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결핍 아줌마가 소설 "가시고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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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의 사람들은 나를 "모성애결핍증 환자"라 부른다.
난 간혹 내가 정말 그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그럴 때면, 스스로 치유가 가능한 병이므로 빨리 이 병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갈등하기도 한다.
# 상황 1차안에서 먹는 저녁의 맛을 궁금해하는 아이의 표정은 환상의 나라를 동경하는 얼굴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밤 10시 이후에 가끔 아이 친구들의 전화를 받게 된 나.
원래 전화라는 기계 문명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밤늦은 시간에 가족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전화에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전화라고는 거실에 달랑 한 대뿐인 - 그것도 유선 전화기-우리 집
나 : 여보세요?
아이친구 : 예슬이 친구 ××인데요 예슬이 좀 바꿔 주세요.
딸아이 : 숙제는 5월 달 가족신문 만들기고 준비물은 여름 체육복. 그래, 내일 보자.
이처럼 숙제가 무엇이냐, 내일 준비물은 무엇이냐 등의 아주 일상적인 것뿐인 전화가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통씩 오는 것이다.
나는 딸아이에게 왜 그런 전화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느냐고, 숙제와 준비물을 지금 물어서 언제 하는지, 그 아이들은 선생님 종례 시간에 말씀해주시는 것들을 왜 안 적어 가는지…. 결국에는 잔소리처럼 되어버린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딸아이 : 개들은 학교 끝나면 바로 학원가요. 보통 두 세 개는 다니기 때문에 10시는 넘어서야 집에 가거든요.매일 그렇게 하니까 힘들어서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고 알림 장에 숙제랑 준비물 적는 것도 귀찮대요. 그래서 그냥 갔다가 저한테 전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는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가는 차안에서 저녁을 먹는 대요.
××이 어머니께서 매일 초밥이나 김밥, 아니면 햄버거, 그런 거 준비해서 학교 앞에 데리러 오거든요.
그렇게 먹는 저녁은 어떨까, 진짜 궁금한 거 있죠!
딸아이 : 어머니, 저도 학원에 다녀볼까요?나 : 어떤 학원?
딸아이 : 아이참,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어머니가 한 4개정도 골라서 저를 데리고 다니셔야지. 그러면 저도 차안에서 저녁을 먹게 될텐데.
나 : 야, 임마! 니가 다닐 학원을 왜 엄마가 골라. 니가 골라야지.
딸아이 : 제 친구들은 전부 개들 엄마가 학원도 고르고 시간표도 짠단 말이에요. 그냥 엄마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는 거지. 그런 걸 저희들이 어떻게 알아요.
나 : 그럼 개들은 학원 다니는 거 좋아하니?
딸아이 : 좋고 싫고 가 어디 있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 다니는 거지.
# 상황 2딸아이 : 어머니, 월요일인데 오늘 "허준"보면 안돼요?
나 : 안돼.
딸아이 : 요즈음 허준 안보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을 거예요. 허준 안보면 내일 아이들과 대화가 안 된단 말이에요.
나 : 그럼, 하지마.
차안에서 저녁이 먹고 싶어 학원을 다니고 싶은 딸아이.
학원이라고는 한 군데도 다니지 않고 자신의 표현으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주중에는 TV보는 것을 거의 허락하지 않아 아이가 친구들과 대화가 안 된다고 하는 대도 그럼 대화하지 말라고 하는 말에 입을 쑤욱 내미는 아이를 보면서 난 고민에 빠진다.
난 정말로 그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서른 여섯의 생일에 '가시고기'라는 책을 선물로 받았다.
솔직히 일반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인 나이기에 이런 종류의 책은 참으로 오랜만에 접하는 것이었다.
난 정말로 많이 울었다.
이 책을 읽는 이틀 동안 참 많이도 울었다.
왜 그토록 많이 울었을까?
그리고 단지 많이 울었다는 것으로 이 책이 내게 준 그 많은 것들이 제대로 표현되는 걸까?
이 책의 내용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거의 알고 있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백혈병을 앓는 아이와 그 아이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쏟아내는 아이아버지.
