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논술에 올인해야지 자원봉사는 뭐고 회화 학원은 다 뭐냐고요?

착한재벌샘정 2007. 11. 25. 22:09

주말 잘 마무리하고 계신지요?

일요일 밤 9시를 조금 넘은 저희 집 풍경은 이렇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남편은 거실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정빈이는 호떡을 굽느라 주방에서 혼자 부산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고 예슬이는 저와 마주 보는 자리에서 논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준 논제를 가지고 원고지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네요. 그런 언니가 안돼 보였는 정빈이는 따끈따끈한 호떡들을 열심히 구워 나르고 있답니다. 예슬이는 저녁도 많이 먹었으면서 호떡을 세 개째 먹고 있어요. 정빈이의 호떡은 정말 맛이 있거든요.

수능을 친 후 예슬이는 오랜만에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신동 가서 천을 잔뜩 떠와서는 좋아하는 인형 옷 만들기도 밤새워 하고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만화책도 빌려보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밤늦도록 친구들과 채팅도 하고.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도 보더군요. 시험 결과는 물론 만족스럽지 못해 결국 며칠 전에는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고요.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허탈하고 공허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맘이 상한다고 해서 점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야. 입시제도? 문제 많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것도 지금 이야기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잖아.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네가 그 점수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야. 그것이 되어야만 그 다음 것을 할 수 있어.”

이 점수를 위해 그렇게 죽도록 공부를 했느냐며 통곡을 하는 아이를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잠든 아이 곁에서 아이를 보듬어 주었지요.

그렇게 일주일 보내고 난 뒤 지난 금요일부터는 두 가지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점자 도서관을 찾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 회화학원에 등록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영어를 혼자 해왔는데 원어민들과 함께 회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해서 학원에 등록을 했답니다. 그리고 점자도서관을 찾은 것은 제 권유에 의한 것이었고요.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자원봉사 중 하나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 봉사였는데 이번에 예슬이와 같이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슬이는 시설에 있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어 하는데 녹음 봉사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권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내켜하지 않던 아이는 점자도서관이 건물 2층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 시작하더니 시설의 열악함에 또 한 번 놀라더군요. 녹음 봉사는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녹음을 해서 실제 시각장애인과 함께 몇 몇 실무자들이 녹음 된 상태를 들어보고 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더군요. 점자도서관의 상황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그 전까지는 그리 썩 내켜하지는 않던 아이가 순순히 녹음실로 따라 들어오고 녹음도 열심히 했답니다. 몇 번을 되풀이해보더니 그 정도면 테스트를 받아도 되겠다면서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음 날 녹음 스케줄을 잡자는 연락이 왔고요.  

정빈이는 호떡을 다 구웠는지 주방을 정리하고 자러 간다고 인사를 합니다. 예슬이는 여전히 원고지와 씨름을 하고 있고요.^^

예슬이에게 녹음 봉사를 권한 것은 자원봉사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예슬이에게 기운을 돋우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면 기운이 좀 날까해서요. 봉사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정화하는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녹음봉사를 권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해볼 기회도 주고 싶었고, 예슬이가 목소리가 이쁘고 글을 또박또박 잘 읽어서 그 일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잘 맞고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인지라.... 보통 200쪽이 넘는 책을 한 권 녹음하는데 하루에 두 시간 정도해서 16번의 녹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책 한권이 녹음되는데 4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셈이지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책을 눈으로 읽지는 못하더라도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되기에 꼭 해보라 권한 것이지요. 물론 저도 해야지요. 제가 마이크 앞에 앉는 것을 무지 좋아한다는 건 다 아시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그 일을 통해 누군가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잖아요.

남편은 다른 집들은 논술 학원이다 과외다 난리라는데 논술에 올인해야지 자원봉사는 뭐고 회화 학원은 다 뭐냐고 볼멘소리를 하더니 제 생각을 들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저보다는 귀가 좀 얇은(?) 편인 남편은 수능 친 날 저와의 산책에선 좀 기다려 주자더니 신문이다 방송이다 논술이 중요하다고 난리라면서 논술 준비를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을 하는 겁니다.  

논술도 중요하다는 거 안다고, 예슬이도 나름대로 논술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하루종일 논술 준비만 하지는 못하지 않느냐고.  지금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능 점수로 인해 자기 존중감을 손상하지 않는 일이라고. 그래서 자신이 가장 해보고 싶었던 영어에 대한 갈증을 푸는 것과 자원봉사를 통한 자기 정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었답니다. 그리고 저보고 기특(?)하다고 빨간 핸드백도 하나 선물로 사주었지 뭡니까. 오늘 기분 날아갈 것 같습니다요. 남편 정말 멋지지 않아요? 제가 나름 예슬이를 위해 쓰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아주니 말이에요. 저보고 같은 테이블 선생님들이 남편자랑 심하다고 남편 자랑 한 번씩 할 때마다 만원씩 내놓고 하라고 그러거든요. 내일 또 만원의 압박을 하루 종일 견뎌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예슬이에게도 수능 후 부쩍 신경을 쓰고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꿈꾸는 책나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독서치료 수업을 방과 후에 하고 있다 보니 요즘은 늘 지친답니다. 특히 독서 치료 수업은 워낙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요. 그래도 아이들 반응이 너무 좋아 정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답니다. 제가 올해 학교밖 멘토를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동아리때문이거든요. 10명이 넘는 아이들과의 시간은 힘들지만 보람찬 시간이랍니다. 복도에서 '멘토 쌤 안녕하세요'하며 반갑게 인사해주는 아이가 있어 참 행복해요. 수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영화 식객을 보러 갈 계획이랍니다. 만화 식객도 읽었는데 영화도 같이 보고 영화와 만화를 이용한 수업도 할 계획이에요. 재미있겠죠? 

그러다보니 블로그에 자주 오지를 못해요. 특히 답글 잘 달지 못하는 거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모두 행복하고 좋은 일만 가득한 일주일 시작하세요. 우리 같이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