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첫 방송 출연(?)을 축하해 주세요!!!!
오늘 칼럼의 비밀은 여기에있습니다. 스피커를 켜시고 제일 먼저 여기를 눌러 주세요. 그리고는 눈을 감고 기다려 주세요.
【참 오래 된 사진이죠? 어머니와 저랍니다. 저의 어머니 대단한 미인이죠?】
추석을 지내고 할머니 산소 옆에서 친정 어머니께서 19년만에 털어 놓으셨다 던 비밀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오늘의 이야기가 바로 그 비밀 이야기랍니다.
이제 11월 7일이면 이 땅의 많은 아들딸들이 수능고사를 치릅니다.
아마도 그 때 쯤이면 TV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수험생을 위한(?) 방송을 하겠지요.
태어나 매년 이런 광경을 보고 자란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들 대학이라는 곳에는 당연히 가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될 거구요.
모두들 간다는데, 신문에서 방송에서 저렇듯 대학을 향해 난리를 치는데 외면할 수 있는 아이가 부모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19년만의 비밀 이야기를 한다면서 웬 수능 이야기냐고 하시겠네요. 그 비밀 이야기가 대학입시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거든요.
저는 학력고사 시대의 사람입니다. 340점 만점, 그 중에 체력장 점수 20점.
체력장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 가야할 것 같아요.
저는 어찌 그리도 운이 없는지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거 아시죠?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 갈 때마다 체력장이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뀌는 바람에 엄청 손해(?)를 본 사람이랍니다.
절대 평가라면 최하 점수인 15점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제가 생각해도 조금 억지 인 듯 합니다.)
전 두 번 다 15점 최하의 점수를 받았거든요.
필기 시험을 만점을 받아도 기본으로 5점을 까고 들어 가야하니 …….
제 앞자리의 불란서 인형 같은 무용 선생님은 체력장에서 만점을 못 받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를 못한다며 눈을 흘기시곤 합니다.
저의 달리기 솜씨 이야기는 익히 아시지요?( 저의 진로 이야기는 중 3때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딸 넷에 아들 하나. 아버지는 제가 여상에 진학을 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생들의 공부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기를 바라셨어요. 저는 인문계에 진학을 하고 싶어 했구요. 어머니께서도 맏이인 저를 대학에 보내 보고싶다는 열망이 있으셨기에 저를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기를 원하셨구요. 급기야는 아버지에게 쫓겨 난 어머니와 저는 외가에서 며칠을 숨어 지내야 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대소동 끝에 결국 아버지 몰래 어머니와 인문계 원서를 내버렸지요. 나중에 알게 된 저희 아버지, 또 한 번의 폭풍은 피할 수 없었지요. 그렇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구요.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제 생애 최고의 방황의 시기가 되었구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저였지만 가정 형편 상 미대를 가기 위한 준비를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미술에 관해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꺼내 보지도 못했고 미술 시간에 제 마음속의 방황과 반항을 표시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저희 미술 선생님은 제 그림을 보실 때마다 상담이 필요한 학생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저는 그런 선생님이 참 똑똑하다고, 그림 볼 줄 안다고 건방을 떨며 그 시절을 보냈지요. 결국 미대를 포기하고 저는 치과 대학을 원하시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이과 반으로 가 공부를 했고 학력고사도 좋은 점수를 받아 치과대학의 진학은 무난할 거라 믿고 있었지요. 그런데 치과대학이 일반 대학처럼 4년제가 아니라 2년을 더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에서야 아신 저의 어머니. 고등학생 한 명, 중학생 한 명, 초등학생이 두 명, 할머니를 포함한 대식구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2년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 혹시라도 장학생이 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에 저희 어머니는 원서를 써야 할 그 순간에 저에게 치과대학을 포기하고 등록금이 가장 싼 국립대 사대를 가기를 원하셨지요. 왜 하필 생물교육이었느냐구요? 