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사랑, 결혼하면 끝일까?

<연제 12>사랑, 결혼하면 끝일까?

착한재벌샘정 2009. 7. 11. 23:25

 

완소남 이야기 2 -  너를 부르는 이름, 아내가 아닌 내 여자의 이름

 

 

 

지현씨

지현아

현아야

어이

저기

이봐

훈이 엄마

훈아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이렇게 변했더군요.

내 애인이야.

내가 결혼할 사람이야.

내 예쁜 신부야.

우리 와이프야.

우리 마누라야.

우리 애 엄마야.

우리 집사람이야.

우리 집 솥뚜껑 운전수야.

아내를 소개하는 말도 이렇게 변했고요.

 

어느 날 아내의 휴대폰을 열었더니 이렇게 적혀 있는 겁니다.

<지현아, 윤지현...>

‘윤지현? 자기 이름을 왜 적어 놓은 거야?

윤지현 휴대폰이라는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지현아, 윤지현, 이라니? 마치 지현이를 부르는 것 같잖아?

뭐지?

참 이상도 하네.

자기 이름도 깜빡깜밖하나? 그래서 한 번씩 불러보나?

이 아줌마가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기에 자기 이름도 써 놓고 불러 봐야 하는 거야? 아직은 그럴 나이는 아닌데.....‘

 

“어이, 훈아, 훈아? 어이 훈이 엄마?”

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안 불러주는 이름이라 자신이라도 불러 주어야겠다 싶어서라는 겁니다. 휴대폰 열 때마다 소리 내어 한 번씩 읽는다고, 지현아, 윤지현, 하고 불러 본다고.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이 많이 쓸쓸해 보였어요. 눈에는 눈물이 고여 오는 것도 같았고.

“내 이름이 너무 안 불려 지니까 마치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요. 나 윤지현은 없고 황병준의 집사람, 황훈의 엄마만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러 주니까.”

“친구들끼리는...”

“친구들.... 맞아요. 친구들은 이름을 부르죠. 지현아, 윤지현하고. 그런데 내가 가장 많이 비비적거리는 이 집에서 나, 윤지현은 없는 거죠. 20대에는 사랑에 눈이 멀어 당신 애인인 것이 마냥 좋기만 했죠. 30대에는 아이 키우느라... 열 달 배 아파 낳은 우리 아기 훈이. 그래서 훈이 엄마로 불리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나 스스로가 훈이 엄마에요, 라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것이 전부이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 군대 가버리고 없어요. 군에 가기 전에도 대학 들어가고 난 뒤로는 내 손을 거의, 도리어 귀찮아할 정도였으니까요. 품안에 자식이라는 말 맞아요. 살림도 이제는 예전만큼 쓸고 닦고 하기도 싫어요. 그래봤자 빛나는 것도 아니고 당신처럼 승진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요 뭘. 당신한테 특별히 뭘 바라는 것도 없어요. 그것도 젊었을 때 일이죠. 기대도 많았죠. 그래서 실망도 많았고 혼자 울기도 많이 했어요. 미워도 해보고 이를 부드득 갈아도 봤고요. 그래도 남들처럼 이혼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온 거, 당신이나 나나 아마도 무던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어요. 40대 불혹의 나이라고 하죠?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하는데 나는 보면.... 그 무엇도 나를 유혹하지 않는, 유혹이 없으니 흔들릴 일도 없는 게 아닌 가 싶어요. 모든 게 그저 그래요. 심드렁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데 당신 말처럼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친구들과 같이 있는 시간이 그래도 살맛이 나요. 그렇게 매달려 살았던 남편, 자식보다 오히려 더 위로가 되고 편안한 것이. 이러다가 50대가 되면 따로 국밥이 된다죠? 남자들은 30대 40대에 일하느라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밖에 쏟아 붙다가 서서히 집으로 들어오는 시기인데 여자들은 이제 슬슬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가 볼까 하는 시기가 50대래요. 남편은 집으로, 아내의 치마폭으로 들어오려는데, 아내와의 시간을 꿈꾸는데 아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같이 있어 달라 부탁하던 아내는 너무 늦게 돌아온 남편이 반갑기는커녕 귀찮기만 하고 그렇게 같이 놀자 더니 이렇게 왔는데 왜 이러는 거야, 하며 남편은 섭섭해 하는.... 같이 살았지만 같이 공유한 것이 너무 없어서... 젊을 때는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어 같이 하지 못했지만 50대가 되어 시간이 생기고 여유가 생겨도 같이 할 줄 모르는, 같이 있어도 텔레비전이나 보고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부부가 된다죠. 엄마를 봐도 그래요. 전화할 때마다 집에는 아버지만 있어요. 엄만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바쁘죠. 더 늙기 전에 병들기 전에 이제까지 못가 본 곳 다 가보고 조금이라도 더 기운 있을 때 열심히 놀러 다니겠다고.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기다리며 화를 내죠. 니네 엄마는 뭐가 그리 볼일이 많다냐, 집구석에 통 붙어 있지를 않는다고. 집에 있는 날도 하루 종일 전화통만 붙들고 있다고. 우리 어릴 때 엄마의 불만이 그거 였는데. 니네 아버지는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집에 와서도 자기 일밖에 모르고, 하시면서. 엄마는 나이 70이 다 되어 드디어 자유부인이 되었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아버지는 혼자서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이 엄마만 기다리고. 라면이라도 끓여 드시라고 하면 니네 엄마 곧 오겠지, 하는 아버지. 자립도 0%의 남편과 훌훌 날아갈 것 같다는, 숨통이 트인다는 아내, 우리 엄마.. ....