한마디로 부성애로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내게도 12살과 5살이 된 두 딸이 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부모가 자식 때문에 마음이 아파 보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그리고 지금도 많은 부모가 자식으로 인해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으로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아니지만 난 아마도 내 지난 슬픔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많은 눈물로 흘러나온 게 아닐까 싶다.
난 두 아이를 유산으로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 아이는 심한 하혈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또 한 아이는 성장을 멈춘 채 심장 고동소리만 우리에게 들려줄 뿐이었다.
우린 그 아이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빈이가 우리에게 왔다.
하지만 첫 아이 후, 7년을 기다려 얻은 작고 예쁜 아이는 선천성 심장병 가지고 있었고 3월에 태어난 아이는 그 해 8월에 서울대 어린이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아야했다.
병원에서의 생활.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병원에서의 생활들은 그 시절의 나를 생각나게 했다.
교대해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태어난 지 6개월 째인 아이.
6월9일 아이의 병명을 확인 후 지나온 시간들이 어떠했던가?
지방 병원에서의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느꼈던 그 절망감, 레지던트의 실수로 채혈한 피가 바뀌는 바람에 일어났던 소동, 그 무심한 의사의 얼굴...
아이가 다시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
점을 쳐보았더니 아이가 아픈 것이 에미의 업보 때문이라고, 다 내 탓이라며 내 가슴에 못을 박던 시누이.
월요일에 수술을 한 아이는 토요일이 되어도 깨어날 줄 모르고, 하루 두 번 면회 때 보는 아이 모습이라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계 장치들로 대학 시절 해부실 실험대 위의 작고 불쌍한 동물을 연상케 해 나를 아프게 하고.
토요일 퇴근 후에 아이를 만나기 위해 그 먼길을 달려 온 남편. 아이 침대 옆에 무릎꿇고 머리 조아려 어찌 그리도 많이 울던지.
"미안하다 아가야, 정말 미안해. 니가 이렇게 아픈 건 다 이 아빠 때문이야.
이 아빠가 널 정말로 많이 사랑하니까 이제는 깨어나 이 아빠를 좀 봐.
너한테 용서를 빌 수 있게 제발 눈뜨고 아빠를 좀 봐, 응, 아가야"
난 그 때 기적이라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마치 아빠의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떴고, 산소 호스를 물고 있어 고정시켜둔 머리를 돌리려 애를 쓰는 아이. 그리고 아이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던 그 눈물.
난 아이의 눈물에서 아빠를 용서한다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남편은 내가 어렵게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뱃속의 아이가 사내아이이기를 바랐다고 한다.
첫아이가 딸이고 그 사이에 두 번이나 힘겨운 일이 있고 어렵게 가진 아이이므로 꼭 사내였으면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러오는 나의 배를 볼 때에도 마음속으로 저 아이가 사내이기를 하는 눈빛이 되더라고.
남편은 아이가 아픈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
아이는 아빠가 사내아이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딸인 줄 알면 자신이 태어났을 때 예뻐하지 않을까 내내 걱정스러웠을 것이라고.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고.
그래서 병이 난 거라고. 어쩌면 아프기라도 하면 혹시나 아빠가 불쌍한 마음에서라도 자신을 예뻐할 거라는 생각에 자신의 의지에 의해 아픈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아이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와서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아이는 어쩌면 자신의 생명의 줄을 자신이 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빠를 기다리며 그 줄을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지, 힘없이 놓아버려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힘겹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퇴원 후 서울 병원까지 검진을 다녀야했던 시절.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서울행기차를 탄다.
기차 안에서는 좌석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보채는 아이를 업고 두 기차 사이의 연결부분에 서서 10시 30분에 서울역에 도착. 우유며 기저귀가 든 보따리를 들고 아이를 업고 뛰기 시작한다.
11시가 예약시간이기에 시간에 맞추려면 기차에서 내리면서 지하철역으로 최대한 빨리 뛰어야한다.
서울대 병원으로 가기 위해 오른 지하철 속에서도 맨 뒤에서 두 번째 칸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녀야 한다.
