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정치하는 사람들 정말 잘 하시오

착한재벌샘정 2004. 10. 27. 12:31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신지요?

저희들은 지난여름 아파트 난방을 중앙집중식에서 개별난방으로 변경하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아직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취사용 가스만 들어오는 상태에서 온수도 난방도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가스의 압력을 낮추어 각 가정으로 분배한다는 가스 정압기 설치를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 이유는 ‘꼭 필요한 것은 알지만 우리 집 앞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스정압기 터질라....내집 근처엔 설치 금지>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까지 실리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16개동 1,162 가구가 함께 살고 있는 대단지 아파트인데 우리 동 앞에는 안 된다는 마음에 결국은 주민 모두가 피해자로 살고 있는 중이지요. 우리 동 앞에는 안 된다는 사람들은 다른 동에는 안 하면서 왜 하필 우리 동이냐고, 마치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분들도 결국은 피해자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저희들처럼 찜통에 물을 데워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겨우 물이나 묻히는 정도로 샤워를 하고, 온기 하나 없는 썰렁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이 번 일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장 크게 깨달았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주민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사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회장단(그렇게들 부르시더군요)들의 철저하지 못한 계획과 무책임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정압기의 필요성과 안전성, 그리고 어느 곳에 설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결정을 한 뒤 정해진 장소와 가장 가까운 곳의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했다면 이렇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일이든 반대는 있기 마련인데 반대에 부딪혔다고 해서 그럼 다른 곳에 하겠다고 했으니. 그럼 두 번째로 정해진 장소 부근의 주민들은 무어라 생각하겠습니까?

“뭐 우린 바본가? 그 동에 안 된다고 하니 왜 우리 동 앞이야? 위험하다고? 그런 게 있으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그럼 저희 집만 위험하고 집값 떨어지고 우리는? 우리도 절대 안돼.”

그렇게 해서 또 반대에 부딪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저 동도 반대해서 무산되고 다른 동도 반대하서 안됐다는데 우리라고 가만있을 수 없지. 우리도 안돼.”     

그렇게 정압기는 한 달 째 이리저리 허공을 떠돌게 되었던 거지요. 

 

반상회가 열리고 전체 회의가 열렸건만 ‘왜 하필 우리 동이냐?’는 말만 되풀이 되었지요. 퇴근길에 엘리베이터 옆에 반상회 공고가 붙었는데 장소가 경비실 앞이었습니다. 반상회를 할 집에 없어 - 왜 우리 집에서 하느냐? 다른 집도 많지 않느냐? - 그렇게 정했다고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더군요. 그날 반상회는 저희 집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희 집에 오신 분들 아마 마음이 상해서 가신 분들 많으실 겁니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제가 가장 나이가 어린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만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반상회 할 집이 없어서 이 추위에 경비실 앞에서 반상회를 한다는 것을 보고 솔직히 너무 놀랐습니다. 물론 반장님이 바빠서 모든 집에 연락을 다 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 따라 하필이면 사정들이 다 있으셨겠지만 경비실 앞에서 반상회라니요.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오는 게 뭐 그리 힘이 드는지.... 앞으로도 모일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집으로 오십시오. 저도 특별한 일이 있어 안 되는 날이 있겠지만요.

그리고 여기 왜 모인 겁니까? 다른 동이 안 된다고 반대할 때 저를 비롯해 대부분이 그 사람들 이기적이라 말하던 우리가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 동 부근에 온다니 우리도 이러고 있어 되겠냐, 대책을 세워야겠다며 이렇게 모인 것을 보며 마음이 많이 불편합니다.

왜 안 되는가요? 우리 동 앞에 설치하자고 합시다.  솔직히 저는 우리 집에라도 설치하라고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위험하다고요? 그럼 우리 집에 있는 가스렌지는 안전할까요? 전기는요? 안전을 따지자면 우리 집에 있는 많은 것들이 정압기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필요하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꼭 필요하고 설치를 해야 하지만 나는 말고 누군가가 해라. 나는 빼고 너희들 중에서 해라, 라는 마음만 있다며 어떻게 될까요? 저희 집 두 딸은 지금 친구네 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어른들의 이런 모습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어서요.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압기 있어야 해. 근데 우리 집에는 안 돼. 위험하니까. 그리고 그런 게 집 앞에 있으면 집값도 떨어지고. 근데 다른 동 사람들 정말 웃기네. 왜 자기들 집 앞에는 안 된다는 거야. 정말 이기적인 사람들이군, 그지? 자기들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함께 살아가야할 세상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부터 한 번 돌아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 앞에 올 수 있다면 오도록 합시다.