우리도 그렇게 살겠죠? 오십 육십 칠십대를. 그렇게 생각하니 아직 까마득하네요. 같이 살아 온 날보다 같이....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네.

아, 내 이름. 이름 이야기 하다가 뜬금없이 엄마 아버지 이야기까지 나왔네요. 엄마는 초등학교 동창생들 만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대요. 대식아, 윤임아, 말름아, 순선아, 아이들처럼 이름 불러가며 웃고 노신대요. 주름진 얼굴이 그 때는 다들 활짝 핀다고. 대식이 하고는 그렇게 재미있는데, 웃느라 배가 다 아픈데 니 아버지하고는 할 말이 없다, 하시던 엄마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어요. 초등학교 친구인 대식이라는 분과는 추억이 있겠죠. 즐겁고 행복한, 제일 중요한 ‘같이 한’ 것들요. 몇 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동안의 추억으로도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데 50년 가까이 같이 살아온 부부가 마주 하고 웃으며 할 이야기가 없다는 거 얼마나 슬퍼요. 엄마도 그래요. 가족들에게는 잊혀 진 이름이지만 아직도 그 이름을, 순선아, 하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가 없더라고. 누구 아내도 누구 엄마도 누구 할머니도 아닌 순선이로 불리는 순간이. 아내가 아닌 엄마가 아닌 그저 사람, 여자로 느껴진대요.“

 

아내가 아닌 여자.....

지현아, 윤지현, 하고 휴대폰을 들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아내, 아니 지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왈칵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낯설 수가 없는 겁니다. 아내의 이름이 지현이라는 것이. 내게 있어 지현이는 스물넷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그리고 청혼을 할 즈음에서 멈춰버린 것 같았어요. 그 후로 나는 지현을, 여자 윤지현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십 후반의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내 앞에 앉은 여자, 가 아닌 사람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미안했고 많이 후회했죠. 이 사람을 여자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했을까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애인 같은 아내를 만드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내 안에서, 내 마음과 내 눈이 그 사람을 여자로 보아야만 가능한 일인데 말입니다. 아내와 여자. 너무 다르게 다가오는데 그렇게 미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무심했구나 싶은 것이.

아내가 잠들고 난 뒤 내 휴대폰의 단축번호 2번을 눌러 봤습니다. ‘집사람’이라고 저장이 되어 있었죠. 아내의 휴대폰에 어떻게 뜨는 지보니....

‘준, 그리운 내 남자’

그동안 아내의 감정을 읽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집사람’과 ‘준, 그리운 내 남자’ 사이에 흐르는 강물이 보이는 것 같았죠. 너무나 멀고 먼 강이라 건너지 못할 것 같은 강과 넘쳐나는 강물이.

아내의 단축번호 2번을 눌렀더니 집전화가 울리는 겁니다. 나는 단축 1번이 집, 2번이 집사람 번호인데 집사람은 단축 1번이 나이고 2번이 집이더군요.

아내는 실망도 많이 하고 원망도 많이 하고 이도 부드득 갈았다면서 나의 무엇이 그리웠을까요? 흰머리와 주름이 늘어가는, 오십의 고개에 올라선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준, 이라고.   

내 휴대폰에 집사람을 지우고 새로 입력을 했습니다.

지현아, 윤지현

아내 대신 내가 불러 주어야 할 이름이니까요.

휴대폰 화면의 문구도 바꾸었습니다. 내 것은 ‘지현의 준’으로, 아내....지현이 것은 ‘준의 지현, 사랑해’로.

남들 보면 그 나이에 뭔 짓이냐고 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무척 좋습니다. 아내를 부르는 호칭도 바꾸었습니다. 지현씨라고 부르죠.

“싸랑하는 지현씨 밥 줘.”

이러는데 밥만 먹고 사느냐고 구박? 절대 그럴 일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