속된 말로 생물 선생보다는 물리 선생이 나아 보이고 수학 선생이 더 나아 보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생물과는 경대 사대 생물교육과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가진 친척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얻어 볼 수 있겠다는 저희 어머니의 생각에서였지요. 사람들은 간혹 제게 묻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느냐구요? 적성과도 무관하게 어떻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서. 그런데 제가 카멜레온 띠랍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살면서 저는 늘 새로운 일을 만날 때마다 "어머, 이게 딱 내 적성이야."를 외쳐대곤 하니 말입니다. 그게 아마도 저의 최고의 장점이 아닌가 합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고 그걸 즐기려고 하는 것. 원서 쓸 때요? 하지만 어찌 그냥 이었겠습니까? 참 많이 울었고 참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했지요. 어차피 내가 원하던 길로 가지 못하는데 치대면 어떻고 사대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며칠의 폭풍이 지나면서 결국 사대에 원서를 냈고 전 15년째 선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 산소에 절을 하는 예슬이에게 "노할머니께 예슬이 하버드대학 가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 빌어라. 정빈이는 밥 잘먹게 해주세요 하고 빌고." 하시더니 먼저 들른 할아버지 산소에서의 음복으로 술기운이 도셨는지 갑자기 긴 한숨을 쉬시더니 예슬이를 보며 "너거 에미는, 후유우∼∼ 그 때 우리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어도 서울대 아니라 진짜 하버드도 보낼 수 있었는데.(이건 순전히 저의 어머니의 착각이십니다.) 우리 슬이는 부모 잘 만나 너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해서 하버드도 가고 박사도 되고 하거라."하시며 눈가가 붉어지시더니 "내 이제사 이야기한다만 서도" 하시면서 이야기를 꺼내시더군요. "너 그거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원서 쓰기 전에 엄마랑 점보러 갔었던 거. 참 그 때는 그렇게 라도 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해야할 만큼은 어렵지도 않았었는데……. 아버지 혼자 버는 살림에 아이들은 많고 게다가 막내 종협이, 그 자식, 어떻게 나은 자식인데, 그 자슥은 대학까지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들고. 너는 치대에 가겠다고 매일을 울고만 있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점쟁이였다. 평소 내가 가끔 가던 그 점쟁이에게 전화를 해서 형편을 이야기하고 너를 데리고 점을 치러 갈 테니 네 사주에 너는 직업을 선생으로 타고났다고, 치과 의사는 네 팔자에 없으니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절대로 못 붙는다고, 그렇게 네 사주를 거짓으로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 넌 점치러 가보자는 내 말에 묵묵히 따라왔었고, 아마도 너도 하 답답하니 그랬었겠지. 점쟁이는 내가 부탁한대로 너에게 사대에 가야한다고 어찌나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던지. 그 점쟁이가 하도 무섭게 이야기를 해서, 그래서 그랬는지 며칠 후에 너는 사대를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더구나. 엄마가 그 점쟁이에게 그런 부탁을 한 줄은 몰랐지. 이 이야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안 했으니. 아니, 기억하기조차 싫었으니까. 자식의 사주를 거짓말 해달라고 부탁하는 에미가, 그 때 그 심정은……. 그 때 원하는(진짜로 제가 뭘 원하시지는 지금도 모르실 겁니다) 치대에 보냈더라면 지금쯤 치과 의사가 되어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도 대우를 잘 받고 있을 텐데. 아암, 선생보다는 치과 의사가 백 번 낫지. 내가 못 배운 게 철천지한이 되어 내 자식들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정말 속고쟁이를 팔아서라도 지가 원하는 공부는 시킬 거라고 이를 이를 악물며 살았었는데. 그것도 뜻대로 안되더라." 자식이 원하는 것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꺾으셔야 했던 그 안타까움을 이야기하실 때 저도 눈물이 고여 오더군요.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으시면서 "그 때 힘들어도 보낼 걸, 입학금만 내주면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힘으로 공부 할 수 있다며 울며 울며 매달리는 걸……. 그 모습 에미 가슴에 못이 되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넌 모른다. 그 때만 생각하면 내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참말로 그때는 6년이라는 세월이 어찌나 길어 보이던지……. 