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급한 정빈이를 위한 두 가지 - 영화와 등산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손은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피부상태와 색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해 아직은 조금 흉하지만요. 이번 일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제가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로 인해서도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상처가 나지 않도록 더더욱 조심해야겠어요. 걱정 끼쳐 드려 많이 죄송합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한 것이 아니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너무 지나버리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중학생이 된 정빈이 이야기입니다.
정빈이가 언니를 참 좋아하기는 하지만 언니로 인해 중압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언니가 대학을 간 후 ‘좋은 대학’에 관한 중압감이 더 심해진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크게 생각지 않았었는데 정빈이의 중압감이 의외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그동안 다니던 영어학원도 그만두었어요. 중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요.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남편과 정빈이와 의논을 하여 결정한 것이었어요.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의 성적이 아니라 스스로의 진로에 관한 탐색을 해보고 스스로 그것을 향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빈이가 이러는 겁니다.
“어머니 4월 28일부터 중간고사래요. 오늘부터 시험공부를 해야겠어요. 그리고 과학의 날 행사를 17일에 한대요. 시험이 코앞인데 무슨 그런 행사를 한다고 하는 건지, 정말.”
3월 중순을 지날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제 친구 중에 외고 갈려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중간고사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안 된다고. 그래야 거기 갈 수 있다고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대요.”
“너도 외고 갈 거니?”
“아뇨. 전 아직.... 지금까지는 만화가 꿈이었는데 요즘 들어 그게 좀.... 그래서 고민이에요. 그래도 꿈이 무엇인가 보다 일단 좋은 대학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잖아요. 아이들도 초등학교 때하고는 다르게 어느 대학 갈 건지 그런 이야기 많이 하고 선생님들도 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받아야 한다고 하고.”
무엇이 아이의 마음을 그렇게 급하게 만들었나.... 조금 심란하더군요.
정빈이 말처럼 그동안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만화가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면 진로 탐색의 시간이 먼저여야 하는데 일단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는 아이.
아이는 언니가 대학을 간 후
‘너는 더 열심히 해서 더 좋은 대학 가야지.‘ 라는 주변의 말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도 제가 서울대 가기를 원하시는 거 맞죠? 언니보다 더 좋은 대학 가야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왜 어머니가 네가 서울대 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을까? 얼마 전까지 너의 꿈은 만화가였고 어머니는 열렬한 지지자였어. 서울대에는 애니메이션과도 없는걸. 물론 만화가가 되기 위해 꼭 애니메이션과에 가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그런 진로를 택하거든. 만화가가 꿈이고 애니메이션과로 진학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서울대에는 가고 싶어도, 서울대에 갈 실력이 되고 넘쳐도 갈 수가 없어.”
정빈이는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 오던 만화가에 관한 생각이 흔들리면서 갈등이 많아진 모양이었습니다. 만화가에 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만화를 그리면서 뒷 배경을 그리는 것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그래서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건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리에 관해서도 예전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렇게 진로에 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자 일단 무조건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매주 금요일 마다 영화를 한 편씩 보자는 것입니다. 영화관에 갈 여건은 되지 않으니 비디오나 DVD를 빌려서 보기로 했습니다. 꿈도 아는 만큼 꿀 수 있다고 하죠? 아이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직업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그 많은 것들을 직접 체험하게 해 볼 수도 없고. 그래서 영화를 통해 다양한 직업들에 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첫째 목표이고 또 하나는 지금 이 시기가 문화적인 체험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저희 중학교 다닐 때는 ‘문화교실’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전교생이 단체로 영화관을 가는 거였는데, 기억하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제가 그 시간들은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고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참 많은 꿈을 꿀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어요.
자신의 미래에 관해 진지한 탐색을 하기 시작하고 갈등을 하고 고민하기 시작한 정빈이에게 영화라는 문화적 경험이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청소년을 위한 추천영화 77편』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인터넷 교보에서 가져왔습니다>
저의 계획을 들은 정빈이가 어찌나 신나하던지요. 단숨에 그 책을 읽고는
“어떤 영화 먼저 볼 거예요?”
“뮬란, 사운드 오브 뮤직 이런 건 벌써 본 거 잖아요. 본 거 이거 말고도 더 있어요.”
“15세 관람가도 많은데 이건 어쩌죠? 전 아직 14세인데.”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아이를 보면서 그랬습니다.
“꼭 이 책에 있는 영화만 보겠다는 건 아니야. 참고하자는 거지. 그리고 이미 봤던 영화도 보는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다시 보는 것도 괜찮아. 그리고 15세 관람가는.... 세월이 흐르지 않니? 단순하게 계산해서 이 책에 있는 77편을 본다고 하자. 일주일에 한 번, 한달에 4번 본다면 여기 소개된 영화만 보는데도 근 20개월이 걸려. 2년 정도. 내년이면 넌 15세가 되니 15세 관람가는 그 때 보면 되지.”
그렇게 해서 4월 10일 금요일, 드디어 첫 영화를 보았습니다. 봄날 저녁이 너무 좋아 산책 겸 같이 대여점을 찾았고 선택한 첫 영화는 『지구』였습니다.
<Daum 영화에서 가져왔습니다>
영화관에서 개봉했을 때 진짜 보고 싶었던 거라며, 그 때 보자고 몇 번이나 이야기 했는데 제가 바쁘다면서 안 보여줘서 많이 서운했었다는 원망까지 쏟아내며 선택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벚꽃이 지고 있는 저녁 길을 아이와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곧 보게 될 영화를 들고 걷는 시간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떨어지는 벚꽃이 코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하며 떨어지는 꽃잎을 향해 팔짝 팔짝 뛰는 저를 보며 허리를 잡고 웃던 아이. 그런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지금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해. 조금씩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 지 찾아보는 거야. 그동안의 시간도 결코 헛된 것들은 아니야. 그 시간들이, 만화가를 꿈꾸었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다른 것도 생각해 볼 힘이 생겨난 거라 생각해.”
영화는 저와 정빈이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고 저희는 행복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에 관해 관심이 가는 걸요. 지난 번 워낭소리 봤을 때도 그랬고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도. 환경운동가들이 하는 일도 관심이 있고. 동물들에 관해서도."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끝이 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시작한 것이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둘째 주 토요일에는 남편이 등반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산악회를 따라 등산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첫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체력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틈에 유일하게 끼여 다녀 온 등산은 아이를 많이 힘들게 했지만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분, 어른들도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는 것을 자신이 해냈다는 것에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다는 정빈이입니다. 다음 달에는 철쭉을 보기 위해 소백산으로 간다고 하더라며 벌써 다음 산행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물론 학교 공부는 기본이지요.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매일 6시간씩이나 수업을 하고 있고 방과 후 수업까지 하고 있거든요.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7교시가 있던 어느 날은 졸려서 정말 죽을 것 같았다며 수업시간에 졸지 않는 방법이 없겠냐며 아주 심각하게 물어오기도 하는 아이입니다.
아침에 자신을 깨우는 방법으로는 새콤달콤한 천혜향이 제일인 것 같다는 아이. 그래서 요즘 아침마다 껍질을 깐, 향기가 물씬 풍기는 천혜향을 잠자고 있는 아이의 가슴에 살짝 얹어두곤 합니다. 그 향기에 잠이 깨도록. 효과만점이랍니다.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정빈이.
아이의 지금도, 그리고 미래도 행복했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