끝에서 두 번째 칸에서 내려야 가장 빨리 출구로 나갈 수 있기에.
지하철에 내려서도 또 뛰어야 한다. 서울대 병원의 오르막도 그 때는 어찌 그리도 높기만 하던지.
그렇게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도착하면 땀 범벅에 다리는 휘청 휘청거리고.
먼저 아이의 몸무게와 키를 재고 조그마한 쪽지에 적어 들고는 아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사들.
검사를 위해 수면제를 먹여야 할 때가 가장 힘들다.
아이는 그 때마다 잠을 이기려 몸부림을 치고 그 약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이 있는지 너무 힘들어하고.
깨어나는 순간에도 너무 고통스러워한다.
어떨 때는 예상 시간이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아이를 보며 이렇게 영원히 끝이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병원 구석에 아이를 안고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모든 검사가 끝나고 결과를 보고는 다음에 올 날을 예약하고, 한 보따리나 되는 약을 받아서는 또 다시 서울역으로 달려 가야한다.
대구로 오는 기차 안에서는 아이는 갈 때보다 날 더 힘들게 한다. 그렇게 오고 간 길이 얼마였던가?
아이는 병원에 갈 때마다 기차를 타고 간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있어 기차는 결코 낭만적이지 못하다. 기차는 '병원 갈 때 타는 차' 그뿐이다.
이제는 말을 잘 하는 아이는 '서울행' 기차의 모두가 병원을 향하고 있는 줄 안다.
그래서 남 걱정까지 한다.
'저 아가는 주사를 맞고 엉엉 울 거야.'
'저 아저씨는 수염이 많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혼날 거야.'
그리고 자기 걱정도 한다. '의사 선생님이 또 오라고 그러면 어쩌지' '이번에도 사진 찍어야 될까?' '잠자는 약 먹어야 돼요?'
'대구행' 기차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에게는 병원을 퇴원해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기쁘니 아이 눈에 보이는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가 보다. '저 아가는 이제 좋겠다.' '저 언니야는 학교에도 가겠네.'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면서 좀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렇게 어렵게 살린 자식이라면 땅에 놓기도 아까울 텐데… 하면서.
# 상황 3지리산 하늘 아래 첫 동네, 모두 여섯 가족인 우리 일행이 예약한 민박집은 생각보다 허술했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재래식 화장실.
모임의 회장은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옆에 새로 지은 양옥집의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며 걱정 말라고 한다.
우린 우리 아이들에게 재래식 화장실에 갈 것을 약속 받는다.
회장은 이미 돈을 다 치렀으니 돈걱정 말고 옆집 화장실을 쓰게 하란다.
우린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지만 우리 딸들은 다르다.
'엄마가 왜 굳이 저 냄새나는 화장실을 쓰라고 하는지 우리 아가들은 알까 몰라.
사람이 살다보면 늘 깨끗하고 좋은 환경에서만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물론 그러면 제일 좋겠지만 말이야.
엄마는 너희들이 우리와, 나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이런 것들을 경험해 보기를 바래.
그러면 나중에 너희 혼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우리와 함께 했던 기억으로 잘 견뎌내리라 믿거든.
엄마가 냄새나는 화장실 앞에서 널 기다려 주잖아.
나중에라도 늘 엄마가 널 지켜주며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거든.'
아이는 싱긋이 웃는다. 그 아이는 우리 마음을 안단다. 그럼 그렇지.
작가는 아마도 다움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하여 이 시대의 부모상을 이야기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난 이 책을 통해 이 시대 두 가지 유형의 부모를 보게 된다.
다움이 아버지와 같은 부모, 다움이 어머니와 같은 부모.
"솔직히 말하자면 다움이의 재능에 욕심이 생기오. 아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소. 그래서 더더욱 아이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 일테구요."아이가 자신을 더 닮았다고 말한 아내의 저의를 비로소 짐작할만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논리였고, 불순한 의도였다.
아이의 재능이 아니라면 딱히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다는 뜻인가..
