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모성애 결핍증 환자 서울대 어린이 병원에 가다!
착한재벌샘정
2003. 6. 9. 11:22
쿨쿨, 잠자느라 몰랐는데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나 보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겠지만 먼길을 가야하는 우리에게는 길에 내려 얼어붙은 눈이 좀 야속하다.
26일은 정빈이의 정기 검진 일이기에 아이와 나는 25일 새벽 기차를 타야했다.
연휴라 기차표를 구하기가 힘들어 새벽에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표를 겨우 구하였기에.
아이가 병원에 가야하는 날이 가까워 오면 난 솔직히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애써 감추려 하지만 말이다.
아이는 기차 이야기만 나오면 병원에 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보다.
"정빈이는 좋겠네. 어머니랑 기차 타고 서울 준익이 오빠네 집에 가고. 아버지도 가고 싶다."
아이 아버지도 애써 자기 마음도 달래려, 아이 마음에도 신경을 써 보지만 아이는
"병원에 가는 거 다 알아요. 기차는 병원 갈 때 타는 거잖아요. 난 주사 맞는 거는 싫지만 그래도 병원에는 가야 되요. 아버지는 없죠. 난 수술점이 있는데. 이건 예쁜 아이들만 있어요. 수술 점! 하이 홈 점! 그렇죠 어머니?"
아이는 티셔츠를 올려 자신의 가슴 가득 있는 수술 자국을 내보이며 TV광고에서 홈페이지 제작 사를 광고했던 채림의 흉내를 낸다.
수술 점, 하이 홈 점, 하며 웃는 아이 모습은 밝고 화사하기까지 하다.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기차 안에서도 아이는 원래의 쾌활함을 잃지 않고 기차 안의 모든 사람들을 걱정해준다.
아이에게 있어 기차를 탄 사람들은 모두 자기처럼 병원을 향하는 사람들이기에.
정빈이는 참 밝은 아이다.
오랜 병원 나들이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X-선 검사를 할 때에는
"아저씨, 예쁘게 찍어 주세요."
하는 부탁까지 하는 아이이다.
우린 어제 밤늦게 둘 다 지쳐 대구로 돌아 왔다. 그래서 이 글도 하루 늦은 오늘(27일)에야 올리게 되었다.
1월 3일 다시 기차를 타야하는 우리 정빈이.
그날은 핵의학 검사를 비롯해 또 몇 가지 검사를 해야한다.
태어나 이제까지 수 없이 탔던 서울행 기차.
난 기차 여행의 낭만을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아이는 그래도 싫다고 떼 한번 쓰지 않고 잘 따라다니며 자신의 타고난 쾌활함으로 내게 도리어 힘과 용기를 주곤 한다.
이번에는
"어머니, 병원에 데리고 와 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어머니 아프면 제가 업고 병원에 데리고 올게요. 어머니 늙으면 제가 똥도 닦아 드리고, 시장도 제가 보고할게요."
하며 귀염을 떤다.
난 또 한 번의 꿈을 가져 본다.
다음 검사 결과가 좋아서 이제는 서울행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되기를.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유민이와 유민이 어머니 생각이 몹시 났다.
96년 여름과 가을을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던 유민이는 97년 5월 8일 천사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태어나 6년을 살면서 그 삶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만 살았던 아이였다.
참으로 예의바르고 총명했던 아이.
엄청난 약물의 투약으로 입맛이 없던 아이는 매끼를 꼬박꼬박 먹는 나를 '이상한 아줌마'라 부르며 깔깔 웃곤 했던 아이.
어떻게 그렇게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느냐며 이상하다며 또 웃던 아이.
그런 유민이를 지켜보던 유민이 어머니.
아이가 얼마 살지 못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프지 않는 아이들과 똑같이 키우려 한다던 사람.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나약한 생명 줄을 가지고 다섯 살이 되도록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아이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을 텐데도….
유민이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존댓말을 가르치고, 예의바른 행동들을 가르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 번씩은 눈물이 날만큼 혼을 내기도 하고.
유민이의 어머니 말씀이 생생하다.
"난 저 아이로 하여금 사랑을 더 가지게 되었어요.
비록 저 아이가 알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지만 저 아이를 통해 그 병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저 병에 걸린 또 다른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난 저 아이에게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어요. 그저 아픈 아이라고 눈물과 가슴 아픔만을 보여주기는 싫어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저 아이의 삶이 그저 환자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인생이 되게 해주고 싶어요."
나도 우리 정빈이를 아픈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키우려 한다.
하지만 서울행 기차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지는 걸 어떡하랴.
