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촌사람이 방송국에 갔었는데요……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2001년 12월 24일은 저희 부부의 13번째 결혼 기념일이랍니다.

그런데 저는 서울에서 남편은 대구에서 결혼 기념일을 맞았어요.

운동을 시작할 때 24일 결혼 기념일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남편과 함께 사진을 찍겠다는계획도 있었는데 저 혼자서 드레스도 입지 않고 사진을 찍었답니다.

조금 있으면 드디어 저의 모습이 공개되겠군요.

제가 왜 혼자서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하시죠? 그것도 서울에서 말입니다.

제가 잠만보, 운동을 시작하다에서

① 또 하나의 꿈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적고 시작을 했다고 했었죠?제가 서울에 올라 온 것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바로 ①번 때문이랍니다.

뭔지 궁금하시죠?제가 오늘 이렇게 적힌 종이를 들고

□ 일시 : 2001. 12. 24 (월) 15:00

□ 장소 : EBS 송파스튜디오

□ 오디션 방법 : 1인당 3-5분 카메라테스트

해당 교과의 일부분을 응시자가 자유롭게 내용 선정하여 강의함.

□ 장소안내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송파지역사회교육회관 입구가 보임(송파 올림픽공원<평화의 문> 건너편).

건물 5층으로 지정된 시간까지 도착.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지하철 이용 권장.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저인지라 동생이 적어 준 쪽지를 들고서는 정말 촌사람 티를 팍팍 내며 지하철 3호선, 2호선, 8호선을 갈아타고서는 EBS교육방송 송파 스튜디오를 찾아갔답니다.

바로 교육방송 교사 모집의 오디션을 받기 위해 서지요.

중학교 과학 교사부문에 오디션을 받으러 온 교사는 모두 14명인데 그 중에 수도권 지역이 아닌 곳에서 온 사람은 단 한 사람, 저 혼자였어요.

모두들 대구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놀라시더군요.

다른 과목까지 합쳐 오디션을 받는 총 115명 중 지방에서 온 사람은 단 두 사람, 그 중에 한 사람이 저였답니다.

우연히 출연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신청을 하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그 해 바로 교단에 서서 15년 째 선생이라는 직업만으로 살아 온 저였기에 이력서라는 것부터 낯설고 자기 소개서를 쓸 백지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었던 지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고흐는 37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는 37살에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

라는 글로 시작하는 자기 소개서를 쓰면서 새삼 저를 돌아보는 기회도 되었구요.

제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큰바위 얼굴인지라 감히 TV, 라디오도 아닌 TV 출연에 신청을 한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잠만보인 제가 새벽 운동을 해야 할 정도로 한 몸무게 하는지라 더욱 더 말입니다.

어찌 보면 무식이 용감이 라는 말이 제게 꼭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제가 이제까지 늘 큰소리치던 것이 남 앞에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신청을 하고도 몸매가 문제지 강의가 문제라는 생각은 정말 눈꼽만큼도 안 했었답니다.

12월 19일에 오디션 날짜 연락이 왔는데 마침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더군요.

강의 주제를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울리는 것으로 정하고 자료도 이렇게 준비를 하구요.

제가 큰 일일수록 긴장을 하지 않는 특이 체질이라 큰소리치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4번째로 카메라 테스트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 평생에 정말 남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떨어 본적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강의는 엉망이 되어 버렸답니다.

중간에 다시 해도 된다고 했으면서 다시 하고 싶다니까 그냥 계속하라고 하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더 안되지 뭐예요.

진짜 그게 아닌데.

진짜 눈물이 확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겨우 카메라를 보며 하는 강의에 그렇게 긴장을 하다니.

제가 진짜 촌사람이라는 걸 절실히 확인하고 왔지 뭡니까?

대구 촌놈이 서울 와서 너무 얼었나 봐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것 때문에 계속 마음이 상해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죠?

그래도 목소리 괜찮다는 소리와 대구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표준어를 구사하느냐는 칭찬도 받았네요.

물론 절 위로하기 위한 말들이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이런 날에 대비하여 표준어 연습을 엄청해왔거든요.

경상도 토박이인 제가 따가운 눈총(?)을 받아가며 연습해 둔 보람을 오늘 듬뿍 느꼈지 뭡니까?

동생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 혼자 사진관에 갔었어요.

비록 강의는 잘하지 못했지만 방송국 스튜디오에도 가보고 카메라 앞에 서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 꿈에 한발 다가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 혼자 이 날을 기억하고 싶어서 기념 사진을 팍!! 찍었답니다.

제가 직접 사진을 찍는 것은 너무 좋아하면서 제가 찍히는 건 무지 싫어하는데 오늘은 정말 제가 생각해도 이변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공개까지 하다니. 우째 이런 일이!!!

사진사 아저씨가 왜 가방을 들고 찍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시더군요.

가방을 꼭 들어야 한다면 연두색 파일이라도 좀 빼고 찍으라면서 또 고개를 갸우뚱.

이쁘게 찍으려는 것이 아니니 그저 있는 대로 찍어 달라니까 그럼 뭐 하러 사진을 찍느냐며 너무 궁금해하시더군요.

그래서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인데 그 기념으로 찍는다니까 더더욱 이상하신가 봐요.

취직이 된 기념도 아니고 면접 기념이라니, 면접 가기 전에 이력서에 붙일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하시면서.

전 제가 새로운 일에 또 한 번 도전을 해 보았다는 걸, 오디션 보러 갔었던 그 차림 그대로, 강의 자료를 넣은 큰 가방을 든 그 모습을 남겨 두고 싶었어요.

강의를 잘 하지 못해 실망하고 더 이상 헛된 꿈을 꾸지 말자는 생각대신

'이렇게 한발씩 나아가는 거야. 언젠가는 내가 그리는 모습이 되어 있을 거야. 이건 그 때를 위한 준비고 연습이고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한 밑거름 일 뿐이야.'

라며 사진 속의 저에게 말을 해 봅니다.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쓰고 오디션 볼 준비를 했던 그 모든 과정이 교사인 저에게 더 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답니다.

그리고 혹여 제가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근을 갈 수도 있고 취업을 앞 둔 아이들의 담임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 때 저의 오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어요.

EBS 방송국에 출연 신청을 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저희 학교 학생들이었거든요.

개학을 해 저희 학교 아이들을 만나도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늘 생머리를 하고 있던 제가 미장원에 가서 거금 7,000원을 주고 머리카락 끝을 곱슬하게 말기까지 했답니다.

이 머리 스타일이 꽤 마음에 드는 것도 수확 중에 하나이지요.

그리고 잘하고 오라며 저를 가장 많이 격려해준 우리 예슬이와

엄마 대신 자기가 방송국에 가서

"저희 어머니는 아직 운동 중이거든요. 그래서 얼굴 작고 날씬한 정빈이가 어머니 대신 왔어요, 라고 이야기 해드릴까요?"

하며 서울 오는 내내 재롱으로 저를 격려해 준 정빈이에게 부끄럽지 않는 엄마가 되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