다시 무균실에 갇혔습니다.그제부터 열이 오르고 계속 기침이 났어요. 감기에 걸린 거죠.며칠 전 병실이 너무 덥다고 엄마가 히터의 구멍을 막아 놓았기 때문이에요.
아빠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빠는 의사만큼 내 병에 대해서 척척박사니까요.
감기는 나를 죽일 수도 있어요. 내 몸에는 아직 감기를 옮기는 세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부족하거든요.
"최고의 위치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최고의 인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어요.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두고 무턱대고 불행하리라 단정짓는 것 처럼요. 그리고 아이는 내가 알아서 키워요."
나는 위의 대목들에서 대비되는 두 부모를 보았다.
아이를 알고 아이를 위하는 방법을 아는 부모와 자신의 꿈을 아이에게서 꾸는 부모. 과연 우리의 위치는 어딜까?
나는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한번씩 가슴 가득 꽃을 안겨주고, 함께 여행을 하고, 책을 읽어주고, 손잡고 산책을 하고 오락실을 갈 뿐이다.
난 그래도 아이는 잘 큰다고 믿는다.
아이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한은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원하면 무엇이든 시키겠지만 아이는 빈둥빈둥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영 내켜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차안에서 저녁을 먹고 싶은 유혹에 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지만.
다섯 살 된 둘째 아이 역시 집에서 빈둥거리며 논다.
주변의 사람들이 오전에 아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아주 놀라워하곤 하는데 난 의도된 교육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에 자신이 놀고 싶어할 때까지 놀릴 작정이다.
아이는 놀면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믿기에.
왜 내가 '모성애 결핍증 환자'로 불려지는지 조금 이해가 갈 것이다.
이번 어린이날에는 온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둘째 아이가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결정 된 여행이었다.
둘째 아이는 만장굴 왕복 2㎞를 걸으면서 만장굴의 이름을 '자석동굴'이라고 지어주었다.
박쥐가 살고 있다는 설명이 방송을 통해서 나오자 아이가 즉석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박쥐가 붙는 자석 동굴. 큰 아이가 박쥐같은 생물체가 붙는 자석동굴이면 우리는 왜 안 붙느냐고 하니까 바닥에는 안 붙는단다.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서 자석은 물이 있는 곳에서는 자석의 성질을 잃어버린다고.
난 아이의 어휘력에 놀랐고, 나름대로의 조리 있는 설명에 흐뭇했다.
어허 빈둥 공주(둘째의 동네 별명, 또 한가지는 방안 공주)가 제법인걸.
난 세상의 많은 부모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아이를 아는 부모가 되자고.
사실 나도 많이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함께 노력하자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아이가 무얼 하고 싶어하는지, 자신을 향해 무얼 말하고 있는지 눈맞추고 들어주고 귀 기우려 들어주자고.
이 아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장래성이 있느냐로 아이를 보지 말고, 아이를 무엇으로 만들겠다고 꿈꾸지 말자고.
자식을 죽음의 문턱까지 보내 본 내가 얻은 교훈이다.
자식은 내 옆에서 살아 숨쉬어 주는 것으로, 오직 아침마다 두 눈을 떠 날 보아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세상에 많은 엄마들은 모르는가 보다.
그래서 난 역시 복 받고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아픈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알았을까, 생각하니 다행이다 싶다.
가시고기는 이상한 물고기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엄마 가시고기는 알들을 낳은 후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려요. 알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요.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 남아서 알들을 돌보죠. 알들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답니다.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알들을 보호해요.
알들이 깨어나고 새끼들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리고 새끼 고기들은 아빠 가시고기를 버리고 제 갈 길로 가 버리죠.
새끼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아빠 가시 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려요.
아빠 가시고기는 왜 죽어버리는 걸까요. 그 이유가 책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요?
가시고기는 언제나 아빠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가시고기가 있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슬픔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요.
아, 가시고기 우리 아빠!
그만큼 이 책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것일 테지.
그런 글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우리에게 부성애의 감동을 안겨준다는 것으로 이 대목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난 이 대목에서 가시고기의 생태적인 특징으로 지금과 미래의 우리 사회상을 한 번 이야기하고 싶다.