넌 아버지에게 맞기도 엄청 맞고 쫓겨나서 집에 들어오지도 못한 적도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고등학교 갈 때 여상에 보냈더라면, 하는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네 아버지는 성질은 좀 괴팍하냐? 너는 날마다 울지, 너거 아버지는 다 내 탓이라 나를 윽박지르지. 그 때는 정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치대에 보냈더라면 선생이 아니라 의사가, 아니다 너는 공부하는 걸 좋아하니 정말 유학도 가고, 하버드도 가고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건데. 이렇게 선생으로 살지는 않을텐데." 그 때 제가 웃으며 그랬지요. "그랬으면 어머니 원하시던 판사 사위도 보실 수 있었을 텐데, 그죠?" 저희 어머니 제게 건 바램은 제가 치과 의사가 되고 판사 남편을 만나는 것이었거든요. 참 그 시대의 전형적이지만 절박하기도 하고 소박하기도 한 어머니의 소원이죠? 치과 의사인 딸과 판사인 사위. 그런데 현실은 선생인 딸과 회사원 사위랍니다. 저희 어머니 판사 사위에 대한 아쉬움을 아직도 이야기를 하시니 그 미련이 대단하십니다. 어머니께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면서 딸을 데리고 점쟁이에게 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러 갔던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그 시절에는 정말 절 그렇게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절 기운차게 때리시던 저희 아버지는 어머니 곁에 앉아서 먼 하늘만 쳐다보고 계시더군요. 이제는 걸음조차 원하는 대로 걷지 못하게 되신 아버지. 【저의 졸업식날 부모님 모습입니다.】 부모님의 그 때 심정을 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저희 두 아이가 해달라는 것을 해주지 못한 그런 경험은 아직은 없으니 부모님의 그 마음을 다 안다고 하면, 그건 아닐 겁니다. 그저 조금 이해한다는 게 맞겠지요. 그 때 제가 아버지에게 맞았던 그 아픔의 강도가 아무리 큰들 아버지의 찢어지는 가슴만 했겠습니까? 그 곁에서 피눈물을 흘리셨을 어머니 마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전 그 점쟁이가 어머니의 부탁으로 저의 사주를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진짜 전 선생의 사주로 태어난 사람이라 지금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세대의 많은 어머니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수많은 딸들의 꿈을 그렇게 피눈물로 꺾으셔야만 했던 기억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전 이 세상에서 저희 어머니를 가장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있어 어머니가 그렇게 큰 존재냐고 말입니다.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이기 전에 정말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오신 한 인간으로서, 그 분의 인생을 옆에서 지켜보며 살아 온 사람으로서 그 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많이 닮지 않았어요.위의 사진 보셨죠?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옷을 고르는 취향에 식성마저도 어머니를 닮은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남편이 사위가 아니라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마 주워 온 아이일지도 모르겠어요. 아, 그건 아닙니다. 제가 어머니를 닮은 것이 있답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언제나 새로운 꿈을 꾼다는 것도 닮았어요. 저희 어머니 인터넷도 하고 싶고 스포츠 댄스도 하고 싶고 요가도 배우러 다니시고, 노래방에서 신곡 발표를 위해 하루 종일 정빈이와 카세트로 노래 연습을 하신 덕분에 정빈이를 트로트의 명가수로 만들어 놓으시기도 하고, 딸이 책을 내니 당신의 살아 온 이야기는 책으로 엮으시면 열 권도 더 되겠다며 책을 내볼 까도 하십니다. 정빈이 스케이트 타는 모습에 당신도 스케이트를 배우시겠다고 하고 예슬이가 그린 만화를 보고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고도 하십니다. 한 번씩 제 눈에는 너무 유치해 보이는 반짝이와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사오시고는 취향이 전혀 다른 저의 눈치를 보며 "난 아무 것도 달리지 않는 옷은 재미가 없어 입을 수가 없어." 하며 슬며시 내 놓으실 때에는 그 소녀 같은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니 이를 어쩝니까? 그 모습 속에 딸을 데리고 점쟁이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제 가슴에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닮은 점을 알았어요. 아니, 똑같아요. 저희 어머니와 저의 띠가 같군요. 저와 어머니는 "카멜레온 띠" 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