이 일의 발단은 주민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이렇게 감정을 몰아가도록 만든 몇 몇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만든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저러고 있는데 다 같이 피해자인 주민들끼리 서로 감정만 소모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같은 동네에서 얼굴 마주쳐가며 살아갈 이웃이잖아요.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우리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런지요?

그 사람들도 처음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합리적이고 타당한 근거들을 제시했다면, 그들이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중재자가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누구나 손해 보는 것은 싫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다 같을 겁니다. 저도 싫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찬성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단지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지 못 할뿐 일겁니다.“

 

모인 사람들 중 제가 제일 젊은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참으로 송구스러웠지만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반상회에서 뿐만 아니라 아파트 회의에도 참석해 보았습니다. 회의가 아니라 감정의 대립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일의 진행 과정에서 발생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질문하였지만 회장단도 관리소장도 누구 한 사람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실제로 가스를 사용해야 할 주민들의 제대로 알아야 할 권리가 너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니 이야기들이 전해지면서 많이 왜곡될 수밖에 없겠지요.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고 그런 이야기들이 들려오면 가만히 있던 사람들도 분노를 느끼게 되어 감정만 더 상하게 되고.

“나는 가만있을려고 했는데 그런 이야기 까지 들어가면서 우리가 양보해야 할 이유가 어딨어? 가만있으려니 정말 너무들 하네. 안돼. 절대 안돼.”

 

게다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공사를 한 뒤 모든 세대에 가스관을 연결해 며칠 동안 사용을 했었는데 정압기 공사 때문에 다시 가스관을 분리했는데 많은 세대가 가스관 분리를 하지 않은 채 온수와 난방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도시 가스에서 찾아오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 집에 온수가 나오고 난방이 되니 밖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도 무관심한 세대도 많다는 거지요. 일부 세대가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 하던 도시가스 쪽에서도 신문에 기사까지 나자 가스 관 분리가 확인되지 않는 세대가 적힌 안내문을 각 동 엘리베이터 옆에 붙였지만 자진해서 가스관을 분리한 세대는 별로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 사실이 알려지자 임의로 연결해서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며 도리어 보일러 공사하는 사람들을 불러 관을 연결하는 집까지 있다는 겁니다.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되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가스 관 분리당하고 찬물에 세수하고 양말까지 신고 자면서 일을 빨리 잘 해결해보자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만 바보가 된 것 같이 만들고 있으니 더 분노할 수밖에요.

 

결국 정압기 설치 장소를 결정하기 의해 많은 비용을 들여 전문 용역업체에 의뢰하게 되었고 오늘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공권력의 투입’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요?

두 곳이 선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한 곳은 만약 공사를 하면 ‘공사 정지 가처분 신청’까지 불사하겠다고 했다는군요. 다행히 다른 곳의 주민들이 ‘우리가 받아들입시다’라며 의견을 모아주어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마울 따름이지요.

 

반상회에서, 아파트 회의에서 목소리 높인 결과 눈총을 조금(?)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동 앞에 설치하자는 말씀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라는 분도 계시고 아예 인사를 안 받으시는 분도 계십니다. 너 잘났다,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저처럼 목소리가 크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오늘 공사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공사가 간단한 것이 아니라 한동안 지금과 같은 생활은 계속 될 것 같습니다.

정빈이는 감기에 걸려 저희들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찬물에 머리도 감고 급하면 찬물로 샤워도 하는 튼튼한 예슬이와 같은 아이도 있겠지만 많은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한달 넘게 고생을 시키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저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나’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너무 평범한 말의 무게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정말 잘 하시오.’