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친 딸에게 쓰는 편지
사랑하는 우리 딸 예슬이에게
그저께 수능을 앞두고 편지를 썼는데 오늘 또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어제 밤에 참으로 오랜만에 너에 곁에서 밤을 지냈구나. 엄마 친구는 수능치기 전에 긴장한 아이를 위해 가슴에 안고 잤다던데 엄마는 수능치고 돌아 온 너를 가슴에 안고 밤을 보냈지.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이 들지 못하는 너인데 은근 슬쩍 네 침대에 누워 비비적거리는 엄마의 마음을 알았는지 나를 밀어내지 않고 엄마 곁에 와서 눕던 너. 그리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엄마 가슴이..... 큭큭큭“
"아가때 젖먹던 딱 그 자세가 나오네. 엄마 가슴 예전에 대단했었어. 너희 둘이 열심히 먹는 바람에....푸하하"
"엄마 젖 안 먹고 자라는 아이도 있나?"
너를 시험장에 보내고 엄마는 진짜 걱정 하나도 안했어. 너는 잘 할 거라 믿었으니까. 아침에 도시락을 싸고 점심시간에 네가 볼 수 있도록 짧은 편지를 쓰면서도 엄마는 그저 담담하기만 하더구나.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말이야. 그리고 그 담담함은 하루 종일 이어져서 엄마는 모처럼의 휴일(?)을 잘 보냈단다. 우리 딸이 잘 할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말이야.
학교 앞에서 미소 띤 너를 보면서 참 많이 고마웠었어. 드디어 끝이구나 하는 마음이었겠지. 집으로 돌아 온 네가 컴퓨터 앞에 앉아 답을 맞춰보다 그만둬 버릴 때 솔직히 ‘왜 저러지? 많이 틀렸나?’ 싶은 마음에 잠시 뜨끔했었어.ㅎㅎㅎ 하지만 네 말처럼 이미 친 시험인데.... 결과가 바뀌지도 않을 건데... 천천히 알아봐도 된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일단 맛있는 거나 먹고 쉬자는 아버지가 현명하다 싶었어. 의외로 한산하던 식당이 수험생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가족들로 점점 붐비자 너는 이렇게 말했지.
“일단 집에 가서 가 채점 해보고 온 모양이지요. 점수보고 한 판 울고 위로 차 온 집도 많을 걸요.”
아버지에게 술 한 잔 올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너를 보며 아버지의 눈이 순간 출렁하는 걸 엄마는 보았단다. 아버지에게 우리 슬이는 참으로 큰 존재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단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엄마와 다시 외출을 하자고 하더구나. 아버지와 같이 천천히 밤길을 산책했었어. 우리 아파트는 나무가 많아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잖아. 참 아름다운 가을밤이더구나. 그 길을 걸으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어떤 것 같아? 혹시 우리가 너무 기대를 한다는 생각에...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 결과도 안 알아보는 거 아닌지 걱정돼. 우리 슬이는 생각이 너무 깊은 아이라... 자신의 감정보다 우리를 더 생각하느라고... 이렇게 따로 나오자고 한 것은 혹시 그렇다면 아이가 너무 힘들 거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싶어서야.”
“저도 그런 생각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래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종잡지를 못하겠어요. 슬이에 대해서는 엄마인 제가 참 예민한 편인데....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표정, 그리고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또 모르죠. 학교 시험하고는 달라서 속 깊은 아이가 우리를 너무 많이 생각해서 안 그런 척하고 있는지도. 어떻게 해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중에요.”
“자슥, 자기 생각만 하면 좋겠구만. 속으로 쌓지 말고 퍽퍽 터트려도 되는데.... 그 모든 거 다 받아주고 안아 주는 게 부몬데.... 부모로서 우리 가슴에 이제 처음으로 줄 하나를 그은 것에 불과해. 아이에게는 이제 출발인 거뿐이고 그 출발이 어느 것이 정답이라는 것도 없는데....”
“맞아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과 시간들이 아이 앞에 있는데.... 이건 정말 그 일부분일 뿐인데... 예슬이도 그걸 알면 조금 덜 힘들 텐데 말이에요. 허탈하다는 말, 백번 공감해요. 그 감정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힘들지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대로 그냥 지켜봐주기로 해요. 하고 싶은 거 너무 많은 아이라는 거 알죠? 당신 그거 지원해주려면 지갑 단단히 준비해 둬야 할 걸요. 자기는 끝났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고흐전도 가야하고 휘성 콘서트도 가야하고 뮤지컬 보고 싶은 것도 줄줄이고, 영화도 그렇고.... 대신동 가서 옷감 떠서 인형들 옷도 만들어야 하고... 책도 나중에라며 미뤄둔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몰라요. 내일 당장 시장부터 갈걸요. 친구들 대부분 성형외과 예약해놓았다는데 내가 이쁘게 낳아준 덕분에 그 돈은 안 들어도 되니 마누라에게 고맙다고 해야 해요.”
“당신에게 돌아 갈 것이 없어지는 거지 뭐. 딸한테 양보해야지 할 수 있나? 점수는 12월 12일 되면 저절로 알게 되니 슬이가 이야기하기 전에는 묻지 마. 그 정도는 해줘야지. 대신 예슬이가 뭘 하고 싶은 지 잘 알아봐. 주말에 여행이라도 갈까?”
“이런이런... 눈치 없는 아저씨가 있나.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예슬이는 이제 우리하고 놀고 싶지 않다니까요. 친구들하고 놀다가 놀다가 더 할게 없어져 심심해지면 그 때 엄마, 하고 우리를 찾을걸요.”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러지.”
“지금은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고 지켜봐주는 것이 전부일지도 몰라요.”
“그래? 어쨌든 당신이 신경 좀 많이 써. 시험치기 전보다 지금이 더 힘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아버지와의 가을밤 산책은 이어졌단다. 멋진 데이트였어. 아버지는 갈수록 더 멋있어지는 거 있지. 알지, 우리가 닭살 부부라는 건!!!
슬아, 아버지 말씀처럼 네 생각만 해. 엄마와 아버지는 우리 슬이의 어떤 결과도 소중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엄마가 어제 너와 같이 자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 우리의 마음을 슬이가 느낄 수 있었으면 해서였어. 어떤 경우든 우리는 널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줄 거라고. 너에게 만족할 수 있는 점수는 없을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곳에서 진정한 출발을 하자꾸나.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거, 알지? 충분히 쉬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 마음껏 해봐. 그리고 결과가 나오면 그 때 그것을 가지고 진짜 멋진 시작을 하는 거야.
엄마가 늘 하는 말 기억하지?
'좋은 것만 생각하자. 좋은 생각과 믿음은 좋은 현실로 내 앞에 나타나준다.'
잠든 너를 안고 엄마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단다. 그리고 고마웠었어. 따뜻하게 전해오는 너의 체온을 느끼며 엄마는.... 참 행복했었어.
사랑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