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간직하는 대신 기부의 기쁨을 선택했어요.
방학식을 하고 인터뷰가 있어 바로 서울에 갔다가 새벽에 도착해서는 잠깐 눈을 붙이고 강의 준비하여 충북 보은중학교를 다녀왔습니다. 저녁 6시 반이 되어서야 대구에 도착하여 4시부터 열리고 있다는 회의에 늦게라도 참석하기 위해 급하게 교육청으로 달려가 갔고,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온 집에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주방 쪽에서는 연기까지 나는 것이....
그런데 주방에서 얼굴을 쏘옥 내미는 정빈이가 하는 말.
"브라우니를 만들려고 했는데 시간 조절을 잘못해서 완전 타버렸어요."
정빈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접시에 타서 눌러 붙어버린 거 보이시죠?^^
바쁜 엄마덕분에 스스로 저녁 간식으로 만들어 먹으려던 것이 저렇게 되어서 많이 속이 상한 모양이에요. 상한 아이 맘 달래주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었어요. 비록 온 집을 연기와 냄새에 휩싸이게 했지만 스스로 잘 해보려다 그렇게 된 것이고, 정빈이 자신도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어요. 어른도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역시 저희 정빈이다 싶은 것은 실패한 것을 뒤로 하고 그 연기 속에서 다시 재시도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멋진 아이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팔불출 한 번하니 이해해주셔요.ㅎㅎ
그 다음 걱정 되는 것은 이웃들이 혹여 불이라도 난 것이 아닐까 하며 불안해하고 계시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진짜 저희 위층에서 불이나 새벽에 대피를 하고 사람이 다친 일이 있었기에 이웃주민들이 놀라셨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걱정하시지 말라는 방송을 하기도 곤란해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일단 현관문을 제외한 집의 모든 문을 열어 최대한 발리 환기를 시키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았어요. 결국 그날 저희들은 현관문만 빼고 모든 문을 열어 둔 채 전기장판에 의존하고 자야만했답니다. 작년 수도관 동파 사건에 이은 두 번째 혹한 체험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몸살이 단단히 나버렸습니다. 하지만 연말에 하리라 미루어두었던 일을 안 할 수는 없어 일을 시작했지요. 1년에 두 번 이상은 아름다운 가게에 책이며 옷 등을 기부하는데 이번에는 제가 너무 바쁘다보니 미루고 미루다가 연말이 코 앞에 와서야 하게 되었어요. 이틀 동안 몸살이 난 상태에서 대청소겸 정리를 하느라 정빈이와 둘이서 고생을 심하게 했답니다. 집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지요.
그리고 이틀의 고생 덕분에 저희 집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반짝반짝.^^ 제가 청소에 소질이 있는 사람인지라....ㅎㅎ
아름다운 가게에 미리 예약하는 것을 깜빡한 결과 기부할 물건들을 며칠간 아파트 층간에 두게 되었답니다. 제가 새해 첫 주에도 일정이 빡빡하여 물건을 가지러 오시는 분과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미리 층간 계단에 내어 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 아파트가 20년이 넘은지라 층층이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아 10층과 11층 사이에 공간이 있거든요. 처음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물건들을 두었답니다.
잘못된 부분 발견 하셨죠? 소화전 앞에다 물건을 놓아두면 안되잖아요.ㅠㅠ 그래서 이렇게 위치를 바꾸어놓았어요.
위치를 조금 바꾸었지만 그래도 소화전 부근이니 최대한 빨리 가져가셔야 할 텐데... 어르신들이 많으신데다가 층수가 높아 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웃에게 이해를 부탁드리는 메모도 남겨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인 물건을 공동의 장소에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까요.
이번에는 몇 번을 벼르던 물건들까지 정리를 했더니 그 양이 만만치가 않아요. 책은 이번에는 평소보다는 적은 200권 조금 넘기는 권수이지만 옷이며 신발, 그 외의 물건들이 제가 생각해도 많은 양이더군요. 아이들이 크기도 했고, 특히 정빈이의 노란 축구공과 안전모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결국에는 내놓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추억을 없애는 것 같아서요. 아버지와 같이 축구하는 것을 좋아하던 정빈이에게 노란색 축구공은 추억이 많은 물건이거든요. 인라인을 배우고 자전거를 배우며 썼던 노란색 안전모도 정빈이에게는 많은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는 것을 알기에 몇 번이나 내놓을까, 고민을 하다 그래도...., 하면서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곤 했던 물건들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기부를 선택했답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 물건의 제 역할을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요.
책도 한 때는 제게 있어 추억이고 삶이고 자랑(?)이었고 뿌듯함이었어요. 책장이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있을 때의 그 행복감이란...
최인훈의 '광장'의 이 대목을 너무 좋아했었거든요.
<책장을 대하면 흐뭇하고 든든한 것 같았다. 알몸뚱이를 감싸는 갑옷이나 혹은 살갗 같기도 하다. 한 권씩 늘어갈 때마다 몸속에 깨끗한 세포가 한 방씩 늘어가는 듯한, 자기와 책 사이에 걸친 살아있는 어울림을 몸으로 느끼는 무렵이었다. 두툼한 책 마지막 장을 닫은 다음,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눈에는, 깊은 밤 괴괴한 풍경이, 무언가 느긋한 이김의 빛깔로 색칠이 되곤 했다.>
그래서 결혼해 제일 목돈을 들여 장만한 것도 거실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책장이었고, 몇 번의 이사에도 끌어안고 다녔던 그 많은 책들. 하지만 그것 역시 욕심이고 사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과감히 책이 가득한 책장을 내 가슴속에서 비워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방과 아이들방의 책장에 빈 공간들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아름다운 가게에 책장도 하나 기부하게 되었고요.
가끔은 다시 읽고 싶은 책을 찾아 도서관을 가거나 결국 구하지 못해 새로 사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하지만 가득 찬 책장 앞에서 느꼈던 '이김의 빛깔' 대신 누군가와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책들이 떠나고 난 뒤 비어 있는 책장에서 느끼는 설렘이 저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또 다시 채워질 것에 대한 셀렘이랄까요.
지난 해 게으름을 피운 덕분에 2012년 저는 떠나보내는 기쁨과 비어있음의 미학을 즐기며, 그리고 새롭게 채워질 설렘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해 늘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