가시고기는 암컷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람처럼 집을 장만하고 단장하는 독특한 물고기라고 한다.
그리고 암컷은 알을 낳고는 떠나버리고 알들을 지키고 부화 후 치어를 돌보는 일은 수컷이 한다.
이 책에서는 가시고기의 암컷이 알을 낳고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알들을 돌보지 않고 수컷이 그 역할을 한다는 생태적인 특징을 주인공 정호연의 부성애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의 문학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늘 어머니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던 실정이었고, 그 사회의 문학이 그 시대의 무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리의 문화와 정서에서는 자식을 기르는 것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 자본주의 사회로 오면서 아버지란 존재가치는 경제적인 요소를 필수적으로 포함한 것이 되어버렸다.
경제력이 대분 분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사랑.
하지만 우린 가시고기의 암컷들이 왜 자신의 알들을 돌보지 않느냐 에도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책 속에서 아이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엄마 가시고기는 알들을 낳은 후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려요. 알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요."'달아난다'는 것과 '떠난다'는 것의 의미 차이는 엄청나게 클 수도 있다.
물론 책 속의 아이는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에 대한 감정이 겹쳐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한 보고에 따르면 가시고기의 암컷과 수컷의 성비가 1 : 1.9라고 한다.
놀라운 조사 결과가 아닌가. 암컷에 비해 수컷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산란기의 약 50여일 동안 암컷들은 2 - 3회의 산란 후 죽는다.
그런 불균형의 성비로도 아직까지 멸종을 하지 않다니, 그들 종족은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니면 지금 멸종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일까?
이런 가시고기의 생태에서 혼자 섬짓함을 느낀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겹쳐지면서 나의 걱정은 커져만 가는 것이다.
남편이 그랬듯이 우린 태어난 자식의 장래에 기대를 가지듯이 태어날 아이의 성별에 대한 기대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기대로 우리는 많은 딸아이들의 생을 꺾어가면서 아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가시고기의 수컷들은 왜 암컷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람처럼 집을 장만하고 단장하는 것일까?
다른 물고기들이 하지 않는 짓을 혼자서 할까?
이건 자신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암컷을 통해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생의 몸부림은 아닐까?
딸의 생명까지 꺾어가며 낳아 기른 아들들이 장가 한 번 가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남보다 더 좋은 집을 장만하고, 남보다 더 많은 혼수를 장만해야하는 시대를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여자아이의 수가 남자아이들의 수에 비해 모자라 돌아가면서 남자아이와 짝을 한다고 한다.
요즘말로 아들 낳으면 자가용 타고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의 귀한 딸들이 가시고기의 암컷처럼 자신의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시절이 오지는 않는 것인지.
나의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지만 난 가시고기의 생태에서 이런 생각을 못내 떨쳐버리기 어렵다.
가시고기의 암컷은 알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멸종의 위기를 면하기 위한 면죄부를 쓰고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떠나는 것은 아닐지.
가시고기는 한해살이 물고기다.
암컷은 알을 낳고 버린 뒤 자신만의 이상을 향하여, 혼자서 여유 있게 생을 누리다가 우아하게 그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산란을 위해 50여일 동안 2번 많게는 3번의 산란으로 좀 더 많은 수컷에게 수정의 기회를 주고 그럼으로써 지구상에서의 자기 종족의 멸망을 막는 최후의 전사처럼 쇠잔하여 죽어 가는 것은 아닐는지.
가시고기의 암컷은 남아서 새끼를 돌보는 아비 가시고기의 수고보다 더 힘겨운 생의 무게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아서 지켜주는 수고보다 떠남으로서 그 종족의 보존이라는 더 큰사랑을 남기는 것으로 보고 싶은 것은 왜일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신도 아비 가시고기가 되고자 결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끼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아빠 가시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려요.'의 아빠 가시고기가 되고자 결심할 뿐 자신이 떠나온 새끼 가시고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했던가?
우리를 떠나보내고 돌 틈에 머리를 박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아버지 가시고기. 우린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이가 두 번째 입원했을 때 한 간호사의 말이 생각난다.
