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어머니, 가슴이 두근두근해요.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오늘 정빈이가 한 말입니다.

요즈음 정빈이가 한글을 알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오늘 정빈이가 4권의 책을 읽었답니다.

 【안돼, 데이빗 !】    【바람에 날아간 밀짚모자】

 【아빠는 미아】   【이상한 발자국 누구 것일까】

정빈이가 좋아하는 책으로 한 쪽에 한 줄 정도의 글이 있는 책들입니다.

바람에 날아간 밀짚모자는 여섯 일곱 줄의 글이 있기는 하지만 정빈이가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 거의 외우고 있지요.

지금은 외워서 읽기보다는 한 자 한자 짚어가면서 글자를 익히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지요.

나이 일곱 살에 이제 떠듬떠듬 한글을 읽는 게 무에 자랑이냐 실지 모르지만 정빈이와 저에게는 새로운 것을 알아 가는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이제까지 무엇이든 배우려 하지 않고 힘들어하던 정빈이가 혼자서 조금씩 조금씩 글자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러던 중 스스로 책을 네 권이나 읽었다는 기쁨에 아이의 환희에 찬 얼굴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팔불출이라는 거 다시 한 번 밝혀 둡니다.^_^)

아이는 유난히 자의식이 강하고 자존심이 센 아이인데 7살이라는 너무나 나이 차가 많은 언니가 있다 보니 그 힘겨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싫어요, 전 꼭 언니만큼만 클 거예요.로 바로 갑니다. )

그러다 보니 언니를 경쟁으로 거의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해대지만 늘 역부족이라 상처를 많이 받곤 한답니다.

그래서 링크 된 글 속의 참으로 적극적이던 아이가 점점 내성적이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성격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조금씩 철이 들면서 해봐도 언니하고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서 아예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많아졌거든요.

예슬이가 캐나다에 가 있는 동안은 언니 사진까지 붙여 놓고 보고 싶어하더니 막상 돌아오니 며칠은 좋아하더니 이럽니다.

"아이를 키우다가도 갖다 버릴 수 있어요?"

"왜? 누굴?"

"언니 좀 어디 먼 곳에 갖다 버리고 오세요."

언니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힘겨운지 짐작하시겠죠?

그래서 정빈이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필요가 절실함을 느끼고 며칠 온천에 갔었습니다.

체온 조절이 잘 안 되는 정빈이가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은 온천의 따뜻한 물 속인데, 정빈이가 수영만큼은 자신 있어 하거든요.

배운 것도 아닌데 자유형, 평형, 배영까지 혼자서 해냅니다.

잠수는 기본이고 물을 전혀 겁을 내지를 않아요.

때를 미는 아줌마들이

"너 수영 어디서 언제부터 배웠니?"라고 물어보며 감탄을 하면

"저절로 알게 됐어요. 여기가 제 수영장이에요."라며 아주 의기양양해 하지요.

물 속이라 그런지 밖에서 운동을 할 때보다 훨씬 덜 피곤해 하고요.

그렇게 수영 때문에 신이 나서인지 정빈이 한 권, 엄마 한 권 번갈아 가며 책을 읽자고 하니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글자가 거의 없는 책이나 정빈이가 너무 좋아해서 내용을 대부분 외우고 있는 책을 골라 주고 제가 옆에서 모르는 것은 도와주면서 읽기를 해 보았어요.

요즈음 간판 읽느라고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어도 다 읽어야 한다며 차를 세우고 있으라 떼를 쓰는 아이인지라 지금이 글자를 완전히 익힐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말입니다.

아이는 네 권의 책을 다 읽고는

"어머니, 제 가슴이 지금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뭐라고 하는데?"

"두근두근해요."

"어머나, 엄마 가슴이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네. 엄마 가슴도 두근두근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머니도 기쁘세요? 제가 책을 읽을 줄 알게 돼서?"

"아니, 엄마는 네가 책을 읽을 줄 알게 된 것도 기쁘지만 네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해서,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두근두근 하는 거야."

"제가 노력하니까 됐죠? 그죠?"

"그럼, 엄마가 피하지 말고 열심히 해서 이겨버리라고 했었지?"

"그래서 제가 이겼죠? 책에게 제가 이겼죠? 책도 깜짝 놀랐을 거예요. 제가 자기 책에 있는 글자를 다 읽을 줄 알게 돼서 말이에요. 저는 뭐든 지 할 수 있죠?"

"그럼, 넌 뭐든지 할 수 있지, 두렵다고 피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누구 딸이지?"

"어머니 딸이요. 그래서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죠? 어머니를 닮아서 말이에요."

세상에나 이렇게 감격적일 수가.

제가 세상에서 가장 감격해하는 말이 바로

"어머니를 닮아서 뭐든 할 수 있다"라는 말이거든요.

제가 이걸 위해 참 별별 희한 한 일들을 저지르곤 했잖아요.

정빈이가 조금씩 자신감을 가져가기를 바래봅니다.

참 씩씩하고 누구보다 앞에 서서 뭐든 척척할 것 같던 아이가 "언니"라는 너무나 거대한 벽을 넘어서기가 참 많이 힘겨운가 봐요.

 

칠판에다 '바나나' '아기' 등의 글자를 적으며 너무 신나 해 하는 정빈이를 보면서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도와 줄까로 마음이 그리 가볍기만 한 건 아닙니다.

참, 정빈이가 읽은 책 중 【이상한 발자국 누구 것일까】를 조금 소개할게요.

이상한 발자국 누구의 것일까?
라는 글과 함께 어떤 동물의 발자국 그림이 있어요.

페이지를 넘기면▶▶
발자국 주인의 그림이 나와 있지요.

이 책을 이렇게 활용해 보세요.
책 내용이 끝난 다음 페이지에 아이의 발을 스탬프로 찍어 주는 거예요.

그 다음 페이지에▶▶
발자국 주인인 아이의 사진을 붙여 주는 거죠.

이 때 아이의 발자국을 찍은 날짜를 적어두면 아이가 크면서 자신의 발을 대어 보며 아주 신기해한답니다.

정빈이 발자국은 1997년 10월 17일에 찍은 것이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국과 사진이 책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좋아하고요.

이 두 곳에는 글자를 적어 두지 않고 읽을 때마다 달리해서 읽어 주는 것도 좋아요.

'이렇게 귀여운 발자국은 누구의 것일까?'

'이렇게 작은 발자국은 누구의 것일까?'

'이렇게 주름 투성이 발자국은 누구의 것일까?'

아이 사진이 있는 곳에서도 다양하게 말을 만들어 읽어 주면 되겠지요.

정빈이 사진은 아주 소중한 것으로 골라 붙여 두었어요.

96년에 수술하러 가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이와 함께 동해안으로 짧은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을 붙여 두었답니다.

온몸이 퉁퉁 부어 있는 사진이기는 하지만 제게는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지요.

정빈이는 자신이 이렇게 통통(?)한 적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곤 한답니다.

이렇게 자신만의 책을 가진다는 거,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