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도와주고 많이 기다려주세요
레고도 정빈이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장난감인데 한 번 시작하면 너무 몰입을 해 몸살이 나서 누울 정도로 하는 아이라 숨겨두었다가 가끔씩만 주어야 합니다. 오랜만에 정빈이는 좋은 햇살 아래 레고를 가지고 놀고 저는 그 곁에 앉아 햇살을 즐기며 한낮을 보냈습니다.
지난 주 일요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산행을 했었습니다. 4시간의 산행. 올라갈 때는 정상에서 먹을 컵라면 때문에 열심이었던 정빈이는 내려올 때는 결국 남편의 등에 업혀야 했고요.
이번 주에도 산에 가고 싶었지만 예슬이가 세상의 중심(?)인 남편이 예슬이 없이는 가지 않겠다는 바람에 베란다에 앉아 산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답니다. 예슬이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친구 만나러 갔거든요. 가끔은 그런 예슬이에게 엄청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과 예슬이, 저와 정빈이로 편(?)이 갈릴 때가 있어요. 호호호
이제는 저 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크고 더 이쁜 여고 1년생의 딸에게 질투를 느끼는 제가 정상인 거 맞죠?
정빈이의 학예회와 대회 이야기를 좀 할까 해서 글을 쓰고 있답니다. 정빈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이올린 연주인데 정빈이는 학교에서의 연습이 힘이 들어 몸살을 몇 번이나 해가면서, 입술이 아래 모두 다 터져가면서 학예회와 합주단 대회 준비를 해었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 많이 안쓰러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은 작지만 무척 아름다웠답니다.
합주단 단복을 받아와서는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난 아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세상에나, 합주단 단복 중 블라우스를 입고 잠을 잤지 뭡니까? 너무 좋아서 집에서도 자주 입고 놀곤 했는데 자면서 까지 입을 줄은 몰랐거든요. 드레스는 여전히 싫어하는데, 올해도 드레스가 아닌 편안한 체육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가고 싶다는 이야기는 잊지 않고 하더군요. 합주단 단복을 입은 정빈이입니다. 무척 어른스러운 모습이죠?
체육복이 좋다면서도 드레스를 입고도 이제는 잘 웃는 정빈이입니다. 정빈이 스스로 ‘엽기’라고 이름 붙인 모습입니다.
그래도 연주할 때는 진지하기만...
학예회는 잘 지나갔는데 며칠 뒤에 있은 대회 날 아침 예기치못한 일이 생겼답니다. 단복의 재킷을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대회 날 아침, 재킷을 찾느라 정말 혼을 쑥 빼야했는데 문제는 결국 찾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없다는 거예요.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집에는 없으니 학교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 혹시 음악실에 벗어 두고 왔나 싶어 학교 음악실로 달려갔지만... 없더군요.
결국 재킷은 찾지 못했고 할 수 없이 지도 선생님을 찾아 가 의논을 드렸더니 졸업한 아이가 입던 것을 받아 놓은 것이 있다면서 내어주시는데....
어찌나 큰 지 한 덩치 하는 제가 입으면 맞을 것 같은 크기지 뭡니까?
이 과정에서 정빈이가 보여준 반응입니다. 찾다가 찾다가 학교 음악실에라도 가보자는 제게 이러는 겁니다.
“꼭 중요한 것은 찾을 때는 안보여요. 이러다가 대회 끝나고 나면 잘 보인다니까요. 제가 놀 때도 그렇거든요. 꼭 필요해서 찾을 때는 안보이다가 그 놀이 끝나고 다른 놀이해서 필요 없을 때는 눈에 보이고. 재킷도 중요한 제 장난감처럼 대회 끝나고 나면 옆에 떠억~~~ 보이고... 그렇지 싶어요.”
제가 웬만한 일에 열을 내지 않는 사람인데 그날 정빈이는 저보다 한술 더 뜨는 것 같았답니다. 어떡하느냐고, 대회 못 나가면 어쩌냐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 듯한데....제 곁에서 도리어 저를 위로(?) 내지는 안정(?)시키는 것 같았답니다.
선생님이 건네주신 엄청난 크기의 재킷을 걸쳐보더니, 정빈이가 세 명은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재킷을 걸치더니 하는 말이 이러는 겁니다.
“긴 소매는 안으로 접어 넣어 옷핀을 꽂으면 되겠어요. 앉아서 연주를 할 거고 저는 맨 앞도 아니니까, 뒤에 앉아 있어서 이렇게 큰 거 입어도 표도 안나니까 괜찮아요.”
결국은 졸업생에게 얻은 재킷이 하나 더 있다는 친구의 것을 빌려 입게 되었답니다. 그것도 역시 컸지만 선생님이 주신 것에 비하면 너무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답니다. 사람의 만족이 상대적이라는 중요한 인생의 철학도 새삼 깨달았답니다.
그렇게 한바탕 왔다갔다하고 난 뒤 출근을 했답니다. 일을 가진 엄마들은 아마도 그 아침이 눈에 그려지실 겁니다. 나중에는 다리가 다 후둘거리더라니까. 그러면서 피식 웃음이 나는 거예요. 정빈이는 생긴 것과는 달리 참으로 느긋한 성격이거든요. 대담하기도 하고요. 예민하게 구는 부분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정빈이는 저를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출근을 해 선배에게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그런 상황에서 옷을 제대로 안 챙긴 것에 대해 고함한 번 지르지 않고 아이와 함께 찾으러 다닌 저와 정빈이 둘이 똑같다더군요.
집에서 도저히 찾지 못해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제가 정빈이에게 한 말입니다.
“오늘 아마 대단한 연주회가 될 거야. 너희 합주단 단원들이 긴장할 것을 정빈이가 대표로 혼자 다 해치우고 있는 것 같아, 그지? 그러니 모두들 멋진 연주를 할 거 아냐? 정빈이 재킷은 아마도 어딘가에 꼭꼭 숨어서 이러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 우리가 어쩌나 싶어서. 하지만 우린 이렇게 씩씩한걸 뭐. 하지만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것은 좋지 않아.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같은 실수가 계속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거 알지? 이제부터는 정빈이가 물건을 잘 챙겼으면 좋겠다.”
정빈이는 그날 태어나서 가장 큰 무대에 서 보았답니다. 19개 학교가 참가한 학생문화회관의 큰 무대는 정빈이를 무척이나 가슴 벅차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대에 올라가니까 정말 좋았어요. 배가 이상하게 당기서 좀 그렇기는 했지만. 저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게 좋아요.”
우리 아이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대처하는, 해결해 가는 자신만의 철학을 키워가도록, 조금 도와주고 많이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