모성애 결핍증 환자도 때때로는 눈물이 날려고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겠지만 먼길을 가야하는 우리에게는 길에 내려 얼어붙은 눈이 좀 야속하다.
26일은 정빈이의 정기 검진 일이기에 아이와 나는 25일 새벽 기차를 타야했다.
연휴라 기차표를 구하기가 힘들어 새벽에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표를 겨우 구하였기에.
아이가 병원에 가야하는 날이 가까워 오면 난 솔직히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애써 감추려 하지만 말이다.
아이는 기차 이야기만 나오면 병원에 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보다.
"정빈이는 좋겠네. 어머니랑 기차 타고 서울 준익이 오빠네 집에 가고. 아버지도 가고 싶다."
아이 아버지도 애써 자기 마음도 달래려, 아이 마음에도 신경을 써 보지만 아이는
"병원에 가는 거 다 알아요. 기차는 병원 갈 때 타는 거잖아요. 난 주사 맞는 거는 싫지만 그래도 병원에는 가야 되요. 아버지는 없죠. 난 수술점이 있는데. 이건 예쁜 아이들만 있어요. 수술 점! 하이 홈 점! 그렇죠 어머니?"
아이는 티셔츠를 올려 자신의 가슴 가득 있는 수술 자국을 내보이며 TV광고에서 홈페이지 제작 사를 광고했던 채림의 흉내를 낸다.
수술 점, 하이 홈 점, 하며 웃는 아이 모습은 밝고 화사하기까지 하다.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기차 안에서도 아이는 원래의 쾌활함을 잃지 않고 기차 안의 모든 사람들을 걱정해준다.
아이에게 있어 기차를 탄 사람들은 모두 자기처럼 병원을 향하는 사람들이기에.
정빈이는 참 밝은 아이다.
오랜 병원 나들이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X-선 검사를 할 때에는
"아저씨, 예쁘게 찍어 주세요."
하는 부탁까지 하는 아이이다.
우린 어제 밤늦게 둘 다 지쳐 대구로 돌아 왔다. 그래서 이 글도 하루 늦은 오늘(27일)에야 올리게 되었다.
1월 3일 다시 기차를 타야하는 우리 정빈이.
그날은 핵의학 검사를 비롯해 또 몇 가지 검사를 해야한다.
태어나 이제까지 수 없이 탔던 서울행 기차.
난 기차 여행의 낭만을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아이는 그래도 싫다고 떼 한번 쓰지 않고 잘 따라다니며 자신의 타고난 쾌활함으로 내게 도리어 힘과 용기를 주곤 한다.
이번에는
"어머니, 병원에 데리고 와 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어머니 아프면 제가 업고 병원에 데리고 올게요. 어머니 늙으면 제가 똥도 닦아 드리고, 시장도 제가 보고할게요."
하며 귀염을 떤다.
난 또 한 번의 꿈을 가져 본다.
다음 검사 결과가 좋아서 이제는 서울행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되기를.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유민이와 유민이 어머니 생각이 몹시 났다.
96년 여름과 가을을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던 유민이는 97년 5월 8일 천사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태어나 6년을 살면서 그 삶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만 살았던 아이였다.
참으로 예의바르고 총명했던 아이.
엄청난 약물의 투약으로 입맛이 없던 아이는 매끼를 꼬박꼬박 먹는 나를 '이상한 아줌마'라 부르며 깔깔 웃곤 했던 아이.
어떻게 그렇게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느냐며 이상하다며 또 웃던 아이.
그런 유민이를 지켜보던 유민이 어머니.
아이가 얼마 살지 못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프지 않는 아이들과 똑같이 키우려 한다던 사람.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나약한 생명 줄을 가지고 다섯 살이 되도록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아이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을 텐데도….
유민이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존댓말을 가르치고, 예의바른 행동들을 가르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 번씩은 눈물이 날만큼 혼을 내기도 하고.
유민이의 어머니 말씀이 생생하다.
"난 저 아이로 하여금 사랑을 더 가지게 되었어요.
비록 저 아이가 알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지만 저 아이를 통해 그 병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저 병에 걸린 또 다른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난 저 아이에게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어요. 그저 아픈 아이라고 눈물과 가슴 아픔만을 보여주기는 싫어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저 아이의 삶이 그저 환자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인생이 되게 해주고 싶어요."
나도 우리 정빈이를 아픈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키우려 한다.
하지만 서울행 기차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지는 걸 어떡하랴.
모성애 결핍증 환자도 때때로는 눈물이 날려고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