그 간호사는 2개월 간격으로 노인 병동과 어린이 병동을 오가며 근무하는데 자신은 이 두 병동을 오가면서 인생사의 허무를 참으로 많이 느낀다고.
그러면서 어린이 병동의 엄마들이 불쌍할 때가 많단다.
노인 병동은 병실비, 특히 중환자실비 등 많은 부분에서 어린이 병동 보다 비용이 적게든단다.
그런데도 노인병동에서는 연일 병실 복도나 그 부근에서 자식들 간에 부모의 병원 비를 두고 사소한 다툼이 끊이질 않는단다.
"내가 맏이라고 다 부담해야할 이유가 있느냐? 딸도 자식이니까 너도 좀 보태라."
"형이 재산을 더 물려받았으니 더 내야할 거 아닙니까?"
"우린 막내인데 형들과 같이 낼 수 없어요."
"출가외인이라고 친정 살림에 간섭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돈이 필요하니 딸자식도 자식이라고 하시면 곤란해요."
심지어는 살만큼 살았으니 자식들 생각해서 그냥 퇴원하자는 말을 하는 자식들도 많고 자식 앞에서는 그러마 하고서는 밤새 통곡을 하는 노인들도 수없이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 병동에 오면 많은 젊은 부모들이 자기 몸의 일부를 팔아서라도 아이를 살리겠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수없이 보게되는데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단다.
"저 사람들도 저렇게 해서 자식 살려 키워 놓은 뒤, 나중에 늙고 병들어 노인 병동에 입원하면 자기를 살리려고 아버지 어머니가 어땠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퇴원하자고 조르는 자식 앞에서 어떤 심정이 들까?
어릴 때는 병들어 죽어 가는 자식 살리려 몸부림치고, 늙고 병들어서는 다 큰자식 돈 아껴줄려고 자기를 포기해야하는 부모.
자기도 당장 병원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일텐데.
아이 교육비로도 허리가 휠 지경에 늙은 부모 병치레까지 해야한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 참 허망하다 싶죠."
어제 병원 비 없다고 어머니를 퇴원시켜간 그 젊은 사람이 오늘 아이가 큰 병을 얻어 입원을 한다면 병원비가 없으니 나가자고 아이를 들쳐업을까 하는 생각에 몹시 마음이 아프다고.
난 잠시 생각해본다.
소설 속의 가시고기 아빠 장호연이 살리고 싶은 사람이 10살 짜리 아들이 아니라 70이 된 아버지였다면?
70이 된 아버지를 위해 한 쪽 눈을 팔아야하는 아들을 그리고 있다면.
이 시대의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결심하는 많은 아버지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운동 본부도 있다는데 그 아버지들 모두가 자신들이 떠나온 새끼가시고기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
좋은 아들 되기 위한 운동 본부는 있는지 확인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우린 자신이 아비 가시고기가 될 수 있는 건, 자신을 떠나보낸 또 다른 아비 가시고기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식을 향하여 결심하고 의식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
떠나온 우리들의 아비 가시고기를 향하여 우러나오는 마음을 보낸다면 어떨까 싶다.
우리가 떠나온 아비 가시고기를 향해 마음의 눈길을 돌린다면 떠나는 우리 아이들도 우리의 등을 향해 마음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까.
난 모성애 결핍증 환자이다.
난 내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을 준다.
어쩌면 우린 더 큰사랑을 위해 떠나는 어미 가시고기처럼 아이들을 세상에 던져둘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바로 내가 가시고기이다.
난 알만 낳고 떠날 수밖에 없는 어미 가시고기이고, 자신이 떠나면 아비가 죽을 줄 알면서도 떠나는 새끼 가시고기이고, 새끼를 떠나보내고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죽는 아비 가시고기인 것이다.
모성애 결핍증 환자인 내게 소설 '가시고기'는 지금 내 자신이 이 병에서 벗어나야 할 지에 대한 갈등을 어느 정도 씻어주었다.
2000년 5월 어린이날을 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