는 내 마음을 억누르느라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해대며 내 가슴을 누르곤 했던 엄마였는데.

캐나다는 어떤 곳일까?

초등학교 6년 동안 오로지 학교에서의 선생님과의 수업만으로 공부를 해 준 예슬이.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 한 날 엄마는 생각했었지.

초등학교 6년 동안은 정말 원하는 대로 신나게 놀게 해줄 거라고.

엄마는 나름대로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네가 참 잘 자라주어서 엄마는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그 선물로 네가 가장 원하는 외국 여행을 보내주는 거야.

이제 네 몫만이 남았어.

네가 언젠가 말했었지?

"세상에는 왜 이렇게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말이야.

맞아. 세상에는 똑똑하고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과 너를 비교할 필요는 없어.

너는 요리를 아주 잘 하잖아.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 하고 말이야.

수학 문제를 더 많이 틀릴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이 번 여행을 하면서 넌 많은 경험을 하게 되겠지.

엄마가 너와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이 바로 너와의 "여행"이었어.

이제까지는 엄마와 함께 한 여행이었지만 이제는 너 혼자 가야해.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라, 무엇을 배워라, 라는 말을 하지 않을게.

하지만 넌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거라 엄마는 생각해.

그리고 그 것들은 앞으로의 너의 삶에 많은 밑거름이 되어 줄거라 믿어.

엄마가 말했었지?

이 번 여행에 드는 경비는 대학생들의 1년 등록금이 될 수도 있다고.

엄마 학교에는 십 몇 만원의 등록금을 내지 못해 많은 상처를 가슴에 가지게 되는 언니들도 많다는 것을.

우리가 돈이 많아서 그저 남들 다 가는 것이니 한 번 가보라며 보내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거.

엄마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꿈을 접으며 살아야 했던 학창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거야.

그런 엄마이기에 이제 나이가 들어 이제까지 접었던 꿈들을 이루며 살아가려 무지 애를 쓰고 있는 거 너도 알지?

엄마는 너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고 그 세상에서 네가 네 몫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커 주길 바래.

언젠가 엄마가 말했었지.

대학이라는 곳, 그건 네 꿈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자 선택이라고 말이야.

친구들은 겨울 방학 동안 학원의 중학 예비 반에서 중학교 과정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혼자 이래도 되는지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다는 너.

엄마는 이렇게 생각해.

공부를 하며 세상을 살 사람도 있고 다른 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앞으로 공부할 시간은 아직 많아.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 더없이 열심히 하게 된다는 건 누구보다도 네가 더 잘 알잖아.

영어에서 절실히 네가 느껴보았잖아.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너의 열정과 집중력, 끈기에 엄마가 놀래곤 하잖아.

공부라는 것, 대학이라는 곳은 네가 선택한다면 넌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할거라 믿어.

아니, 이미 넌 선택을 했기에 이번 여행을 그렇게 간절히 바랬는지도 몰라.

돌아오면 너에게는 중학교라는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이지만 몸 건강히 잘 다녀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지?

하나도 걱정되지 않아. 오히려 네가 한없이 부럽기만 해.

넌 뭐든 잘 먹고 잠도 어디서든 잘 자잖아.

열 네 살 아가씨가 신발 260을 신는다면 그 덩치는 말할 필요도 없잖아.

넌 잘 해낼 거야. 엄마는 걱정 진짜 하나도 안 해.

잘 다녀와 .

너와 함께 꿈을 키우고 이루며 살아가고픈 엄마가.

언젠가는 이런 너의 모습도 보게 되겠지?

이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알을 깨고 나오는 이 병아리처럼 너에게는 많은 것이 새롭고 낯설거야. 하지만 넌 잘 해낼 거야.

사랑해 나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